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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의 작은 서재

The Monuments Men by Robert M. Edsel (with Bret Witter) (A Story based on a true event, 2009) , ) Margaret Kim (margaret7630) 2014-2-14  23:21:57

The Monuments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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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M. Edsel (with Bret Witter)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저자의 노트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기념비적인 보물들을 제 3 제국 (Third Reich: 히틀러 치하의 독일)으로 몰래 빼돌리려는 걸 막기 위해, 총이나 어떤 무기도 들지 않고 전선에 나선 사람들에 관한 것으로, 그들을 'Monuments Men' 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1943부터 1951년까지 MFAA (Monuments, Fine Arts, and Archives) section에서 근무하기 위해 자원한 서방연합군 출신의 남녀로서, 초기 자원자들은 대부분 박물관장, 큐레이터, 예술 전공 학자나 교사, 예술가, 조각가, 기록 보관 담당자 들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간단했다. 전쟁 동안 유럽의 문화를 가능하면 많이 구하는 것. 다시 말하면, 그들의 초기 임무는 교회나, 박물관, 그리고 다른 중요 기념물들에 가해지는 전투 피해를 최소화하는 거였다. 전쟁이 진행되고 독일 국경이 붕괴되자, 그들의 임무는 도둑맞거나 행방을 알 수 없는, 이동가능한 예술품이나 다른 문화품들의 소재 파악에 집중되었다.


유럽을 장악했을 때, 히틀러와 나치군들은 역사상 가장 큰 절도를 했는데, 5백만 점이 넘는 문화품들을 강탈해 독일로 옮겼다. 따라서 'Monuments Men'이 선봉에 나선 연합군의 보물찾기는 오로지 전쟁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할 수 없고 기이한 이야기와 함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보물찾기가 되었다. 그것은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했는데, 너무나 믿어지지 않는 장소에 숨겨놓은 작품들 중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와 램브란트 (Rembrandt)의 그림들, 그리고 미켈란젤로 (Michelangelo)와 도나텔로 (Donatello)의 조각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보관하고 있던 몇몇의 나치 광신도들은 만약 자신들이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어느 나라도 가질 수 없다는 걸 확실히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 중, 19446월부터 19455월까지의 사건에 집중하여, 유럽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8명의 대원들과 여성을 포함한 두명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진행함에 있어서 저자는 그들의 전선 일지, 일기, 전쟁 보고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들이 교전 동안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참고하였다고 밝힌다.


또한 저자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해,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 동안 많은 영화나 책들을 통해 우리에게 많이 소개가 되었고, 또 그것을 통해 많은 영웅들이 탄생했지만,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수 많은 문화유산들에 가해진 거대한 위협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되찾고 보호하기 위해 최전선에 나섰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직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어서 쓰게 됐다고 말하며, 이것은 개인의 이야기, 더 나아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글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1. 영국의 옥스포드셔 (Oxfordshire) 출신으로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한 로날드 에드먼드 벨푸어 소령 (Major Ronald Edmund Balfour, First Canadian Army),

  2. 당시 18세로, 독일의 칼스루헤 (Karlsruhe)에서 태어난 독일계 유태인으로, 1938년 독일의 압제를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 뉴저지 (New Jersey)의 뉴왁 (Newark)으로 이민갔으며, 194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징집된 해리 에틀링거 이등병 (Private Harry Ettlinger, U.S. Seventh Army),

  3. 미주리 (Missouri)의 세인트 루이스 (St. Louis) 출신이며, 전쟁 전 명망높은 로마상 (Prix de Rome: 프랑스가 매해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 등,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상-마가렛 주)을 수상한 유명한 조각가로, 1942년 육군 항공 수훈장 (Army Air Medal)을 다자인한 워커 행콕 대위 (Captain Walker Hancock, U.S. First Army),

  4. 오클라호마 (Oklahoma)의 페리 (Perry) 출신으로, 동안의 미남 총각이었고, 건축가 이면서 미네소타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였던 월터 “허치” 후흐트하우젠 대위 (Captain Walter “Hutch” Huchthausen, U.S. Ninth Army),

