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시절, 지금 사는 이 아파트로 '독립'이란 걸 하고 살다가

(당장 필요했던 살림 살이는 다 언니들한테 중고로 협찬 받아서) 

결혼 후 남편이 이 아파트로 합세하는 바람에

결혼 했다고 특별히 새로 장만한 살림 살이가 없었습니다.

 

특별히...가 아니고 아예 하나도 없었군요.

쓰던 것들 그대로 쓰면서 남편의 꼬질꼬질한 살림들이 추가됬을 뿐.

밖의 음식과 통조림 음식, 냉동 음식으로 생존하던 사람이

어떻게 블랜더가 살림 살이에 있고 종류 별 칼 세트 (제대로 썰리는 것은 하나도 없었음)에

상자 뜯지도 않은 핸드 믹서까지. 허허..

 

 

결혼 후 처음 바꿨던 살림 살이가 밥솥.

 

둘째 언니가 쓰던 거 받아 와서 쓰던 밥솥이 폐기 처분 상태가 되서

아~~ 드디어 새 밥솥 산다~~~

하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언니들이랑 쇼핑을 갔는데

둘째 언니, 셋째 성 옆에서 하도 비싼 것 사지 말라고 뜯어 말리는 바람에...

두 식구 살림에 뭘 그렇게 좋은 밥솥을 사느냐,

예약이고 압력이고 다 필요 없다,

밥솥 가지고 요리를 하기는 뭘 하냐, 밥만 하면 된다,

좋은 밥솥은 나중에 좋은 집으로 이사 가면 사라,

 

 

아유 아주 이유도 많아요.

저 때는 신혼 무렵이어서 저도 이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간다는 것을

저 자신 포함 모든 주변인들이 어떤 암묵적인 전제로 가지고 있었을 때.

부부가 둘이 함께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돈 모으고,

작은 아파트, 내 집으로 마련해서 나가라,는.

 

 

이사부터 하고 좋은 살림 살이는 그 때 가서 하나씩 장만하라는

말을 뭐 하나 살 때 마다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산 것이, 밥 되고 보온 되는 아주 기본 적인 기능만 갖고 있는

$60 짜리 모델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저것도 거품 가격.

밥하고 보온만 되는 밥솥은 저 반 가격도 안 되는 값에 살 수 있는데

브랜드 네임 쫒아 갔다가 헛 돈 쓴 격입니다.

보온은...구입 직 후 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반 나절 지나면 맛있는 밥 냄새 다 없어 지고 시원찮은 냄새 나고.

이 문제는 밥솥 문제라기 보다 보통 다들 그렇다 하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 갔습니다.

 

 

그래서 밥을 하기만 하고 보온 기능은 전혀 안 썼어요.

밥 하고 나서 식힌 다음에 통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먹을 때 꺼내서 데워 먹기.

얼마 전에 보니 내솥 바닥이 까지기 시작한 게 보이더군요.

60불 주고 사서 그래도 한 7년 썼나 보네요.

 

 

그 다음 망가진 것, 일명 마늘 가는 기계.

셋째 성의 트레이드 마크인 세일 노리기.

25% 세일에 리베잇에 어쩌고 저쩌고 모든 노하우를 집대성 하여

정가 $15이던 원 컵 푸드 프로세서를

최종가 3불에 건져서 저에게 선물로 줬어요.

 

 

김치 담글 때 저게 있으면 생강이랑 마늘이랑 같이 갈면 참 편리할 텐데..

매일 노래를 부르면서도

막상 사게 되지는 않던 거였는데

그거 귀담아 듣고 있다가  엄청난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사 줬습니다.

 

 

음식할 때 두 세개 정도씩 다질 때에는 그냥 그 때 그 때 까서 쓰고,

김치 담글 때는 저걸 요긴하게 썼지요.

지난 번 김치 담글 때 쓰고 잘 씻어서, 다시 찬장 위로 올린다고 하면서

뚜껑이 떨어 져서 깨졌어요.

뚜껑이 딱 맞물려야 모토가 돌아가는 기능 상,

제일 쓸데없는 게 망가 졌는데 기계 전체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네요.

이것도 거진 5년 잘 쓰던 거였는데...

 

 

그러고 나서 보니

큰 후라이팬, 남편 아침 요리할 때 주로 쓰는 건데...

이것도 흠집이 한 두 개 나기 시작한게 보이더군요.

 

 

 

코팅 팬으로는 이것과 함께 작은 크기로 동그란 게 하나가 더 있고

(거의 안 씀)

사각 모양이 있는데

이건 제가 김밥을 자주 싸 먹다 보니 김방용 계란 지단 부칠 용으로 샀던 건데

이거 살 때도 언니들의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계란 지단을 얼마나 부친다고 그냥 동그란 모양으로 부치면 되지

뭘 꼭 네모 모양으로 하느냐고, 그런 식으로 살림살이 사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이 반대 여론과 한 2-3년 씨름 하다

결국엔 내 맘대로 사 버렸습니다.

사고 났더니 이것이 제의 넘버 원 코팅 팬.

원래의 목적대로

김밥 용 계란 지단 부칠 때, 각 딱 맞게 떨어져서 만족감 100%.

