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닥터 하타 ' (Doc Hata)라고 부르는 주인공 '나' [Franklin Hata, 원래의 일본 이름은 지로 (Jiro)]는 일본인이며 전쟁 배테랑으로, 에빙턴 (Ebbington) 에서 살다가 베들리 런 (Bedley Run)으로 이사와 30여년을 살고 있다. 그의 이름 '하타'는 어린시절 일본에서 자신을 키워준 구로하타 (Kurohata) 가족을 줄인 것이다 (그는 어렸을 적 뛰어난 아이였지만, 가난한 그의 부모는 그를 뒷바라지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구로하타 가족에게 보내졌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모두 '닥터 하타'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는 진짜 의사가 아니다.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의료용품을 파는 가게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단골손님들이 그의 가게를 편안하게 들를 수 있는 병원으로, 요즘 의사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를 가진, 경험많고 박식할 뿐만 아니라 터놓고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여겼다.

그는 기꺼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친절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뭐든 괜찮다고 하고, 뭐든 타협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그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왜 그가 그렇게 사는지, 어떻게 특정 행위를 하게 됐는지, 그가 자신의 과거를 아주 기쁘거나 혹은 후회스럽게 여기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떤 이의 승리나 실패를 참이라고 여기기는 매우 어려운 것 같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가장 불안정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는 너무 심각하거나 또는 느닷없이 반짝거리며, 결코 사람들이 믿고자하는 진실을 비추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3년전 그는 자신의 가게, Sunny Medical Supply, 를 뉴욕 출신의 젊은 커플인 히키 (Hickey) 부부에게 팔았다. 가게뿐만 아니라, 모든 재고 물품과 창고, 그리고 윗층에 있는 방 하나짜리 아파트 두채도 함께. 그의 가게를 인수한 히키 부부는 응급실의 엠블런스를 함께 운전했던 사람들로, 처음 가게를 산다고 했을 때 그는 그들이 사업엔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또한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장사를 한다는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일 것이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가게를 팔아야하는 시점이라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게 구입 후 그들은 별로 변화를 주지 않고 그가 했던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몇주 전에는 산책하다가 오래 전에 시가 요구한대로 주문해서 달았던 간판의 금박 글씨들이 여기 저기 떨어져 나가고 무뎌져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걸 발견했다. 사실 창문들을 정기적으로 바꾸고, 색깔별 세일 공지문과 상품을 진열하는 바로 옆 문구점들이나 꽃집들과는 다르게, 그의 가게는 앞 진열장 전체가 비바람에 상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역시 의료용품, 즉 환자용 변기와 인슐린 킷을 가지고 가게 앞을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지만, 조금만 노력하고 창조성을 발휘하면 기꺼이 다가가서 바라보고 싶게하는 진열장을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자신이 가게를 하는 동안, 물론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그것들을 구경한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멋있다는 칭찬을 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게 진열장에는 자신이 마지막 이스터 (Easter) 때 해놓은 것을 그대로 진열해놓고 있었다. 그건 슬픈 장면이었다. 모든 것이 시간과 빛으로 인해 퇴색되어 있었으므로.