  5. 프랑스 국립 박물관 관장으로서, 1940년부터 44년까지 나치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예술품의 안전을 책임졌던 자끄 조자르 관장 (Jacques Jaujard, director of French National Museum),

  6. 문화기획자이며 예술 후원자였고, 전설의 뉴욕 시티 발레의 창설자로, 그의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인물 중 한 사람인 링컨 크리스타인 일등병 (Private First Class Lincoln Kirstein, U.S. Third Army),

  7. 알라바마 (Alabama)의 모리스 (Morris) 출신으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ROTC 장학금으로 오번 대학 (Auburn Univ.)에서 건축학위를 받았으며, 자신이 속한 제 3군에 대한 자부심과 전설적인 지휘관 조지 패이튼 장군 (General George S. Patten Jr.)을 몹시 존경했던 로버트 포시 대위 (Captain Robert Posey, U.S. Third Army),

  8. 박물관 계의 귀재로, 젊은 나이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었고, 중세 예술 전문가로, Mets의 중세 예술 별관인 클로이스터스 (Cloisters)를 개설하는데 록펠러(John D. Rockefeller Jr.)의 도움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제임스 로리머 소위 (Second Lieutenant James J. Rorimer, Comm Zone and U.S. Seventh Army),

  9. 당시에는 모호한 분야였던 예술품 보존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서, 미국에서 유럽의 문화 유산에 대한 나치의 위협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박물관 커뮤니티와 군대로 하여금 전문적인 예술품 보존부대를 만들도록 밀어부친 사람들 중의 하나인 조지 스타우트 중위 (Lieutenant George Stout, First Army and U.S. Twelfth Army Group),

  10. 나치가 유럽을 점령했을 당시 루브르 근처의 주 드 폼 (Jeu de Paum) 박물관에서 오랫동안 무료 자원봉사를 했던 로즈 발랑 (Rose Valland). 그녀는 주 드 폼에서 나치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 그들 모르게 4년 동안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스파이 활동을 하였다. 파리가 다시 자유를 찾은 후, 그녀가 열심히 전해준 중요한 비밀 정보는 프랑스에서 빠져나간 예술품들을 찾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젊은 시절 히틀러는 화가와 건축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원한 오스트리아 (Austria)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서 그를 거절함으로써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총통이 되어 1938년 그는 이태리와 오스트리아를 방문하게 되는데,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를 만나러 로마에 간 그는 거대한 원주로 지탱되고 있는 유적지들을 보면서, 어마어마하고, 아주 기념비적인 제국을 생각나게 하는 그 도시 앞에서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그런 로마에 비하면 베를린은 그저 지방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가 바로 그의 독일 제국이 지향하는 진정한 수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그는 건축가인 알버트 스피어 (Albert Speer) 에게 베를린을 오늘만이 아닌 미래를 생각하며 재건축하라고 지시한다.


또한 그는 오스트리아의 린츠 (Linz)에 있는 부모의 묘를 방문하면서, 린츠를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그곳에 자신이 1920년대부터 모은 예술품들을 보관할 총통박물관 (Fuhrermuseum) 을 세우기로 마음 먹는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유태인과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퇴폐적인” 것이라고 없애버릴 수 있는 형식과 목적을 제공하고, 그의 정부에서 지원하는 첫번째 공공 프로젝트가 될 것이며, 그곳에서 독일 국민들을 교화시킬 예술품 전시를 매해 열 것이고, 나치 엘리트 사이에서 그의 예술품 컬렉팅을 옹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십년 넘게 진행해오고 있는 세계 최상급의 개인 예술품 컬렉션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줄 것이었다. 역사상 가장 특별한 예술 박물관이 될 총통박물관의 건축 계획은 전 세계 부자들에게서 작품들을 (강탈하듯) 모으고, 작품들을 쫓는 행위에 대해 결정적 이유를 제공하였다.


부자들에게서 작품들을 뺏어오는 것, 그것의 토대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1938, 히틀러는 법을 고쳐, 독일계 유태인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하고, 그들의 예술품, 가구, 심지어 그들의 은 식기류와 가족 사진까지 몰수했다.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 장군 지휘 하의 나치 SS 부대는 그 법을 이용해 비엔나의 유태인 가장들을 체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압류하여 제국에 귀속시켰다. SS는 예술품들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었다. 수년 전, 독일 예술 학자들이 유럽의 나라들을 방문하여, 비밀리에 물품 목록을 만들어, 히틀러가 각 나라를 정복했을 때 그의 요원들이 모든 중요한 예술 문화 귀중품의 이름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장소를 알 수 있도록 준비했다.


