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수감사절 연휴는 시골 안 가고 집에 있었습니다.

남편하고 상의 끝에 저는 이번에는 그냥 안 가는게 이모저모 겸사겸사 낫겠다 싶어서

수요일 아침, 남편만 가고 저는 연휴 동안 '나홀로 집에' 했어요.

 

 

백수 신세에 연휴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서도

여튼 이래 저래 걸어 놓은 일들이 있어서

혹시나 연락이 올까...싶어 스탠바이 상태로 있어야 겠다 하면서.

수시로 이 메일 확인 했어야 하는 일도 있었고요.

 

 

혼자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정리해 보자, 하는 각오도 집에 남은 이유 중의 하나였지만

이것도 마음 먹은 만큼 생산적이진 못했고

대신 혼자서 밥만 잘 해 먹었네요.

 

 

추수감사절 날은 아침으로 보쌈 해 먹었고요,

아침이 제일 중요 하다는데 든든히 먹어야지 암만,

하고는 전 날 김치 담그면서 미리 빼 두었던 절인 배추 꺼내고

역시나 미리 해 두었던 무생채도 담고

돼지고기만 바로 쪄서 (냄비에 양파 두 개 반으로 갈라서 깔고 고기 살포시 얹은 다음 중불에 30분. 끝)

한 접시 싹싹 잘 먹고.

 

 

저녁 나절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길래 감자탕으로 저녁 먹었고요,

감자탕은 한 20인 분 쯤 끓였나 봅니다.

이거 원 정말로 하숙집을 하던가 해야지

손크게 음식하는 버릇을 고쳐 보려고 신경을 써도 안되네요 이게 참.

 

 

어차피 한 번 만드는데 시간 오래 걸리니까 넉넉히 만들어야 보람이 있지, 하면서

돼지 등뼈를 한 개, 두 개, 세 팩이나 집어서는

거기에 구색 맞추자니 우거지도 한 댓박, 감자는 예닐곱개나 들어 가고.

집에서 제일 큰 냄비에 한 가득 끓여서는 혼자 저녁으로 먹고.

 

 

남편없이 이틀 밤을 보내고 나니 셋째 날부터는 좀 심심해 지더군요.

금요일 밤 열 시가 넘어서 남편이 전화,

자기 지금 킹스턴에서 버스 탈 거라고 새벽 두 시쯤 집에 도착할 것 같다고.

원래는 토요일 밤에 집에 오는 거였거든요.

깜짝 놀래켜 주려고 낮에 미리 전화 안 했다고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어머나 심심하던 차에 계획을 바꿔 일찍 온다니 다행이군~!!!

 

 

졸린 눈을 비비면서 기다렸더니 정각 두 시에 남편이 집에 도착.

가방에서 바로 시어머님이 싸주신 터키를 꺼내더군요.

제가...재작년이던가요?

눈사태가 나서 시골집에 갇힌 채로 3박 4일 터키만 먹은 이후로

땡스기빙 터키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인데

시어머님은 물론 이런 제 마음을 모르시겠죠.

 

 

터키 냉장고에 집어 넣고 돌아서니 남편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선물이 또 하나 있다면서 가죽 잠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데

바로 저, 딱 제 손바닥 만한 동강난 무 한 쪽.

 

 

헤어지는 인사 마치고 차 타려고 돌아 섰는데

시어머님이 뒤에서 다급하게 부르시면서 저 비닐 봉지 안에 든 무를 들고 쫒아 나오셨답니다.

저 갖다 주라고.

남편이 됬다고 괜찮다고 했는데

(남자들은 왜 누가 챙겨주는 것 짐에 들고 다니는 걸 귀찮아만 하는지)

어머님이 극구 가져 가라고 하셔서 급하게 주머니에 찔러 넣고 왔대요.

 

 

아니 그럼 그 때는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쳐도 차 안에서 가방안에 좀 넣지

다섯 시간 동안 계속 주머니에 무 넣고 오는 건 또 뭐래요.

 

 

어쨌든,

제가 저 무를 보고,

어머님 밭에서 나온 거지? 했더니

남편은 잘 모르겠답니다.

 

 

다섯 시간 떨어져 사는 며느리 갖다 주라고 '무'를 내미시는데,

그것도 달랑 반쪽 자리를.