가게를 팔고 난 후 걱정이 되어 처음엔 일주일에 두세번은 그곳에 들러 그들이 잘하고 있는지,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았다. 방문할 때마다 그는 카운티 병원과 지역 노인 전용 아파트에 전화해 연체 계좌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던지, 공급회사와 협상을 한다던지, 심지어 가게 책들까지 점검하거나, 유출입을 조정하는 것 등, 뭐든 도움이 필요한 일들을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히키 씨가 자신들 스스로 가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것 때문에 그들이 그에게 돈을 지불한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는 그의 말투에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은 그저 그들이 원해서였다고 생각했는데, 히키 씨는 자신들이 오리엔테이션을 충분히 받았다는 걸 그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 있던 히키 부인은 몹시 당황해하며 창고에 물건을 보러간다고 자리를 피했고, 히키 씨가 그에게 나가라는듯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때 그는 그들이 필요해 자신에게 직접 연락하기 전에는 다시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형편없는 진열장 상태와 다른 상인들이 히키 부부의 아이 패트릭 (Patrick)이 아프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 그들에게 자신이 먼저 연락해서 그저 그들이 어떤지 보기로 하고 가게를 방문했는데, 그곳은 도둑이 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선반 위의 물품들은 듬성듬성했고, 책상과 카운터는 종이와 먹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으며, 특히 무인 금전 등록기처럼 보이는 것이 열려 있었다. 몇번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정말 도둑이 들었나 걱정하며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부부가 서로 조용히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아이의 메디케이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중인 것 같았는데, 그는 갑자기 자신이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내려가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는데 가게의 전화벨이 울리고, 그는 황급히 내려왔다. 뒤이어 히키 씨와 히키 부인이 몇분 간격으로 내려왔다. 막 나가려고 카운터에서 급히 몸을 돌리는 그를 히키 씨가 먼저 발견하고, 그에게 가지말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하타가 히키 부인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있는데, 통화를 끝낸 히키 씨가 아내에게 아이 상태가 별로 좋지 못하다고 얘기하고, 하타에게는 가게를 곧 포클로져 해야할 것 같다고 말하며 화를 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히키 부인이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니 입좀 다물라고 말했지만, 히키 씨는 계속해서 하타에게 의사가 아닌데도 의사라고 불리우는 걸 즐긴다는 둥 하면서 화풀이를 했고, 그런 그를 부인이 말리자 그는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실, 그날이 바로 은행에서 6개월이나 연체된 그들의 모기지를 리파이낸스하겠다고 통보한 날이었다.

히키 부인이 그에게 사과하고, 그는 자신의 상처받은 감정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히키 부인이 그의 친절함에 감사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것은 친절함이 아닌 이해 (understanding)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심각한 상황에서 그런 행동은 때로 뜻밖이거나 심지어 쇼킹하기까지 하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그리고 계속 다시 생각해봐야 별 효과도 없는, 계속 곱씹기 보다는 잊는 게 더 나은 변칙적인 조짐에 의한 순간적인 실수를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히키 부인과 그녀의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 대해서, 2년 반이 지나 그들은 거의 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 손님이 와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고 도로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그녀가 다시 불렀다. 그리고 창고 정리를 하다가 발견했다며 사진들이 들어있는 먼지 낀 상자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 물품을 가게에 두었었는지 좀체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히키 부인은 사진 중에 하타가 젊은 여자와 함게 찍은 게 꽤 있다고 하며 궁금해했다. 그가 그녀 이름이 써니 (Sunny)이며, 수년 전에 왔고 학교 땜에 그곳에 잠시 머물렀었는데, 지금은 돌아갔고, 자신도 못본 지 몇년 됐다고 얘기하자, 히키 부인이 가게 이름을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그날 저녁 그는 한때 써니가 살았던 방으로 갔다. 그녀는 아주 급히 그곳을 떠났었고, 그녀가 떠난 후 혼자서 그녀의 방을 치우고 천장과 벽을 고치며 여기 저기 나있던 모든 구멍들을 모두 막았다. 그것은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다.

사실, 써니는 하타가 입양한 딸로, 당시 그녀는 7살이었다. 처음 입양기관에서 혼자 사는 남자가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거절할 낌새를 보이자 그는 담당자를 직접 만나 자신이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주고, 필요 경비 이상의 돈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후 그녀에게서 남자아이가 있다는 연락이 왔지만, 그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꼭 딸이어야만 했다 . 얼마 후 입양기관에서 일본 아이는 입양 가능한 아이가 없고, 한국 부산의 한 고아원으로부터 여자아이를 입양할 수 있다고 연락이 왔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를 지배한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일본 아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었다. 그는 오직 그 아이가 도착할 것만을 생각했고, 그것이 자신의 시대가 다시 재개됨을 알려주는 윤활유 역할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아이에 대해 꾼 총천연색 꿈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옳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여자아이만을 고집했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써니는 항상 이 집을 싫어했다. 지금은 마켓에 내좋지 않았는데도 리얼터를 통해 팔지 않겠냐는 오퍼가 들어올 정도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집이 되었지만, 당시에 이 집은 여기 저기 수리를 해야하는 오래되고, 매우 낡은 상태였다. 그는 써니가 처음 집 현관에 들어서면서 킥킥거리다 울기 시작했던 게 생각났다. 그는 울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그녀가 그가 닿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녀가 우는 동안 잠시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그녀는 고아원에서 영어를 조금 배웠으므로, 그는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고, 최선을 다해 이 집을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겠다고 했으며, 미국에서 행복해야 하고, 지금은 아버지가 생겼으니 조금 후엔 엄마도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고, 그때서야 처음으로 그도 무기력한 그녀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저 몸을 숙여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녀를 안고 있었다.

