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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의 작은 서재

The Girls with No Names by Serena Burdick (2020) Margaret Kim (margaret7630) 2020-3-3  12:12:43

The Girls with No Names


By


Serena Burdick





루엘라 (Luella)와 에피 (Effie: Euphemia의 애칭)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자매였다. 심장에 문제를 가지고 태어난 에피는 언니인 루엘라를 많이 의지했고, 그녀가 만들어 나가는 세상을 따랐다. 그녀는 언니의 경계선 안에 있을 때 안전했고 안심이 되었다. 에피와는 달리 루엘라는 반항적이었고, 모험심이 강했다. 루엘라가 13살이 됐을 때, 각자의 방이 생겼지만 여전히 둘은 함께 잠을 잤다.


어느 날, 둘이 함께 밖으로 나갔다가 집 근처 숲 속에서 양말과 신발을 벗고 웅덩이에 막 발을 담구려고 하는 순간 바이올린 소리와 노랫 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좋은 그 소리에 매혹되어 그들은 신발과 양말을 들고 나무들이 서있는 곳의 끝에 서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보통 때는 비어 있는 초원에 천막들과 밝은 색이 칠해진 마차들이 빙둘러 모여 있었다. 말들은 풀을 뜯어 먹고 개들은 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원을 이뤄 손을 위로 올리고 춤을 추는 여자 댄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 안에 있는 그녀 주변으로 노래하는 목소리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루엘라는 에피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저 여자를 좀 보라고, 정말 굉장하다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저렇게 움직이고 싶게 만든다고 속삭였다. 루엘라는 5살 때부터 러시아 안무가에게서 발레를 배우고 있었다.


그 집시 댄서는 뭔가가 완전 달랐다. 에피는 그런 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춤은 넋을 놓고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아주 매끄러웠으며 지칠줄 몰랐다. 루엘라와 에피는 공기가 차가워지고 태양이 나무 뒤로 지고 있는 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오래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둘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미 어두워진 숲은 한밤중에 안대로 눈을 가린듯이 깜깜했다. 그들은 숲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발견한 집에서 험상궂게 생긴 한 남자를 만났고, 루엘라의 재치로 그에게서 등불을 뺏어 도망쳐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다. 당시 뛰는 게 금지된 에피는 거의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었다. 다행히 부모님이 외출 중이라 그들이 늦게 들어 온 걸 들키진 않았다.


침대에 누운 루엘라는 에피에게 바이올린 소리와 목소리가 너무나 멋졌다고, 그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고 말했다. 침대에 누워 에피와 루엘라는 만약 집에 오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하면서 이러저런 얘기를 하다가 루엘라가 에피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말했다. 에피가 기억하는 가장 분명한 기억으로 그것은 사실이었다. 루엘라는 절대로 에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일은 아버지 때문에 일어났다. 한번도 그런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아버지 때문에 말이다.


에피는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들은 굉장히 푸른 눈동자와 두툼한 입술로 미소를 짓는 아버지의 얼굴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생겼다고 말했다. 그것은 안기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아래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 그런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었다. 에피처럼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말 수가 적은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할 때 보면 상대방에 대해서 그가 털어놓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미묘한 암시같은 게 있었다. 반면, 엄마는 직설적이었고 꾸밈이 없었다.


에피가 어렸을 적에 집에 찾아온 여자 손님들이 하는 얘기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어떤 여인이 에피의 부모가 연애할 때 '(Jeanne)이 에머리 (Emory)에게 무슨 마술을 부렸나 보다고 하면서 하지만 자신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거라고, 반반한 남자는 항상 옆으로 샌다'고 말했다. 당시 에피는 7살이었고 그 여인의 말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아버지와 결혼하기 위해 술수를 썼다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에 대해 댓가를 치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21살 때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프랑스 출신인 엄마 역시 긴 팔 다리를 가진 사랑스러운 발레리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손이었다. 엄마가 16살 때 한 공연의 리허설 도중 치마가 불에 붙는 사고가 있었는데, 당시 그녀가 손으로 그것을 끄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그 이후 그녀는 흉터가 남은 손에 언제나 장갑을 끼고 있었고, 에피와 루엘라가 엄마의 맨손을 볼 수 있는 건 얼굴에 마사지 크림을 바를 때뿐이었다.


엄마는 에피와 루엘라에게 왜 너의 아버지가 나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했는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무대에 서는 발레리나였지만 한번도 프로포즈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집에 갇혀 늙어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엄마는 루엘라가 천만다행으로 자신을 닯지 않았고, 그녀의 미모로 자신은 하지 못했던 성공을 할 거라고 말했다.


루엘라는 정말로 예뻤다. 그녀는 에피가 지어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했던 외증조 할머니의 화실에 있는 사진 속 이미지와 똑같았다. 외증조 할머니는 에피의 엄마가 태어나기 전 돌아가셨고, 엄마를 매 시즌 발레 공연에 데리고 간 사람은 엄마의 외할아버지였다. 엄마가 할아버지를 위해 댄스를 배웠다고 하자, 루엘라는 자신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그녀 자신을 위해 춤을 출 것이라고 말했다.


