막내 시누는 뉴욕에서 휴가 잘 보내고 지난 주말에 다시 하와이로 갔습니다.

떠나기 전 날,

맨하탄 한인 타운에서 저녁 먹고

(친구 집에서 자고 다음 날 공항 가기로 되 있어서)

헤어지는데...볼만 했어요.

 

막내 시누도 눈물이 그렇게 많은 줄 이번에 알았고

남편도 내 앞에서만 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맨하탄 34가 7애비뉴의 러시 아워, 그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에서 눈물을 흘릴 줄이야...

 

 

제가 미리, 너무 슬퍼하지는 말라고 우리가 곧 하와이 간다고 위로를 한다고 했는데

둘이 어찌나 서글프게 눈물을 뚝뚝 흘려 대던지..

큰 시누가 왔다 갈 때는 큰 시누 혼자 눈물 글썽이고 남편은 별 감흥이 없어 보여서

옆에서 보는 제가 큰 시누한테 조금 민망 했었는데

이번에 막내 시누 보낼 때는 남편이 이렇게 사람 많은 대로변에서 눈물을 뚝뚝 흘릴 줄 정말 몰랐네요.

 

 

그러고 바로 두 시간 후부터는 텔레비젼 보면서 키득대는

본래 모습대로 돌와 왔고요,

저는 막내 시누한테 열심히 질문한 하와이 내용 곱씹으며

하와이 카페에도 가입을 하고 '힐로에서 직장 구하기' 웹 싸이트도  즐겨찾기에 등록해 놓고

지금 한참 정보 찾기에 열 올리고 있는 중이예요.

 

 

시누들이 사는 곳은, 하와이 빅 아일랜드의 힐로(Hilo)라는 곳이고요,

한국 사람들이 그닥 많이 사는 것 같지는 않고

힐로에서도 시누들 사는 동네는 관광객이 몰리는 동네는 아니고

그냥 현지 사람들 중심의 동네라고 하더군요.

 

 

4년 여 전 쯤 어느 날 불현듯,

큰 시누가 뉴욕 떠나겠다고, 하와이에 벌써 직장 구해 놨다고,

선언을 했을 때 큰시누가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크고 뉴욕에서 전체 인생을 보내던 사람이

갑자기 저리 먼 곳으로 이주를 하는 저 결단!!!

 

 

뉴욕의 겨울이 너무 길어서 힘들고

뉴욕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무례하고

터무니 없는 집 값은 평생을 이렇게 일만 무작시레 하고 살아도 내 집 마련은 현실이 되기 어렵고.

 

 

딱 제가 평소에 뉴욕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들, 다 저 큰 시누가 찌찌뽕으로 읊더니

나는 간다~

하고 멋지게 홀연히 하와이로 떠났더랬죠.

성격 뾰족하고 날카롭고 신경질 많던 큰 시누가

(큰 시누 성격이 제 나쁜 성격하고 공통점이 아주나 많습니다)

하와이 생활 2년 쯤 하고 뉴욕에 가족들 보러 다시 나타났을 때 

그 힘들던 성격이 얼마나 느긋해지고 부드러워 졌는지

제가 큰 시누 변한 모습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  

'기후와 환경이 인간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 이런 논문을 하나 쓰고 싶을 정도였어요.

 

 

아...그렇게 나쁜 성격도 그런데 가서 살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거구나...

나도 이 못된 성격의 반은 다 이 몹쓸 도시 탓이야...

나도 여기서 빨리 떠야 해...

정말로 이 대도시에서 쥐새끼처럼 사는 이 생활을 빨리 청산 해야 해...

 

 

저런 생각이 굴뚝같던 차에,

따라 붙은 사람은 이쁜아짐이 아니고 막내 시누였죠.

2년 반 전에 막내시누가 역시나 불현듯,

나도 간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와이로 가버렸습니다.

달랑 배낭 하나 짊어 지고 가길래, 금새 다시 올 줄 알았는데...