써니는 피아노를 참 잘쳤는데, 나이에 비해 훨씬 우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다른 타고난 아이들보다 앞섰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곡을 깊이 이해하여, 아주 매력적이고 성숙한 감정을 갖고 연주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에 가장 훌륭한 젊은 연주자들이 다음 등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가져야 할 기교를 습득하지 못했다. 경연대회에서, 써니는 대체로 훌륭하게 연주를 하였지만, 그녀의 연주에는 항상 몇가지 어렵고 이상하게 서투르기까지 한 순간들이 있었다. 완벽하게, 혹은 완벽에 가깝게 연주하는 게 불가능해지자, 그녀는 커가면서 그것을 시도하는 것에 점점 더 흥미를 잃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심각하게 연습을 그만두더니 결국 피아노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많이 다투었고 서로에 대해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두 사람은 다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써니가 17살,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피아노를 팔 거냐고 물었다. 그는 왜 팔아야하냐며, 언젠가는 그녀가 그것을 연주하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녀는 아무도 치지 않는데 피아노를 갖고 있는 건 어리석은 짓이고, 자신은 매일 아무 이유없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피아노를 보는 게 싫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은 괜찮다고 하자, 써니는 그가 피아노를 그대로 두는 건 피아노가 그녀에 대해서 속삭이는 말, 즉 그녀가 실패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타가 써니에 대한 회상에 젖어 있는데, 거실에 피우고 있던 벽난로에서 나무가 날카롭게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확인하러 가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리고, 이전부터 그의 집을 사고싶어 하는 고객이 있다며 집을 팔라고 했던 리얼터 리브 크로포드 (Liv Crawford)와 얘기를 나누는 중 거실 카펫에 불이 붙었다. 그로 인해 연기를 마시게 되어 그는 노인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병원에서 그는 몇몇 친구들을 만나는데, 그중 레니 배너지 (Renny Banerjee)라는 친구가 얘기 도중 예전에 하타가 만났던 메리 번스(Mary Burns)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하타는 그에게 그저 자신들 둘은 친한 친구 사이였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하타와 베리 번스는 한때 연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미망인이었고, 두 사람은 공원, 식당, 그리고 시내 영화관 등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의 집에서 같이 밤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순간을 행복하게 떠올릴 수 있지만, 두사람 사이에는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뭔가가 있었다. 배너지는 그녀를 놀라운 여인이라고 칭송하면서 하타에게 가끔 만나냐고 물었다. 하타는 그렇지 않다고, 그녀가 작년에 세상을 떴다고 말했다. 그녀는 간암 말기였다.

사실, 끝에 하타는 메리 번스를 보지 못했다. 그녀가 죽기 몇 주 전에서야 두사람 모두의 지인들에게서 그녀가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집이나 죽기 전까지 있었던 이 병원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당시 꼭 그래야할 것 같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기분 나쁘게하거나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그는 그녀를 찾아가서 침대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건넸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메리 번스는 그가 새로 이사온 베들리 런에서의 이웃이었다. 베들리 런같은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많은 걸 공유했고, 이웃들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그가 처음 그곳으로 이사왔을 때에도 사람들은 환영카드를 보내주었고, 그 역시 감사카드를 돌렸다. 형식적인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들이 자신을, 특히 외국인이며 일본인인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포장된 선물을 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가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 입장에서의 침입자인 자신이 그들이 얼마나 견고하게 보호받고 안전한지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그들만의 규칙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리 번스는 조금 달랐다. 어느 날, 그가 드라이브 웨이 옆에 나무를 심고 있을 때 그에게 말을 건 메리를 처음 보았다. 얼굴은 낯설지 않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웃이라고 소개하며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가 그를 닥터라고 하며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내색을 했고, 그는 자신을 닥이라고 부르는 건 괜찮지만, 자신은 의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은 남편도 심장전문의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가 진짜 의사인지 아닌지 상관없지만, 그의 움직임과 손짓 등이 의사 같다고 했다.