에피는 이런 걸 보면서 자신은 무용수가 될 수 없으며 곤봉 모양의 기형적인 손가락을 갖고는 남편도 찾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저 목숨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에피는 190011, 예정일보다 7주나 빨리 태어났다. 아버지는 새해 첫 날 틸든 (Tildon) 가에 아이가 태어난 것은 그 해에 좋은 일만 생길 징조라고 말했다. 하지만 에피는 실망을 안겨 주었다. 엄마에 따르면, 에피는 고양이처럼 작은 소리로 울었고, 그것이 산파를 놀래켰다고 했다. 그것은 그녀의 심장이 좋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의사는 장기의 발달이 잘 되지 않은 결과에 따른 기형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은 아직 그녀를 데리고 가고 싶진 않았는지, 닥터 로메로 (Dr. Romero)는 아기가 청색증 (cyanosis)을 갖고 태어나지 않아 운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그녀의 심장에 나 있는 비정상적인 구멍을 닫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의사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지만, 아버지는 어떤 의사도 자기에게 자신의 아이가 첫돌도 맞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고 고함쳤다고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심장에도 불구하고 에피는 살았다. 의사는 에피가 젖을 빨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했지만 엄마는 의지가 없어서 충분히 강하게 빨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에피는 유리병에 든 연유를 마시며 자랐다. 당시 자신이 갖고 놀던 인형과 크기가 똑같았던 에피를 보고 루엘라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도 된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에피를 인형과 똑같이 다루었다.


닥터 로메로는 첫 해에 매달 에피의 심장을 체크했다. 그런 다음엔 일 년에 한 번씩으로 바꼈는데, 그는 에피가 갈 때마다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다는듯 어서 오라며 감탄했다. 닥터 로메로의 병원에 가는 동안 엄마는 온통 에피에게 관심을 쏟았지만 에피는 그것을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9월 어느 쌀쌀한 날, 그날은 다른 때와 다르게 닥터 로메로의 오피스로 가지 않고 닥터 루이 비숍 (Louise F. Bishop)이라는 이름이 붙은 클리닉으로 갔다. 에피가 이유를 묻자 엄마는 닥터 로메로는 심장전문의가 아니라고 말했다.


닥터 비숍의 클리닉에서 에피와 엄마는 심전도라는 기계를 처음 보았지만 그는 에피가 너무 어려 그 기계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닥터 비숍은 에피의 가슴에 차가운 청진기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은 후 청진기를 내리고 에피의 손에서 장갑을 끌어내려 심장 때문에 모양이 변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손가락들을 살폈다. 엄마처럼, 그녀도 목욕과 잠자리에 들 때를 제외하곤 장갑을 벗지 않았다. 닥터는 에피의 손가락을 들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비쳐보며 그녀의 손가락이 곤봉 모양이 된지 얼마나 됐느냐고 물었다. 엄마가 에피가 5살 때부터 시작됐다고 말하자 의사가 점점 더 나빠지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더 나빠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지 좀 됐다고 하면서 더 나빠질까요? 하고 물으며 자신의 손을 비싼 실크 옷 속으로 감췄다.


그녀의 질문을 무시한 채, 닥터 비숍은 에피의 팔을 잡더니 항상 이렇게 말라 있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에피가 많이 먹는다고, 그저 가늘게 태어난 아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는 에피가 단순히 가늘게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고, 그녀는 '심실중격결손증' (Ventricular septal defect)을 가진 아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엄마에게 따라오라고 말하며 인접한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갔다. 엄마가 들어 가자 그는 문을 닫으라고 말했다.


이전의 닥터 로메로는 한번도 에피의 손가락에 대해서나 그녀가 얼마나 말랐는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무슨 결손이라는 병명도 처음 들었다. '결손'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지 않았다.


그날,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는 일찍 퇴근했다. 살짝 열려진 틈으로 방안을 보니 평소엔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조끼와 넥타이가 흐트러져 있었다. 엄마가 아버지의 넥타이를 바로 잡아 주며 뭐라고 속삭이자 아버지가 갑자기 일어섰고, 그 바람에 램프가 넘어질 뻔했다. 잠시 후 엄마에게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버지와 엄마의 대화에서 에피의 심장에 난 구멍, 3년 같은 단어들이 들렸다. 그날 밤, 에피는 의사에게 간 것을 루엘라에게 말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묻지 않았다.


한편, 집시를 발견한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에, 에피와 루엘라는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온통 어떻게 하면 핑계를 대고 나가 집시 캠프로 다시 갈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판자같이 빳빳하게 다림질된 줄무늬 조끼를 입고 있었고, 옆으로 가르마 탄 머리에서는 포마드 냄새가 났다. 그는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가장 솜씨좋은 재단사를 고용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천박했고, 그들은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에피의 할아버지는 탄산수 회사 창업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그것을 물려받았다. 엄마에 따르면 그것은 굉장히 번창했는데, 아버지가 허락한 하인은 청소부 닐라 (Neala), 중년의 흑인 요리사 벨마 (Velma), 그리고 엄마가 파리에서 데리고 온 마고 (Margot)뿐이었다고 했다. 에피가 어렸을 적엔 더 많은 하인들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절약을 외치며 전처럼 그렇게 많은 하인들이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그 결과 에피와 루엘라는 다른 여자아이들이 갖는 그들만을 위한 하녀가 없었다.