한편, 194112월에 있었던 일본의 펄 하버 (Pearl Harbor) 공격으로 인해 갑자기 전쟁으로 내던져진 미국은 계속되는 히틀러의 다른 나라에 대한 공격으로 더욱 더 긴장상태에 놓여지게 되고, 다른 사람들처럼 박물관 커뮤니티 역시 부산해졌다. 그들은 대피부터 냉난방이 된 지하 방을 만드는 것까지 보호 계획에 중점을 두었다.

 

펄 하버 공격 이후 보스턴의 Museum of Fine Arts의 일본 갤러리는 성난 군중들의 공격을 대비해 문을 닫았다. 뉴욕의 경우, MOMA는 정전이 되었을 때 방문객들이 전시품으로 달려들거나 그림들을 훔쳐갈 것에 대비해 해질 무렵 문을 닫았다. 매일 밤 MOMA는 그림들을 모래주머니를 쌓아 방어벽을 만들어놓은 곳으로 옮겼으며, 아침이면 그것들을 다시 걸었다. 프릭 컬렉션 [Frick Collection: 뉴욕 맨하탄에 있는 미술관으로, 펜실베니아 출신 헨리 프릭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그의 저택이 그대로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미술대사전 (용어편)참조]은 창문과 천창을 가려 적군에게 맨하탄 중심에 있는 그 미술관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문화 지도자 50여명이 MOMA의 관장 헨리 테일러 (Henry Taylor)와 국립 아트 갤러리 관장인 데이비드 핀리 (David Finley) 주선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때 모인 사람들 중 하바드의 포그 아트 박물관 (Fogg Art Museum) 부관장인 폴 삭스 [Paul Sachs: 골드만 삭스 (Goldman Sachs)의 초기 파트너 중의 한 사람의 아들이며, 창업자인 마커스 (Marcus) 골드만의 외손자]가 있었다. 그는 하바드에 “Museum Work and Museum Problems” 라는 과정을 개설해, 처음으로 박물관 관장과 큐레이터를 양성하는 교육을 실시했다. 박물관 커뮤니티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단신인 그가 그림들을 낮게 걸자, 그의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표본으로 받아들였고, 다른 박물관들도 그것을 따랐을 정도였다.


포그의 보존과 기술 연구부에서 일하는 조지 스타우트가 유럽 박물관 커뮤니티의 상황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설득하자, 삭스는 그때 모인 사람들에게 곤궁에 처한 유럽의 상황, 즉 런던의 국립 갤러리는 버려진듯 사람이 하나도 없고, 그곳의 위대한 작품들은 매노드(Manod)에 만들어놓은 창고에 들어가 있으며, 태이트 (Tate) 갤러리는 부서진 유리로 가득차 있고, 켄터베리 성당 (Canterbury Cathedral)의 신도석은 폭파의 충격을 흡수한 먼지들로 가득차 있었으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Amsterdam)의 국립박물관인 레이크스 박물관 (Rijksmuseum)에는 네덜란드 출신 거장들의 그림들이 접힌 의자들처럼 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특히 그곳에 전시된 그림 중 가장 유명한 램브란트의 The Night Watch 는 카펫처럼 동그랗게 말려 관같은 박스에 봉해졌으며,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는 아무 것도 없고 빈 액자들만 남아 있었고, 미켈란젤로의 David는 플로렌스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 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지나친 관료에 의해 벽돌로 매장됐으며, 러시아에서는 에르미타주 (Hermitage)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이 독일군들이 레닌그라드 (Leningrad) 밖으로 나가는 철도를 끊기 전 2백만점 이상의 예술품들을 시베리아 (Siberia)로 옮겨놓았는데, 그 큐레이터들은 남아있는 작품들과 함께 지하실에서 지내며 배고픔을 잊기 위해 동물로 만든 풀과 촛농으로 연명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는 등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관심을 촉구했다.