일본을 영영 떠나기로 결정한 이래, 그는 여자와의 친밀한 관계나 사귀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작은 가게를 마련하는 일과 그밖에도 살면서 다른 일들이 무수히 많은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리와 함께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었다. 그와의 만남이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정말 편안하게 보였다. 너무 느리거나 큰 소리로 얘기하지도 않았고, 그를 유심히 바라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는 적절하게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대화도중, 그녀가 그의 가족관계를 물으며, 그의 아내가 밖에 나오는 걸 한번도 못봤다고 했다. 그는 머뭇거리면서 좀 더 설명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당시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수년 전에 아내가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얘기는 하고싶지 않다는 어조를 분명히 했다. 그는 자신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녀가 딸이 대학생인지, 일하는지 물었고, 그가 이제 중학생이고, 열한살이라고 하자 그녀는 그의 나이에 비해 아이가 어린 것에 약간 어리둥절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가 4년전 아이를 크리스찬 입양 기관을 통해 입양했다고 말했다. 

집구경을 끝내고 로즈마리와 타임 줄기를 메리에게 건네며, 차한잔하고 가라는 말을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곧 써니의 오후 피아노 연습시간이 된 것이 신경쓰였다. 물론 써니에게는 새엄마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 즉 말하자면 여자가 그들과 함께 살면 그녀가 더 행복해질 것이고, 매일 매일 점점 더 증가하는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감정이 덜 느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전쟁 때 만난 몇 안되는 동료들을 통해 믿을 수 있는 연결을 바라며, 일본에 있는 옛친구들을 통해 적당한 여자를 소개받는 게 목표였지만, 사실 좋은 배경과 재력을 가진 사람은 별로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어린 여자 아이가 한쪽 부모, 그것도 아버지하고만 자라는 게 별로 옳은 것 같지 않아서 써니에게 이 모든 걸 얘기하며 납득을 시키려고 했지만, 그 얘기를 할 때마다 그녀는 강하게 반대하며 울었다.

하타와 연인이 된 메리는 써니와 이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써니는 그녀를 마음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이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메리는 문을 열고 돌아왔다고 큰 소리로 말했고, 그가 현관에 나가 그들을 맞이할 때면 써니는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그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라고 하면 써니는 차에서, 대문에서 이미 인사를 했다고 했고, 계단 꼭대기에서 퉁명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리곤 했다. 그런 후 하타와 메리는 거실이나 부엌에서 간단한 간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곤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가는 주름이 있는 얼굴에서, 꽉 다문 턱에서 그녀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볼 수 있었다.