그날 아침, 열심히 아침을 먹다가 갑자기 루엘라가 아버지에게 집시 캠프에 관해서 물었다. 아버지는 읽고 있던 신문을 접어 옆으로 놓고 왜 그것을 묻느냐며, 그들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루엘라가 그들이 이 근처에서 캠핑을 하고 있는 걸 신문에서 읽었을 뿐이라고 하자 아버지도 그만큼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그들이 다 나쁜 건 아니라고, 그들 중에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그들이 천박한 사람들이라며 이민자들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이민자들을 그녀 만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에피는 엄마 역시 이민자 아니냐고 지적하고 싶은 걸 참았다. 엄마는 만약 그들이 차려놓은 부스에서 운명을 보고 돈을 지불한다면 그것은 자선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시, 절대로 그들의 캠프에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잠시 후, 둘은 부모님에게는 점심 때까지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스케치북을 들고 집을 빠져 나왔다. 집에서 멀어지자 마자 그들은 스케치북을 나무 뒤에 숨기고 전날 발을 담구려고 했던 개울 쪽으로 달려가 이번에는 나무들이 서 있는 끝에서 멈추지 않고 바로 집시 텐트와 캐러반이 있는 곳으로 용감히 걸어갔다.


그들이 다가가자 13살 정도로 보이는 한 집시 소년이 따라왔다. 에피는 집시는 모두 검은 눈에 검은 머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는 주근깨가 있는 흰 얼굴이었고, 눈동자 색도 밝았다. 그 아이는 자신의 이름은 트레이튼 터틀 (Trayton Tuttle)이며 트레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말했다. 루엘라가 그들의 연주가 듣고 싶어서 왔다고 하자 그 아이는 자신의 엄마에게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에피와 루엘라를 열려진 텐트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한 여자에게로 데려갔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 마르셀라 (Marcella)라고 소개했고, 그녀에게 이 두 언덕 위의 어여쁜 아가씨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루엘라에게 만약 주의하지 않으면 음악이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당신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고 말했고, 에피를 바라보더니 당신은 그렇게 쉽게 영향을 받을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잠시 후, 바리톤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며 시드니 (Sydney) 터틀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에피와 루엘라에게 차례로 악수를 하더니 엄마에게 트레이를 그렇게 밖에 나오게 해서는 안된다고, 사람들이 그를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말했다. 마르셀라는 그를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에피와 루엘라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에피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루엘라는 주저없이 어제 노랫 소리를 들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그래서 그걸 다시 한 번 더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르셀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자신들은 낯선 이들을 위해서는 노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에피가 돌아가자는 표시로 루엘라의 팔을 잡아 끌었지만 루엘라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그들의 연주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워 어떤 사람도 그것을 들으려 멈췄을 거라고 말했다. 마르셀라는 불쏘시개로 불을 한 번 더 쑤시더니 다시 자신들은 낯선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에피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루엘라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마르셀라에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마르셀라에게 당신은 이미 자신들에게 소개되었으니 이제 낯선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이 말에 마르셀라의 입술 끝이 미소를 짓는 것처럼 올라갔다. 그녀는 루엘라를 쳐다 보며 너의 부모가 너희들이 이곳에 온 줄 아느냐고 물었다. 루엘라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당신들이 좋은 말장수들이라고 얘기했다고 덧붙였다. 마르셀라의 입에서 하! 하는 믿지 못하겠다는 탄식이 나왔다. 마르셀라는 손으로 의자 두 개를 가리키며 에피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그것은 반항할 수 있는 어조가 아니었다.


마르셀라는 고급 도자기 접시에 빵을 주었다. 그것은 그들의 집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접시였다. 에피는 대개 밖에서 구운 빵은 먹지 않았는데, 마르셀라가 준 빵은 바삭바삭했고, 속이 꽉 찼으며, 건포도가 들어 있었다. 에피는 텐트가 펄럭거리는 틈새로 작은 방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곳의 집시들은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문명화된 사람들이었지만 에피는 엄마로 하여금 두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들 주변에는 진동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알 수 없는 에너지 같은 것으로, 마치 그들 음악의 피가 침묵 속에서도 발 밑의 땅에서 흘러다니는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소녀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루엘라의 나이쯤 되어 보였는데 외모는 좀 더 성숙했다. 검은 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그 소녀는 에피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그녀는 다가와 땅바닥에 앉더니 자신의 이름이 페이션스 (Patience)라고 소개했다. 에피는 트레이가 다른 형제 자매들과 다르게 왜 혼자만 흰 피부를 가졌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온 소식이 캠프에 퍼졌고, 아이들이 각자 키우는 애완동물들을 데리고 그들 주위로 모여들었다. 마르셀라는 팔짱을 끼고 불 옆에 선 채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꾸짖거나 떨어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왁자지껄한 아이들 무리가 물러설 때까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방어를 하도록 놔두었다. 이것이 마르셀라가 다른 엄마들과 다른 점이었다. 에피의 세상에서 엄마들은 모든 것에 개입했다. 하지만 마르셀라는 매의 눈으로 상황이 스스로 정리될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시드니가 바이올린의 활을 첫 번째로 들어 올렸다. 트레이가 악단을 모은 게 틀림없었다. 남자들이 페이션스를 두고 원을 만들었다. 그녀는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악단의 연주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고, 조금 있으니 악기 사이로 깊고 애절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루엘라가 마치 항상 그랬던 것처럼 페이션스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에피는 의자에 앉아 그것을 보고 있는데, 마르셀라가 다가와 그녀를 춤추는 곳으로 이끌었다. 에피는 춤을 어떻게 추는지 잘 몰랐지만 음악이 그녀를 격렬하게 움직이도록 이끌었고, 결국 숨이 차 앞으로 내동이쳐졌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폐가 엉큼한 심장과 공모를 한 모양이었다.


트레이가 괜찮냐고 소리쳤다. 그는 에피를 옆으로 끌어 당기더니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에피는 그를 밀치고 머리를 숙인 채 쭈그리고 앉아 호흡이 느려지고 진정될 때까지 버텼다. 트레이가 그녀의 옆에 쭈그리고 앉더니 어깨를 꽉 잡으며 질식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다행히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고 연주자들은 계속 연주했다. 에피는 괜찮다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이 그렇게 못마땅하게 끝나버린 것이 실망스러웠다.