 

 

거기서 뚝딱 일 자리 구하더니 눌러 앉더군요.

 

 

그 동안 시부모님도 시누들 보러 하와이 한 번 다녀 오셨고 (길게 두 달)

둘째 시누네도 한 번 다녀 왔고

저희 부부만 아직 안 가봤어요.

남편은 하와이 자체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해 왔는데

제가 지금은 태도가 워낙 적극적이고 강경하다 보니까 생각이 아주 조금 바뀔랑 말랑 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뉴욕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본질적으로는 뉴욕의 지하철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사람 사는 데는 뉴욕만한 데가 없고,

뉴요커들의 무례함마저 이 도시가 매력적인 이유의 한 부분이고,

이렇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진정한 인생이며,

어쩌고 저쩌고.

자기가 어디도 가 봤고 어디도 가 봤지만 역시나 뉴욕이 최고, 뉴욕 뉴욕 뉴욕, 하는

뼈 속까지 아이 러브 뉴욕하는 뉴욕 토박이라,

 

 

그 동안 제가 뉴욕 살이에 대한 고달픔과 불만을 늘어 놓아도

타주 이주나 해외 이주, 이런건 귓등으로도 안 들어 왔습니다.

이번에 내 놓은 핑계는

자기는 뉴욕의 겨울이 좋대요. 사계절 없이 여름만 있는 동네서 자기는 못 산다고.

 

 

그래서 제가

뉴욕이 말이 사계절이

엄밀하게 말해서 봄하고 가을은 없다고 봐야지.

4월에도 두꺼운 외투 입어야 하는게 그게 봄이야? 겨울의 연장선상이지.

그렇다고 가을은, 한 달이나 되려나?

9월 10월 까지도 덥다가 어느 순간 찬바람 온다 싶으면 바로 외투 꺼내 입기 시작하는데..

사계절은 무슨..뉴욕은 일년이 여름 반 겨울 반이야 이거 왜 이래.

 

 

 

이렇게 부부가 안티 뉴욕 프로 뉴욕 설전을 벌이다가

나는 어쨌건 한 번 다녀라도 와야겠다, 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주 가능성 파악을 위한 사전 답사 목적으로.

 

 

셋째 성은

'바람 들었다. 별 현실성이 없다'라고 단정 지으면서도

이러다 제 풀에  꺾이겠지...하는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극구 반대를 하지는 않고 있고

 

 

제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아 잘 어울릴 것 같아.

이쁜아짐하고 하와이는 잘맞는 조합의 느낌이 들어.

가서 자리 잡으면 바로 놀러 갈께.

반대 의견은 단 한 명도 없더군요.

 

 

무얼하든 어디에 살든 불평 불만에 찌들어 사는 인간이라면

뉴욕을 떠나 하와이 아니라 하와이 할아버지 동네에 갖다 놔도

형태만 달리한 푸념 늘어 놓는 삶의 연속이 되겠지만

그것 역시 해보지 않고는 내가 정말 그런 루저인지

아니면 어떤 돌파구를 찾음으로 해서

새 인생을 사는 기회가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태어나고 자란 서울에서의 20년 인생도 나에게는 힘들고 고달픈 기억 뿐이었고

그 이후로 19년을 살아 온 뉴욕이라는 곳도

저에게는 그다지 즐거운 것이 없었어요.

성인으로 산 19년 뉴욕 생활 동안,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았던 대학 시절 몇 년 빼고는

이 직장 저 직장을 전전하던 몇 년에

그리고 자괴감에 찌들어서 살던 백수 생활 몇 년에

 

 

남들이 다 일부러라도 와서 보고 즐기고 하는 것들,

저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좋아하지도 않아요.

밖에 나가서 사람 만나는 것도 일년에 고작해야 서너번일 정도로 사교 생활도 거의 전무한 사람인데

굳이 대도시에서 뼈를 묻을 이유가 없죠.