그후 메리 번스는 그런 써니 때문에 한번 울었던 적도 있었다. 그가 써니의 무례함을 얘기하겠다고 하자, 메리는 그러지 말라며, 써니는 한번도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불친절한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불평한 적도 없다고, 열한살짜리 아이가 그토록 예의바른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날 자신은 써니가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정말로 행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온 순간 그 즉시 모든 게 끝났다고 말했다. 써니는 오후 내내 그녀가 해야하는 형벌을 이행했고, 집에 오자 그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했다. 써니는 자신에게 깊은 감정이 없다고. 그녀는 갑자기 너무 피곤해졌다며 저녁을 함께 먹지 않겠느냐는 하타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메리는 써니와의 관계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써니는 점점 더 닿을 수 없는, 점점 더 메리나 그와 거리를 두는 아이가 되었지만, 하지만 메리는 써니한테 여자가 필요하고, 언젠가는 자신을 좋아해줄 것이라며 둘의 주말 외출을 계속했고, 그가 가게 때문에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던 방과 후 활동에도 참석했으며, 피아노 대회나 연주회에도 갔다. 정말로 그녀는 거기 있었다. 그 둘은 여느 엄마와 딸과 다르지 않았다. 가게에 들르는 다른 엄마들이 둘의 모습이 정말 보기좋고 우아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실 그는 속으로 사람들이 써니를 건방지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둘이 심하게 싸웠다고,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메리 번스가 극도로 화를 내며 그녀를 꾸짖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는 그런 얘기를 한번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메리와 그가 완전히 끝나게됐던 때가 다가왔다. 그들의 끝이 오기 몇주 전 어느 날, 그는 풀에서 수영을 하고 메리는 옆에 앉아 아이스 티를 마시며 써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사람은 테니스 클럽에서 열리는 십대 댄스 파티에 가기로 했었고, 메리는 그 행사의 여성 행사진행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의 집에 도착한 후부터 조용히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자신이 수영을 하는 동안 친구가 되어 달라고 했다. 그도 댄스 파티에 가려고 했지만, 그날 오후 써니가 가게로 찾아와 그가 그냥 집에 있었으며 좋겠다고 했다. 그도 자신이 그곳에 가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행사진행원들이 다들 파트너와 함께 오기 때문에 자신도 메리의 파트너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써니는 메리는 파트너가 필요없으며, 그곳은 그녀의 클럽이기 때문에 그가 안오면 다른 사람들과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그녀가 초대했다고 하자, 써니는 알고 있다며, 하지만 자신이 그에게 오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들 댄스 파티에 가족 모두가 오는 집이 어디있느냐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하타는 써니가 자신들 세사람을 '가족 전체'라고 말한 것에 기분이 좋았지만, 물론 써니는 전혀 하타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한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수영을 마치고 풀장에서 나온 그에게 메리는 그가 파티에 오지 않을 것을 미리 말해주지 그랬냐고 말했다. 그가 오후에 전화를 했지만 그녀가 받지 않았다고 하자, 자신이 화가 난 것은 그가 써니를 잘못 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를지 모르지만, 분명 그렇다고. 그가 써니의 그녀에 대한 질투를 잘 다루지 못했다고 하자, 메리는 자신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그가 써니를 성인 여자 다루듯, 마치 어떤 신세를 졌던 여인처럼 대한다며, 자신은 그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를 원했던 사람은 그이며, 그녀를 입양한 것도 그인데, 그는 마치 써니를 예전에 상처를 주거나 배신했던 적이 있어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줘야 하는 것처럼, 죄지은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말하며,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으며, 특히 아이에게는 훨씬 안좋다고 말했다. 그가 뜻밖이지만, 그녀의 말을 생각해보겠다고 하자 메리는 그가 항상 타협을 하려고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써니는 메리가 찾아오는 횟수가 늘자, 더욱 더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했고, 특히 메리가 하타와 함께 밤을 세운 다음 날이면 더 그랬다. 그녀는 아주 빠른 속도로, 마치 자신의 손가락을 비틀어버리려는 듯 손가락 준비운동을 했다. 그리고 곡들을 아주 무례하게, 마치 그것들을 완파해야 하는 것처럼 연주했다. 메리는 그런 써니를 재주가 많다고 칭찬하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칭찬을 정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연주들은 아주 감정적이었고, 그녀에게 그리고 그에게도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창피해서 써니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며 자신은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타와 메리가 얘기를 나누던 중, 마침내 기다리던 써니가 반짝거리는 하얀 색 벨트가 달린 옷을 입고 나왔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지난 주말 메리와 둘이 가서 산 옷이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이제 거의 다 큰 처녀가 된 그녀를 보면서 그는 왜 써니가 자신을 파티에 오지 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순수한, 그녀의 팔다리와 피부 그리고 얼굴과 눈이 자라면서 가져야 하는 그 모습, 바로 그녀의 육체적 모습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는데, 그 아름다움의 다른 특성, 즉 그녀가 살면서 터득했던 것, 이제 그녀의 세상을 그리고 그를 벗어나 독립해야 하는 그 척도, 그녀는 그것을 좀 더 오래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 병원에 입원해 있던 하타는 그곳에서 십대 자원봉사 간호조무사인 베로니카 (Veronica)와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예전 그의 고객이며 경찰이었던 코모(Como)의 딸이라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 퇴원 하루 전날, 코모가 그를 방문했다. 그녀와 베로니카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코모가 지금은 자신이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에빙턴 몰에서 써니를 만났는데, 너무 커서 못알아볼 뻔 했다고 말했다. 하타는 깜짝 놀라 그녀를 정말 그곳에서 봤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코모는 그녀를 매일 본다고 대답하며, 써니가 그곳에 있는 옷가게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으며 일년 정도 되었다는 얘기를 베로니카에게 들었다고 했다.