에피는 춤을 끝내고 페이션스와 함께 열을 식히고 있는 루엘라에게로 가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페이션스가 루엘라의 머리를 땋고 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신의 스카프를 루엘라의 머리에 씌우며 차라리 그게 더 낫다고 말하며 웃었다. 루엘라는 그녀의 스카프를 만지며 그것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페이션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약 루엘라가 새로운 걸 가져다 주지 않으면 자신은 스카프없이 지내야 한다고 했고, 루엘라는 다음에 올 때 정말 멋있는 스카프를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캠프를 벗어나고 있을 때, 시드니가 말 위에서 그들을 보고 있다가 루엘라에게 달이 뜨면 오라고, 그때 다시 연주할 거라고 말했다. 그것은 수수께끼같은 초대였지만 루엘라는 그저 웃었다.


그날 밤, 루엘라는 페이션스가 가을까지 이동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며 매일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에피가 다시 갈 거라는 뜻이냐고 묻자 루엘라는 그렇다고, 만약 자신들이 악랄한 여름 캠프에 보내지지 않으면 매일 그곳에 가서 집시들과 춤을 출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름 캠프 말고도 그들은 매해 6월이면 뉴포트 (Newport)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보러 갔고, 에피는 그걸 기대하고 있었다.


에피가 페이션스의 스카프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자 루엘라는 자신의 메트리스 밑에 숨겨 놓았다고 말했다. 에피가 돌려 줄 거냐고 묻자 루엘라는 아니라고, 자신의 지루한 인생의 지루한 매 순간 오늘을 기억할 거라고 말했다.


다음 날부터 그들의 삶이 달라졌다. 모든 일이 따분했고 지루했다. 학교도 교회만큼 지루했고, 루엘라에게 발레는 고문이었다. 에피는 루엘라가 집시 캠프를 열렬히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는 새로운 기운이 있었다.


토요일, 그들이 반쯤 밖으로 나갔을 때 엄마가 지난 주에 그린 스케치북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루엘라가 재빨리 그것을 미술 선생님께 제출했다고 말하며 오늘은 학교 백일장 대회를 위해 시를 쓸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엄마가 노트는 어디있느냐고 묻자 에피는 아무 말없이 습작을 위해 갖고 있던 노트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루엘라에게도 노트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루엘라는 에피와 함께 쓸 거라고 말했다. 에피의 컨디션을 묻는 엄마에게 루엘라는 에피를 끌어 당기며 자기가 잘 돌보겠다고, 만약 에피가 조금이라도 괜찮지 않아 보이면 즉시 집으로 데려 오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집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집시 캠프로 갔다. 아이들이 준비한 연극을 보고 난 후 트레이가 호주머니에서 오렌지색 스카프를 꺼내 이마를 묶더니 에피에게 운명을 봐주겠다고 하며 장갑을 벗어야 한다고 했다. 에피가 이유를 묻자 그녀의 손바닥을 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학교에서 한 교사가 그녀에게 장갑을 벗으라고 했고, 그녀의 손가락을 보자 얼른 다시 그것을 끼라고 말한 게 생각나 주저하다가 에피는 장갑을 벗고 트레이에게 뭔가를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려 놓고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손바닥은 장갑처럼 따뜻했다.


그는 미소를 짓더니 침대로 올라가 베개 밑에서 카드를 꺼내 오더니 에피에게 그것을 섞어야 한다고 말했다. 카드는 밝고 새 거였다. 트레이는 카드를 원형으로 펼쳐 놓더니 에피에게 5장을 뽑으라고 하면서 절대 뒤로 돌려보면 안된다고 말했다.


잠시 후, 그가 카드를 뒤집었다. 그녀가 뽑은 첫 번째 카드는 둥그렇게 나열된 별들이 에워싸고 있는 한 여자의 그림이었고, 트레이는 그것이 그녀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는 거라고 말했다. 두 번째 카드는 구름 위에 떠있는 7개의 금잔으로 각각의 잔에 이미지들이 솟아나와 있었다. 그는 그것이 에피의 현재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 카드는 멋진 흰 말을 타고 있는 해골이 나왔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트레이는 조용히 그것이 지금 당장 그녀가 죽는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극단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거라고 말했다. 네 번째 카드에는 세 개의 검이 꽂혀져 있는 심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것이 그녀의 바로 앞 미래라고 말했다. 트레이는 똑바로 그녀를 쳐다 보았는데, 에피는 그가 그녀의 구멍난 심장을 바로 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트레이는 검이 박힌 심장의 그림이 총체적 상실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에피는 그 단어가 맘에 들지 않았다. 에피가 다른 카드를 뽑았어야 한다고 하자 트레이는 그럴 수 없다고, 카드가 널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제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었고, 트레이는 에피에게 그것을 뒤집으라고, 그것이 결과라고 말했다. 거기에는 양손에 지팡이를 들고 춤을 추고 있는 벌거벗은 여자의 그림이 있었다. 그녀는 화관에 둘러 싸여 있었는데, 네 코너에는 네 개의 종말을 상징하는 물체, 곧 사자, , 독수리 그리고 인간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이었다.