삭스의 슬라이드를 본 후 사람들은 공중 폭격 시를 대비해 박물관을 오픈해야만 하는가? 가장 귀중한 작품들을 덜 귀중한 작품들로 대체해야 하는가? 도피 시키기 너무 많은 관중들이 모일 수 있다고 해도, 특별 행사나 전시회를 개최해야 하는가? 해안가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을 위험이 조금 덜한 내륙의 박물관으로 옮겨야 하는가? 소이탄이 터질 경우는? 정전시? 유리가 깨지면? 등에 대해 논의 했다. 삭스가 내린 이 모든 것에 대한 마지막 결론은 적절한 조치가 요구되는 사태라는 것이었다.


삭스가 몇가지 대책들을 내놓았지만, 박물관들은 자체적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MOMA는 조금 덜 중요한 갤러리들은 문을 닫았고, 큐레이터들을 소방관들로 대체했다. 새해 전날 밤 국립 갤러리는 75점의 귀한 작품들을 비밀리에 위싱턴 디시로 옮겼다.


하지만 모두 도피에만 집중한 건 아니었다. 스타우트는 박물관 관장들에게 박물관의 안전에 대해서, 곰팡이와 균들, 철망의 장점, 열에 의한 손상에 대해서 가르쳤다. 또한 그는 왜 폭탄이 유리창을 부수는지, 날아가는 유리로인해 구멍나는 걸 막기 위해 그림들을 어떻게 상자에 담아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작성한 팜플렛에서, 적군들에 의해 파괴되는 교회 건물이나 성전, 동상, 그림 등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UN에 가입한 나라의 정부들이 책임을 져야 하며, 그것들은 단지 아름다운 물건들이 아니라 신앙을 표현하는 것으로, 인간이 스스로를 자신의 과거와 신께 연관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일을 위해 가장 적격인 사람은 예술품 보존과 군대 훈련을 받은 “특수 일꾼들”이며, 그들이 다가오는 전쟁에서 영구적 가치를 지닌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스타우트는 전시 보존 운동이 박물관 관장들, 그가 예술 세계의 “나리들 (sahibs)”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박물관 행정에 대한 관점이 개인적이고 유치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시 보존을 위해 특별히 훈련된 군인이 필요하다는 그의 의견에 처음 박물관장들은 코웃음을쳤다. 대신 그들은 군대에 조언할 수 있는 고급 문화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를 썼다. 물론 박물관장 그들로 구성된 위원회 말이다. 그런 반응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국립 갤러리 관장 역시 스타우트의 문화품 보존을 위한 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의 의견은 성사되지 못했고, 자신이 별 쓸모가 없다는 생각으로 좌절한 그는 그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일, 1차 세계 대전 이후 예비군으로 있었던 해군에 현역으로 지원하였다.


그가 군대에서 비행기 위장 페인트 테스트 일을 하고 있을 때, 그와 의견을 같이 했던 친구 콘스타블 (Constable)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 군정 사단 책임자인 제임스 슈메이커 (James Shoemaker) 대령이 예기치않게 스타우트의 작업에 관심을 표하며, 기념물과 그것의 보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행될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히틀러와 나치는 파리에 있는 유태인 소유 예술품을 독일로 옮기는 작업을 계속 진행 중이었다.