 

 

이제는 이렇게 집에서 놀고 먹는 건 더 이상 할 수 없는게 현실이고

뭐라도 정말 뭐라도 해야 하는데,

셋째 성 말은 뉴욕에서도 못 구하는 직장을 하와이 가서는 더더욱 어렵지 않겠냐 하는데

뉴욕에서도 하와이에서도

낼 모레 나이 마흔이 되는 별 경력이 없는 아줌마가 '번듯한 직장'을 잡을리는 없으니

어차피 이렇든 저렇든 번듯한 직업이 아닐 바에야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사는 곳이라도 마음에 들면

인생 자체에 대한 만족도와 행복 지수는 높아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게 제 생각이고요.

 

 

만약에 얼마 간이라도 하와이에서 살아 보다,

여기도 안되겠다, 하면 그 때 가서

나는 정말로 구제 불능이로구나...라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반성은 그 때 가서.

해보지도 않고 이대로 계속 지금 사는 곳에 대한 불평과 불만만 계속 쌓아가는 불행한 인생을 살기 보다는

더 늦기 전에 한 번 해 보자 , 하는 결심이.

 

 

뉴욕 예찬으로 입에 침이 마르는 남편한테는

사전 답사 여행은 나 혼자 조용히 다녀 올 참이니 신경쓰지 말고

이 좋은 뉴욕에 얌전히 계시라고 했어요.

 

 

계획은, 내년 2월 쯤이 지금 희망 사항이고요.

왜냐면..여행 경비부터 벌어놔야 하니까요 ㅎㅎㅎ

마음 같아선 당장 비행기 예약하고 쇠뿔 단김에 빼듯 추진하고 싶지만

이제는 더 이상 카드 긁어서 어디 나돌아 다니는 그런 짓은 안하고 살겠다고 다짐한 바라...

일 구해서, 월급 받아서, 쌈지돈 모아서, 그렇게 다녀 오려고 합니다.

 

 

 

이래서 문제는 또 다시 원점으로.

일자리 부터 구해야 하는 거로군요.

이쁜아짐은 오늘도 희망을 놓지 않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구직 싸이트 훑고

한 군데 찜해 놓고 지금 이력서는 대충 고쳐 놓고

커버 레터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는..뉴욕에서 벗어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실낱 같은 기대감 만으로도

정신 건강이 많이 좋아진 이쁜아짐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더 열심히 일자리를 구해야 할 명분이 생기니

구직 싸이트 훑는 일에도 더 의욕이 생기고

이러다...반전으로 혹시라도 정말 좋은 직장이 생기면...

하와이는 없던 일로 쳐도 무방하고요ㅋㅋ

대충 상황 봐 가면서.

 

 

바람이 든다는게..

바람마저 들지 않고 묵묵하게 가라 앉아 있기만 하는 생활 보다는 낫다 싶습니다.

바람이 들어서 무언가를 무모하게 벌였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제 인생에 아직 없어요.

 

 

좌충우돌 살았어도 면면히 내면은 겁도 무작스레 많은 편이라

소소한 사고는 끊임없이 치고 살았어도

무언가 큰 일을 구상하고 계획하고 밀어 부치고 그랬던 일은 없네요.

지금도 시누들이 둘이나 이미 자리 잡고 있으니 어디 나도 한 번? 하는 생각이나 하는 거지

큰 시누처럼 홀홀 단신 살던 기반 다 접고 하루 아침에 어디로 가는 건

저는 아마 못 할 거거든요.

 

 

20년 서울에 살았고

그 다음 20년 뉴욕에 살았는데

앞으로는 나도 나 살고 싶은데서 한 번 살아 보고 파요.

나같은 사람도 성격 개조가 되는가 안되는가 한 번 시험해 보면서.

 

 

 

살랑 살랑 원피스 하나 둘러 입고 머리에 큰 꽃 하나 달고 콧노래 흥얼 거리면서

쉬는 날은 훌라 춤 배우러 다니는 이쁜아짐이라...

그림은 참 잘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