트레이는 안심됐다는듯 웃으며 좋은 일은 끝에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트레이가 그 카드에 대해서 설명을 덧붙였지만 에피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한 그것은 신 안에서 춤추고 있는 죽은 그녀였다. 트레이가 그녀의 무릎에 손을 올리며 좋은 거라고 하자 에피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루엘라가 텐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더니 가야 한다고 말했다. 밖으로 나오는데 트레이가 턱을 괸채 카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에피는 트레이를 부르며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자신의 심장은 항상 고장나 있다고 말하자 그는 웃으며 알고 있다고 말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에피는 트레이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지만, 마치 그가 그녀 인생의 한 부분을 영원히 차지할 것 같은 친숙함을 느꼈고, 동시에 그를 잃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이 동반되었다.


시간이 흘러 봄이 되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교장 선생이 학교 전통인 매주 토요일 웨체스터 (Westchester)에 있는 운동장으로 가 체육을 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에피는 운동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설득해 한 게임만 하겠다고 허락을 받아 루엘라와 함께 그곳에 갔다. 둘은 1시에 체육이 끝나면 집시 캠프로 갔고, 그것이 5시에 끝났다고 하기로 모의를 했다.


에피는 집시 캠프에 가면 트레이의 조용한 동반, 마르셀라의 요리, 아이들의 시끄러운 게임과 저녁 노래등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이 얼마나 조용하고 빈 집 같은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었다. 부모님이 계셔도 비교해 보면 외로움이 느껴졌다.


에피는 루엘라가 지금까지 그렇게 행복해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여름 캠프에 대해서도, 뉴포트에 가는 것도, 발레에 대해서도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시험도, 도덕 수업도 불평하지 않았다. 심지어 남자 친구로부터 전보를 받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자비의 집> (House of Mercy)에 보냈다는 수지 트레이너 (Suzie Trainer)에 대해서도 조금치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그 전보가 학교로 배달되었는데, 그 소년과 즉시 약혼해야 한다는 걸 수지가 거부하자 그녀의 아버지가 그렇게 보내버렸다고 했다.


<자비의 집>은 미국 성공회가 운영하는 문제 소녀들을 위한 시설로, 그들의 집 바로 위쪽에 있었다. 에피가 어렸을 적엔 그곳은 그녀의 이야기 속에 신비로운 장소로 종종 등장했지만, 2년 전 댄스 파티에서 한 소년이 루엘라의 등에 살짝 손을 댄 일로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만약 그녀가 그런 못된 아이로 자란다면 즉각 그곳으로 보내버리겠다고 말한 이후 정말 무서운 협박의 장소가 되었다. 당시 루엘라는 남자 아이의 손은 그저 그녀의 등 가운데 꼭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고 항변했다. 엄마는 루엘라의 말을 그대로 인정했다. 에피는 수지 트레이너가 사라지자 그 일이 생각났다.


그후부터 에피는 주말의 외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만약 붙잡혀서 아버지가 그들을 멀리 보내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한 가지 작은 일을 잘못한 것 같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들은 한달 내내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그들이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에피는 또한 코앞에 닥친 시험도 걱정됐다. 채핀 (Chapin)에 다니는 여자애들은 대부분 점수에 관심이 없었고, 그들의 관심사는 4명의 아이들을 가진 첫 번때 졸업생은 누가 될 것인가였다. 에피는 그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루엘라는 언젠가 아이를 갖겠지만 자신은 하나만 갖겠다고 했었다. 에피는 가정주부가 되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유명 여대인 브린 모어 (Bryn Mawr)에 진학해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것은 모든 과목에서 점수를 잘 받아야한다는 걸 의미했다.


집시 캠프를 다니면서 에피의 성적이 떨어졌다. 루엘라에게 그 얘기를 했지만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특별히 공부에 흥미가 없었지만, 이번 봄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다. 에피가 그걸 지적했지만 루엘라는 어깨를 으쓱할 뿐 전혀 관심없어 했다. 심지어 그녀는 발등이 아프다며 발레 수업을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흘렀다. 아버지가 빨강색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엇 보다도, 아버지는 에피와 루엘라를 태우고 유명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에피는 아버지의 관심을 받는 걸 즐겼을 테지만 죄의식 때문에 그것을 전혀 즐길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다른 이 점심이 매일 계속 되었던 첫 번째 주에, 에피는 그녀 앞에 놓인 이름이 뭔지 모르는 아름다운 음식을 보며 아버지가 그들의 집시 캠프 방문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그것이 거꾸로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가기 전 그들이 얼마나 좋은 상황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3주가 지난 후에야 에피는 아버지가 그들을 데리고 함께 한 점심이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매일 그들의 테이블을 스쳐 지나갔던, 자신의 음식을 직접 들고 가며 남자처럼 자신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던 눈부신 여자, 그녀가 이유였음을.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고 다른 여자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자부심도 있었다. 아버지가 모자를 살짝 들고 웃으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5월의 어느 날, 점심을 먹으며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던 중, 그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가로질러 그들에게로 왔다. 루엘라와 에피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도 여러 차례 디너며 파티에 참석했었지만 그 여자처럼 옷을 입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잡지에서 봤던 1913년의 신여성, 바로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그녀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뭔가 거슬리는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에머리, 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이 아름다운 생명체들은 당신의 딸들이냐고 물었다. 밝고 느긋한 그녀의 목소리가 식당을 둥둥 떠다녔다. 아버지가 일어서더니 그녀에게 에피와 루엘라를 소개했고, 그들에게 그녀를 아이네즈 멀홀랜드 (Inez Milholland)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이름을 들은 에피와 루엘라는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는 그들이 여성 잡지의 커버에서 봤던 바로 그 여자였다.