한편, 영국군은 독일-이태리 군과 싸워 이겨 1943년 리비아 (Lybia)의 수도 트리폴리 (Tripoli)에서 동쪽으로 64 마일 떨어진 로마 유적지 렙티스 매그나 (Leptis Magna) 를 차지하게 되었다. 렙티스 메그나는 로마의 루키우스 세베루스 (Lucius Severus) 황제가 세운 도시로, 배경에서 반짝이는 푸른 지중해와 함께, 바실리카의 웅장한 대문, 옛 시장을 가리키는 수백개의 기둥, 거대한 비스듬히 기운 극장 등이 남아 있는 유적지이다. AD 3세기경, 권력의 최상에 있을 때, 세베루스 황제는 자신의 고향인 그곳을 아프리카의 문화 경제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돈을 쏟아부었다. 렙티스 매그나는 항구였지만, 지난 1700년 동안 퇴사가 쌓여 경토층으로 변했고, 둔하고 텅빈 세상이 되었다. 그곳은 무너져 내려, 지난 2000년 동안 그 위로 침범한 사하라 사막으로 강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에 북 아프리카의 키레네 (Cyrene)에서도 군인들 중 어느 누구도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고려하는 사람이 없어서 유적을 망쳤다는 불평을 들은 영국군은 렙티스 매그나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고고학자이며 런던 박물관 관장이고, 영국령 북 아프리카 육군 왕립 포병대 소속 중령 로버트 윌러 (Lieutenant Colonel Sir Robert Eric Mortimer Wheeler) 경이 그곳의 민사를 담당하는 장교에게 군인들인 자신들이 그것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요구했고, 그 장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윌러는 렙티스 매그나 근처 부대에서 포병 대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런던 박물관 동료 고고학자 워드-퍼킨스 중령 (Lieut. Col. John Bryan Ward-Perkins) 과 함께 피해 상황에 대한 사진을 찍고, 망쳐진 도시의 복구 노력 등을 써서 런던으로 보냈고, 그것은 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수년 동안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자였던 울리 경(Sir Charles Leonard Woolley)에게로 보내졌다.


울리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토마스 로렌스 경 (Sir Thomas Edward Lawrence) 과 가까운 친구로, 둘은 세계 고대 유물에 정말로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모여 리비아에 있는 세 곳의 고대 유적지에 대한 보존 계획을 세웠다. 윌러와 워드-퍼킨스는 고대 유적지와 그리스와 로마령 북 아프리카 박물관에 대해서, 보존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존경심을 보이고 잘 훈련받은 군대가 접근을 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 문화적인 해를 덜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은 이렇게 자신들도 모르게 미국에서 조지 스타우트가 주장했던 목표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데, 1943년 연합군이 이태리의 본토에 들어가고 난 일주일 후, 폴 삭스는 스타우트에게 대통령이 유럽의 기념물들의 보호와 구조를 위한 미국 위원회를 지정했으며, 그것은 스타우트의 노력이라는 소식을 알려왔다. 하지만 그 편지를 받은 스타우트는 자신이 원한 최전선 특수부대가 아닌 또 다른 관료체계를 만든 삭스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와 다른 박물관장들은 2년 동안 스타우트의 것이 아닌 자신들의 비젼을 밀어부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이태리 본토 몬테 카지노 (Monte Cassino)에 있는 2000년 된 유명 수도원을 독일군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공격하는 것에 대해, 서방 연합 사령관들은 수도원을 파괴하는 걸 반대했다. 이태리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장군 역시 떠나기 몇주전 몬테 카지노와 같은 예술적이고 역사적인 지역은 폭탄 공격을 해서는 안된다는 행정 명령을 내렸었다. 하지만 그의 명령에는 예외의 문구가 들어 있었다. '만약 우리가 유명한 빌딩을 파괴하는 것과 우리 군인들의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 것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우리 군인들의 목숨을 훨씬 더 고려해야 하며 그 건물들은 사라져야 한다' 라는. 결국 그 수도원은 파괴되었고, 첫번째 Monument Man이라고 할 수 있는 어니스트 드왈드 (Ernest DeWald) 소령이 몬테 카지노의 잔재를 살펴보기 위해 갔을 때에는 이미 땅위의 것들은 모두 파괴되고 없었으며, 17세기에 지어졌던 교회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또한 수도원의 웅장한 도서관과 유명 그림들이 땅밑에 깔려 있는지, 혹은 독일군들이 폭탄 공격 전에 독일로 빼돌렸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1943년 말, 드디어 스타우트가 원했던, 육군의 장교 권한을 가진 훈련된 기술자들 부대, MFAA의 분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것은 점령된 영토를 통치하는 연합군 정부의 민사 분과 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으로, 미국과 영국이 공식적으로 합동 운영하는 것이었고, 주로 영국 육군성 (War Office)M-5 부에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몬테 카지노에서의 실패가 이태리에 있던 Monuments officers들을 행동에 옮기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 중에 조직을 새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증명하였다.