그 이유와 사연이 궁금하지도 않은가??

내가 맨 날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채소 가게에서 항상 살 수 있는 '무'인데?

물어 본 내가 잘못이지.

 

 

분명히 어머님 걸거야.

어머님 거니까 나 주라고 하셨겠지.

 

 

어머님 텃밭 농사에 아버님이고 남편이고 그닥 관심 없어요.

큰 시누도 그렇고 둘째 시누도 그렇고.

막내 시누만 어머님하고 같이 농사 일 했는데 그 시누는 지금 하와이에 있으니

지금은 저만 어머님 텃밭에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밭에 들어 가는 사람도 저 밖에 없어요.

봄이나 여름에 시골 가면 저는 부모님하고 인사 마치자 마자

바로 저 밭으로 달려 가거든요.

뭐가 얼만큼 자랐나, 올해는 무엇 무엇을 심으셨나. 둘러 보고

가 있는 동안은 저도 일 도와요.

 

 

지렁이도 아직은 볼 때 마다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고

올 여름엔 심지어 뱀까지 보고, 혼비백산 해서 반나절 넋이 나가 있었고

일은 꼬딱지 만큼 하고 허리는 금새 아프고 해서

큰 일손은 못 되는데도

어머님이 많이 좋아 하세요.

당신이 열성으로 하시는 농사에 관심 갖고 동참하는 사람은 저 뿐이라

같이 무언가를 하는 재미가 있으신가 봐요.

 

 

올 봄에는 감자 심으실 때

저는 그 옆에 앉아서 콩 타고 올라갈 줄 뭉태기를 하나씩 풀었고요,

저는 우루루 앉아서 떠드는 그룹 대화 보다 단연코 일대일 대화를 선호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어머님이랑 단둘이 밭일 할 때는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해요. 

어머님은, 제 언니들 안부 부터 차례로 해서 아이들 학교 생활 어떻게 하는지 까지

차례로 빠짐없이 물어 보시고

저는 친정 식구들 근황을 이것 저것 말씀 드리고.

 

 

감자 심은 앞 줄로는 제가 콩을 심었고요.

화분 안에 저절로 싹이 오른 딜(dill)도 밭 여기 저기 구석에 옮겨 심었고

청경채도 심었고

오이랑 호박은 씨 뿌렸고 여러 가지 했어요.

 

 

여름에 갔을 때, 첫 오이 수확을 했는데

네가 심은 거니까 너부터 먹어 봐라, 하셔 가지고

바로 우적 우적 먹는데..정말 저렇게 맛있는 오이는 내가 다니는 어느 마켓에도 없죠.

 

 

무는...제가 관여는 안한 것 같은데,

매해 빠트리지 않고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제게 무 많이 먹는 것도 잘 아시고요.

저렇게 한 개도 아니고 반쪽만 온 사연은

아마 저것이 올해 수확한 마지막 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제 깍두기를 담갔는데 거기에 합세 시킬까 하다가

그럼 어떤게 어머님 무인지 구별이 안 될 터라 일단 보류 시켰고요,

육수 내는 걸로 쓰기에도 아깝고,

반찬으로 무 나물을 해서 먹어야 겠어요.

 

 

남편이 자켓 호주머니에서 꺼내서 보여 줬을 때는

이 엄청난 양의 무를 뭘 어떻게 해먹냐 하고 깔깔깔 웃었는데

채 썰어서 나물로 하면 몇 번 먹을 만큼 될 것 같네요.

 

 

어머님이 먹거리 두 가지를 싸 주셨으니,

한 가지씩 전담해서 먹자고 했어요.

나는 무를 먹을테니 당신은 터키를 먹으시오. 하고.

남편이 조금 황당해는 하면서도 3일 동안 조금씩이라도 계속 먹기는 하더군요.

그러더니 오늘은 자기도 안되겠는지

저더러 샌드위치라도 만들어서 '같이' 먹자고.

저는 오늘도 버텼는데, 내일은 샌드위치 만들어 먹어야 겠어요.

 

 

비 오는 저녁에 혼자 감자탕 먹을 때만 해도

올해는 시댁을 안 가서 내가 터키를 피해 가는구나...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더랬는데

터키가 이 먼데까지 나를 쫒아 오다니...

참으로 무서운 땡스기빙 터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