에피가 말이 없는 건 일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말이 없는 루엘라를 보면서 아버지는 무례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미스 멀홀랜드는 둘에게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하고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안이 너무 덥다고 혹시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피우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더니 테이블을 빠져 나갔다.


루엘라는 그녀를 좀 더 보고싶다며 에피를 잡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아이네즈가 택시 뒷 좌석에 타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그때, 앞으로 나아가려던 루엘라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아버지가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아이네즈의 선홍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에 키스를 한 것이었다. 에피 역시 그것을 보고 얼어버린채 그 자리에 서있었다.


루엘라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반항적인 기질이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에피처럼 루엘라도 아버지가 원칙적이고 양심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그녀가 너무 멀리 나갈 때 여느 좋은 아버지가 그런 것처럼 그녀의 고삐를 잡아 당겨 속도를 조절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세상 이치의 자연적인 질서를 존중했다.


그 질서가 산산조각이 나자 루엘라는 거칠어졌다. 그들은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루엘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에피는 그것이 더 견딜 수 없었다. 왜냐하면 루엘라는 항상 뭔가를 말했으므로. 잠시 후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팔을 의자에 걸친 채 태평하게 얘기를 했다.


루엘라와 에피는 그 얘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에피는 그 순간이 아버지가 키스 이상으로 거만을 떤 순간이라는 걸, 그래서 루엘라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만약 아버지가 불안해 하거나 안절부절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아버지의 도덕성이 손상되지 않았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열정이 그의 눈을 가렸지만 그는 평정심을 다시 회복했다.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금도. 다른 여자를 만나는 죄를 짓고서도 그녀의 아버지는 의기양양했고, 다정했으며, 오만했다.


에피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모든 것이 주어진 한 남자로 보았다. 그녀는 8살 때, 의사를 만나고 온 날 밤 어쩔 줄 모르고 거실을 왔다갔다 하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당시 아버지는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화를 낸 게 아니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녀가 오래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에게 소리친 것은 그녀가 튼튼한 아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뭔가를 뺏어간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서 였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피는 자신들이 목격한 사실의 중압감에 눌려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웨이터를 부르려고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밝고 푸른, 전혀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없는 눈을 보자 비위가 상했다. 그녀는 그녀의 흉터와 매력없는 팔다리를 가진 자신과 결혼해 준 아버지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엄마가 생각났다. 그리고 어렸을 적 거실에서 엿들었던 여자들의 말이 생각났다. 결국 엄마는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에피는 화가 났다. 엄마는 흉터 때문에 그것을 무릅쓴 것이었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간 루엘라는 에피에게 한 마디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에피 역시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도 지어낼 수가 없었다.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아버지는 에피가 써놓은 이야기를 보여 달라고 했고, 항상 진지하게 읽어 주었다. 엄마는 그것이 유치한 취미라고 했지만.


그날 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밥을 먹지 못하는 딸들을 보면서 엄마는 몸이 안좋은지 물었고, 에피는 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그들을 고급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었느냐며 그것은 그답지 않게 경솔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루엘라가 따지듯 그것은 아버지답지 않게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비록 오늘 미스 아이네즈 멀홀랜드 같은 멋있는 여자를 만나서 반갑기는 했지만, 하고 말이다. 에피의 가슴이 조여왔다. 그녀는 입안의 찢어진 피부를 혀로 어루만지며 제발 언니가 그만 하기를 바랬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엄마에게 뉴욕 트리뷴지의 편집장인 아이네즈의 아버지를 들먹이며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그가 엄마의 초대 손님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얼굴로 그의 이름이 낯설진 않지만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루엘라는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아이네즈가 여자들의 참정권 데모 행진 때 흰 말을 타고 행진했던 사진을 본 것을 말하며 자신이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름다운 것을 경외한다고 말하며 그에게 그렇지 않느냐고 말했다. 아버지와 루엘라는 테니스 볼처럼 말을 주고 받았다. 아버지가 누군가의 행동은 결과가 있게 마련이라고 했고, 루엘라는 그것이 정확히 자신이 생각하는 바라고 맞받았다.


루엘라는 그녀에게 자신을 소개시켜 줘서 고맙다며 자신은 미스 멀홀랜드을 위해 싸울 수 있다고 말했고,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루엘라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울 거라고, 자신을 절대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자신은 하고 싶은 걸 할 거라고 말하며 아버지는 대부분 그러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테이블을 내리치며 그렇다고, 자신은 자라면서 그런 권리를 얻었다고 말했다.


루엘라가 자신은 이제 몇 달 있으면 곧 16살이 된다며 원하면 결혼할 수 있는 나이라고 하자 엄마는 숨을 들이 삼켰고 아버지는 턱을 내밀며 자신의 허락 없이는 그렇게 못한다고 말했다. 루엘라는 아버지의 허락같은 건 필요없다며 법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자신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개 이런 상황이 되면 엄마는 루엘라의 편을 들었지만, 이번엔 그러기에는 너무 나간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에 분노가 일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루엘라가 아마도, 라고 대답했다. 에피는 루엘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 이마의 튀어나온 힘줄은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루엘라에게 너같이 추한 여자애들이 보내지는 시설들이 있고, 자신은 그걸 넘어서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루엘라는 어떻게 자신을 추하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며 잘못을 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그것은 바로, 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나가라고 소리치며 일어서서 루엘라를 잡으려는듯 팔을 올렸다. 루엘라는 잡히기 전 얼른 방으로 달아났다. 잠시 후 아버지가 다시 앉자 엄마가 도대체 루엘라가 왜 저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루엘라는 에피에게 자신이 싫은 게 뭔지 아느냐며, 아버지가 자신들을 이용한 거라고 말했다. 매일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자신들을 이용했다고. 에피가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느냐고 하자 루엘라는 어떻게 그녀를 못볼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루엘라는 아이네즈라는 여자는 변장한 악마 같다고 말하며 자신 역시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고, 사람들은 자신을 훌륭한 발레리나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자신은 그런 척 할 뿐이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가장 진짜라고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집시들과 함께 있을 때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으며, 춤을 잘 추거나 노래를 잘 하거나 개의치 않고 모두 춤추고 노래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분명한 자유라고 말했다.