그들은 북유럽에서는 다르기를 바랬다. 민사 담당부는 프랑스에 진입하기 전 훈련된 장교단을 그곳에 배치하려고 했다. 로버츠 위원회 (Roberts Commission)에서 폴 삭스를 그 장교단에서 봉사하는 미국인들을 뽑는 책임자로 임명했고, 조지 스타우트가 맨 처음 가입 제안을 받은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반짝' 한 것이라는 그의 말대로, 몇달 동안 진행되지 않았고, 어느 날 그는 그 작전이 없어졌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는 군대가 그것을 전부 나리들의 손에 맡긴 게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그후 그는 그 작전이 성사되어 부름을 받았을 때도 믿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과소평가했던 그 나리들이 보존 부대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선도 세력으로서의 촉매제였다. 만약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구성된 로버츠 위원회가 없었다면, 미 육군이 MFAA를 용인했을지, 그리고 미국의 문화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아닌 조지 스타우트의 '특수 일꾼' 부대를 더 잘 구성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육군은 그들이 육군 장교들인한 보존 장교들의 말을 들을 것이고, 그들은 전투 중 혹은 몇주나 몇달 후가 아닌, 전투가 끝난 즉시 최전선에 도착해 실행가능한 계획의 근거를 마련할 것이다. 최소한 스타우트에게 이 MFAA가 될성부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MFAA의 장교단에 박물관장이 단 한 사람도 배정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처음,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스타우트가 걱정한 것은 사람들의 성격이나 임무의 범위가 아니었다. 그가 걱정했던 건 즉흥적인 작전, 말하자면, 그들의 임무에 대한 공식적인 성명도, 지휘 계통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일에 몇 사람이 필요한지, 유럽 대륙에 어떻게 분배되는지, 심지어 언제 더 많은 군인들이 오는지, 오기는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이 무작위로 그들의 전역 서류만을 들고 일하러 왔으며, 보존 절차에 대한 안내서는 스타우트가 가진 전문지식과 그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 다였다. Monuments Men들은 공식적인 훈련도 없었다. 대부분 유럽 여러 나라에 있는 보호해야할 기념물 목록을 적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었다. 스타우트가 보니, 그중 어느 누구도 무기나, 지프, 유니폼, 혹은 군대 음식 같은 것을 조달하는, 이 작전의 군대적인 측면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작전의 규모도 문제였다. 스타우트는 삭스에게 한명의 장교당 16명의 부대원이 필요하다고 권고했지만, 북유럽을 위한 MFAA 작전을 통털어서 16명이 안된다는 것은 분명했고, 스타우트 역시 군 관료체계에서 군인들을 전역시키는 일에 대해 협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젊은 박물관 사람들을 교육시킨 삭스가 그 일에 적합한 사람들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스타우트 역시 기념물 현장 작업에 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전역 서류를 들고 장교들이 하나씩 둘씩 얼굴을 드러냈는데, 그중에는 행콕, 로리머, 포시 등이 있었다.


그들이 훌륭한 그룹이라는 걸 스타우트도 인정했다. 만약 기회가 주어졌었더라면, 그 자신이 뽑았을 사람들이었다. 11명밖엔 안됐지만, 11명의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보존에 대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학자나 예술가, 박물관 큐레이터, 조각가들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하라고 명령하는 사람들이 아닌, 생업수단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좋았다. 그들은 거의 모두 아내와 자식이 있었고, 무엇에 성패가 달려있는지 충분히 알만한 나이임과 동시에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만큼 젊었다.


살아남는다는 것. 스타우트는 그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 사람들과 전쟁에 나설 예정이며, 그것은 그중 몇 사람은 살아남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적절한 장비와 스태프 없이 그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건 범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걸 기대하긴 어려웠다. 박물관 큐레이터들은 군대를 잘 몰랐고, 군대는 이 작전이 성공할 것인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Monuments Men들은 조언자들일 뿐, 어떤 계급의 누구에게라도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는 있지만, 자동차도, 사무실도, 보조 스테프도, 대안도 없었다. 군대에서 보트를 한척 주었지만, 모터가 없는, 그들이 손수 노를 저어야하는 보트였다.


하지만, 스타우트는 그저 우리가 그곳에 갈 수 있게만, 그저 기회만을 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터로 나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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