동그란 팬에 부쳐야 하는 것, 사각에도 다 되니까 이리 저리 다 쓸 수 있고,

두부 부칠 때,

두부도 사각 모양이니까 사각 후라이 팬에 부치면 공간 활용이 동그란 팬 보다 훨씬 좋더군요.

이 팬이 얼마 전부터 달라 붙기 시작 하더군요.

바꿀 때가 되었다는 소리겠죠.

 

 

 

스탠레스 팬만 쓰는 사람들은

계란 후라이도 잘 된다고 하던데

저는 스탠 팬에 계란 후라이 부치는 기술 연마는 별로 생각이 없고요,

동그란 모양으로 큰 팬은 이 기회에 그냥 갖다 버리고

코팅 팬은 사각 하나로 통일을 해 버릴 참이고요,

 

 

밥솥은 대충 동네 디스카운트 스토어들 다니면서 구경하고

메이시스에서도 잠깐 봤는데

밥만 되는 이런 기본적인 밥솥은 충분히 25불 미만 선에서 가능 하겠더군요.

 

 

마늘 가는 기계는,

이번에 김치 담그면서

남편이 '혼수'로 들고 온 때깔은 구질구질해도 되기는 잘 되는 블랜더에

(옛날 가전 제품들이 잘 망가지지도 않고 튼튼하기는 요즘 것들 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액젓을 같이 넣고 갈았어요. 당분 간 그렇게 쓰면 되겠고.

 

 

예전부터 희망 사항은

음식 진공 포장되는 푸드 세이버와

캐스트 아이언 팬.

고것들이 몇 년 전부터 갖고는 싶었는데

푸드 세이버는 제 수준에는 워낙이 고가 제품이라 한참 더 희망 사항으로 남아 있을 듯 하고

캐스트 아이언 팬은 기회 봐서 비교적 빠른 미래에 하나 장만하고 싶어요.

 

 

안 써 봤던 물건들은 호기심이 나고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나긴 하는데

쓰던 물건들 망가지는 것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네요.

몇 년에 한 번은 망가져 줘야 새로 사는 기분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저는 손에 익고 내가 잘 쓰던 것들, 이렇게 망가지는게 싫어요.

코팅 팬이야 천년 만년 쓰는 것 아니고

비싼 것 오래 쓰는 것 보다 웬만한 것으로 자주 바꿔 주는게 더 좋다는 말도 들어서

그러려니 하지만

밥솥이랑 마늘가는 기계는 참 아깝네요.

주요 기능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들도 내솥에 뚜껑,

부품만 따로 구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더 쓸 수 있는 것들인데

그럴 수가 없어서 아예 새로 바꿔야 한다는 것도 아주 마음에 안 들어요. 쳇!

 

 

 

차례로 살림 살이들이 아작이 나 버려서 황당은 했지만

대체 방안이 어찌 어찌 마련이 되는군요.

당장 제일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 밥솥인데,

지금 두어 주 째 뚝배기에 해 먹고 있는데 아직은 할 만 하네요.

끼니마다 하는 것 아니고 한 번 하면 이틀 정도 먹으니까

하루 걸러 하루 밥 하는 셈이예요.

 

 

지난 번 잡았던 일자리를 또 그새 없어져서

다시 집에서 노는 신세된 지 어언 한 달 여.

이젠 이런 말 하기도 너무 창피하네요.

아...다음 번에 직장 생기면 어쩌고 저쩌고 입방정 떨지 말고 조용히 다녀야 겠어요.

내가 직장을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첩보원처럼 조용히 다녀야지.

 

 

 

지금은 집에서 시간도 많고 하니까 뚝배기로 당분간 가고

직장 다시 가셔서 바빠지면 밥솥은 그 때 사기로 하고.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커피 내려서 한 잔 책상에 가져다 놓고

컴퓨터 켜고, 이력서 보낼 만한 곳 한 군데 마침 보이길래 이력서 고치고

쌀 씻어서 안치고,

칼럼 쓰는 동안 밥이 잘 되었네요.

 

 

반찬은 계란후라이에 김치요ㅋㅋㅋ

 

 

밥 먹고 비타민 챙겨 먹고 오후엔 비가 더 많이 내린다니

비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산책을 나갔다 오렵니다.

어제는 날씨가 좋아서 한 시간도 훨씬 넘게 걸었는데 

오늘은 날이 영 꾸리꾸리하니 30분 정도만 하려고요.

 

 

산책 후 에는 제 개인 공부 조금 하고

(이것도 좀 웃김. 그냥 책 읽는 것인데 나 기분 좋으려고 '공부'라고 이름 붙임)

저녁 나절에는 남편하고 집안 서류 정리 좀 하려고요.

그러다 보면 저녁 밥 먹을 시간이 되겠고.

오늘 저녁은 생선까스 먹기로 했어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밥은 잘 챙겨 먹는 이쁜아짐인지라

가을이라고, 가을 탄다고, 또 이렇게 11월이 내 속을 허하게 하네...하면서 마음은 쓸쓸...한데...

입에 들어가는 것 마다 맛있네요.

(그럼 이건 진짜로 가을을 타는게 아닌 걸까요? 겉모양만 센치한 척 하는 것이고?)

살림살이가 망가져도 꿋꿋하게 집 밥 해먹는 이쁜아짐.

솔직히 맛 있기는 밥솥 밥 보다 뚝배기로 한 게 더 맛 있기도 하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