토요일이 되자 에피는 제출하지 못한 숙제를 하기 위해 나가지 말자고 했고, 루엘라는 혼자라도 가겠다고 말했다. 루엘라가 나가고 에피는 숙제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계속 루엘라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음악을 듣고 운명을 들은 것으로 시작된 하루나 이틀을 위한 단순한 거짓말이 줄기가 되어 여름 수평선 너머로까지 뻗쳐나갈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 집시에 관한 것인지 더 이상 확신할 수가 없었다. 루엘라의 존재 깊은 곳에 배회하는 무엇인가, 자유를 갈망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에피는 그 생각을 하며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엄마는 켄싱턴 (Kensington)에 있는 증조모를 방문하러 나갔고 아버지는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에피는 레이스 커튼을 제치고 그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 왔는지 살펴 보았다.


창문 아래에 있는 라일락 꽃이 피어 있는 통로에 커다란 챙 모자를 쓴 여자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아버지가 서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나 아버지의 얼굴을 가격했고, 그 여자는 소리치며 뒷걸음질쳤다. 땅바닥에 쓰러진 아버지가 얼른 일어나 공격을 가한 남자에게 역시 주먹을 날리자 그 사람은 갖고 있던 장미가지를 아버지에게 던지더니 가버렸다. 잠시 후 아버지는 땅바닥에서 모자를 집어 들고 그 여자에게 인사를 하더니 그녀를 정문으로 이끌었다. 마치 대단한 쇼를 보여주었으니 이젠 차를 마실 시간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피 역시 루엘라와 함께 외출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하녀들도 모두 출근하지 않았거나 외출중이었다. 잠시 후, 그 여자가 들어오며 어깨 너머를 흘낏 쳐다 보았다. 그때, 에피의 눈에 커다란 챙 아래로 선홍빛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보였다.


에피는 그날 자신이 목격한 것을 엄마에게나 루엘라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엄마를 속인다는 것이 힘들어 발작을 일으키려고 한 순간들이 있었다. 루엘라는 계속 집시 캠프엘 갔고 에피 역시 그녀와 함께 그곳엘 갔지만 엄마도 아버지도 그들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6월의 뉴포트 방문도 성사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루엘라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동요되었다. 에피는 페이션스에게 믿음이 가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다. 페이션스는 에피를 피했고 루엘라에게 선물을 주고 되받기를 바라며 루엘라를 그녀 곁에 잡아 두었다.


713, 루엘라의 16번째 생일날, 그녀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있을 오디션에 가야 하는 것에 대해 몹시 화를 냈다. 전날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진주 목걸이를 선물 받았는데, 레스토랑 사건 이후 아버지에게 화를 내지 않은 게 처음이었다.


에피가 계단을 내려가는데, 루엘라가 툴툴거리며 윗층으로 올라가 버리자 엄마는 계단에 서있는 에피에게 내려오라고 말하며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에피는 처음엔 엄마가 아직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지만, 다음으로 든 공포는 엄마가 의심할 정도로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손가락으로 에피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말하라고 했다.


에피는 아버지의 속임수를 모르고 있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엄마가 고뇌에 빠진 몰골을 하고 있어야 아버지가 죄의식을 느낄텐데 엄마는 너무나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말하라고 했지만 에피는 날카롭게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했다.


루엘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디션을 보고 배역을 땄지만 감독에게 계속 지적을 당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루엘라를 파리로 보내기로 했다고 말했고, 루엘라는 왜 가야 하느냐며 싸웠다. 엄마가 파리에서 발레를 더 배우라고 하자 루엘라는 자신은 다른 무용수들 보다 몸무게도 더 나가고 이제 더 이상 발레를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항의했다. 엄마가 반대하자 루엘라는 창문을 열더니 차밖으로 발레 슈즈를 던져버렸다.


그날 밤, 저녁 식사 시간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그일을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역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식사 후, 루엘라는 에피나 부모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그녀의 방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에피는 이야기 쓰기에 집중했지만 여의치 않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어느 지점에서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창문가로 가보니 아버지가 택시를 타고 있었다. 에피는 그녀의 단단했던 가족이 찢어지는, 특히 아버지와 루엘라가 첫 번째로 떨어져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로 돌아가 아버지가 돌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루엘라였다. 그녀는 놀래는 에피에게 머리를 빗겨 주겠다고 했다. 둘이 얘기를 나누다가 에피가 엄마가 아버지에게 그 일을 말하고, 아버지가 벌을 주겠느냐고 묻자 루엘라는 아버지는 이미 벌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멀리 보내버리려는 게 아버지 아이디어가 아니겠느냐며 그래야 그의 비밀이 지켜질테니까 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절대로 보내지 못할 거라고, 자신은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날 밤, 에피는 옆에 누워 잠든 루엘라에게 자신의 심장에 대해서, 자신이 내내 가슴을 졸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파리로 가버릴까봐 걱정된다는 것, 자신은 절대로 남편과 미래를 갖지 못할 거라는 것, 그리고 이미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 그래서 엄마가 혼자 남겨질 것이 걱정된다는 것 등등을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았고, 졸렸다. 그리고 에피는 이런 일에 대해 다시는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또한 그날 밤 루엘라가 그녀에게 편지를 남겼고, 잠 못든 엄마가 그녀의 방으로 와 그 편지를 읽고 감추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에피는 9시까지 잠을 잤다. 전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아무도 그 시간까지 잠을 자게 두지 않았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옷을 입고 내려 갔지만 부엌엔 아무도 없었고, 아침식사는 모두 치워진 것 같았다.


엄마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에피는 놀랬다. 엄마는 입구에 서있었는데, 에피가 닐라가 왜 자신을 깨우지 않았느냐고 묻자 엄마는 하녀에게 하루 휴가를 주었다고 말했다. 에피가 이유를 묻자 엄마는 데리고 있는 하인들에게 가끔 그렇게 해주는 게 좋다고 말하며 점심을 먹으러 나가자고 말했다. 에피가 둘이만 가느냐고 물으며 루엘라는 어디 있고, 아버지는 벌써 출근했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저 모자를 갖고 오라는 말만 했다.


엄마는 에피를 데리고 맨하탄으로 가 점심을 먹었다. 보통의 경우 같았으면 에피는 엄마와 단둘이 외출한 것이 즐거웠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점심 후, 엄마는 백화점에 가 드레스도 사자고 했다. 그녀는 너무 들떠 있었고 너무 밝았다. 백화점에서 드레스는 사지 않고 두 사람을 위한 장갑을 사고 나왔다.


엄마는 계속 지갑을 열고 시간을 확인했다. 에피는 마침내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자 마음이 놓였다. 잠시 후 집에 도착했는데, 아버지가 화난 표정으로 에피에게 윗층으로 올라가 있으라고 말했다. 에피는 두려운 마음으로 루엘라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빈 침대는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녀의 화장품들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도대체 루엘라는 어디로 간 걸까?


잠시 후 아버지가 에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내려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할머니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에피가 루엘라는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자 그녀의 부모님은 서로를 쳐다 보았고 할머니가 깐깐한 목소리로 여름 캠프에 보냈다고 말했다. 여름 캠프라니. 에피는 그들을 향해 웃거나 소리치고 싶었다. 도대체 자신을 얼마나 바보로 알고 있느냐고 말이다.


에피는 그들이 집시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루엘라가 어디 있는지 다시 물으며 벌써 파리로 보내버렸느냐고 묻자 할머니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한 발자국 에피에게 다가와 그녀가 심장 발작이 일어날 때 걱정하던 그 표정으로 루엘라는 잠시 어딘가 갔지만 잘 지낼 것이고, 곧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파리만큼 먼 곳에 있지 않다고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에피가 왜 자신은 그녀가 있는 곳을 몰라야 하느냐고 말하자 그는 자신들을 믿으라고 말했다. 그녀의 방으로 올라간 에피는 제발 아버지가 루엘라를 어디다 가둬놓은 것이 아니고 집시들과 함께 도망친 것이기를 바랬다.


그날 밤, 에피는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만히 누워 있다가 시계가 밤 11시를 알리는 소리에 조용히 집을 빠져 어둠을 헤치고 집시 캠프로 갔다. 하지만 다른 때와는 달리 사람들이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루엘라는 그곳에도 없었다. 마르셀라가 루엘라는 그곳에 없다고 말하며 트레이를 보고 있는 그녀의 시야를 차단했다. 마르셀라는 에피 역시 그곳에 오면 안된다고 말했다.


에피가 마르셀라 주변을 둘러 보며 트레이와 눈을 마주치려고 애를 쓰며 루엘라가 사라졌다고 하자 마르셀라가 자신들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며 이미 너희 아버지가 와 자신들을 협박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트레이와 얘기하고 싶어하는 에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신들은 그녀를 도와줄 수 없다며 가라고 말했다.


이후부터 아버지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고 집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에피가 집시 캠프를 다시 갔다가 돌아온 날 에피가 잠든 침대 맡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루엘라의 소식을 묻는 에피에게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반드시 결과가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얼마 후, 에피가 엄마한테 루엘라의 행방을 묻자, 엄마는 갑자기 그녀를 시카고로 보냈다고 말했다. 루엘라가 파리로 갔다고 생각했던 에피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지만 엄마는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엄마는 루엘라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에게는 여름 캠프에 보냈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은밀히 에피에게 너는 왜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에피는 엄마가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해서 자신은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엘라가 보고싶은 에피는 아버지의 협박, <자비의 집>으로 보내버린다는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산책을 할 수 있게 된 날, 집 윗쪽에 있는 <자비의 하우스>로 가 담 넘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친구들이 그곳에 들어가면 교화되지 않으면 3년 동안 못나온다느니, 평생 못나온 사람도 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루엘라의 행방이 궁금했던 에피는 어느 날엄마의 방으로 가 지갑에서 돈뭉치를 훔쳤다. 그리고 어두워지자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고 등불을 들고 예전에 어두운 숲 속을 헤맬 때 마주쳤던 남자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그 남자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에피는 그 사람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며 댓가는 치루겠다고 말했다. 그 남자가 얼마를 줄 수 있느냐고 묻자 에피는 자신이 갖고 있는 돈뭉치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 일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고, 그 남자도 주춤거렸지만 어쨌든 둘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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