코모와 써니는 예전 써니가 고등학생 이었을 때 만난 적이 있었다. 코모에 따르면 써니가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며, 밤이면 온갖 추잡한 남자들과 어울린다고 했다. 어느 날, 써니는 코모가 점심을 사러간 사이 경찰차 지붕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코모와 부딪쳤던 적이 있었다. 코모는 써니에게 가진 것도 없고,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도 뭐가 나쁜 지 아는데, 많은 걸 가진 써니가 나쁜 짓을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두 사람이 길에서 다투고 있을 때, 하타는 나서지않고 엿듣고 있었는데, 써니는 그런 그를 보면서도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코모는 자전거를 타고 그 자리를 피하려 하는 써니를 향해 요즘 그녀가 만나는 지미 기지 (Jimmy Gizzi)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 중퇴이며 스물 다섯살로, 자신의 엄마가 심장마비로 죽기 전까지 자주 엄마를 때렸으며, 차고에서 마리화나와 약을 팔다가 지금은 베들리 고등학교의 부잣집 아이들을 상대로 코캐인은 팔고 있으며, 현재 도망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써니가 몇주째 주말을 그의 집에서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미가 그녀를 그저 오락용으로 여기고 있다는 얘기를 그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하타는 써니가 그저 시내 여자 친구들과 비치를 간다던지 쇼핑을 하면서 보내는 줄 알고 있었다. 코모의 얘기를 들은 하타는 속이 무척 상했다. 하지만 그는 코모가 자신에게 욕하는 써니를 거칠게 다루자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코모에게 자신의 딸에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말라고,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그리고 하타 자신과의 좋은 관계를 망치지 말자고 했다. 코모가 떠나고 써니를 가게로 데리고 가 다친 곳을 자세히 보려는데 써니가 거부했다. 그때 처음으로 그는 둘 사이에 놓여있는 얼음장 같은 차가움을 느꼈다.

그때 그는 써니와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남자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섹스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하타에게 자신은 아무 것도, 사랑도, 그의 관심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모든 일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행동하는지 봐 왔다고, 그의 인생은 정중함이 배어 있는 제스처 인생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고, 원하지 않으면서도 관대함을 보여주는 '멋진 사람'이므로 사람들이 그의 말을 거스릴 수 없다고. 심지어 자신이 못된 짓을 해도 사람들은 그를 기분 나쁘게 하는 걸 견딜 수 없어서 코모도 그렇게 그 자리를 피한 것이며, 메리 번스 역시 그렇다고 했다. 그때 그는 메리 번스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언제나, 너무나 지나치게 노력했다고, 마치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고 맹세한 사람처럼.

그때 써니가 가게를 나서려고 하자 하타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다시는 기지의 집에서 잠을 자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써니는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아무 데서나 자겠다고 했고, 하타는 그럴려면 자신의 집에서 나가고, 용돈도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써니는 알겠다고, 그의 집에서 자신의 물건을 옮기겠다며 하면서, 그를 바라보며 자신은 그가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가 필요치 않았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녀를 필요로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집을 나갔다.

한동안 써니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그는 어느 날 기지의 집으로 써니를 찾으러 갔다. 거실에서 엉켜서 파티를 하는 사람들 사이로 써니가 보이지 않자, 방들을 살펴보려고 갔는데, 한 방문 앞에는 여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문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 봤지만, 써니가 보이지 않자, 다른 문을 열어보는데, 그곳에서 두 남녀가 섹스하고 있는 걸 발견하고, 분명 여자가 써니일 거라는 추측으로 침대 가까이 갔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는 써니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섹스를 하면서도 그를 바라보았고, 마치 그가 잡아줘야 할 것처럼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부엌 뒷문으로 그집을 빠져나와 패디오에 서 있는데, 나무 사이로 들려오는 음악과 목소리들이 갑자기 그가 예전에 살았던 다른 시간의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그가 태평양 전쟁에 막 참가한 때였다. 당시 그는 싱가폴에 주둔해서 어디로 보내질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저녁, 그는 동료 엔치 (Enchi)와 후지모리 (Fujimori)와 함께 환영 클럽에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전방부대 기지의 의사 보조직으로 배정되었다. 엔치가 그날 저녁 클럽으로 불려오는 소녀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이미 술에 취한 그는 빨개진 얼굴로 흥분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날 밤 그곳에 여자아이들이 올 것인데, 아마 아직 성경험이 없는 어린 소녀들일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하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지난 번의 외출 얘기를 하며 히히덕거렸다. 엔치는 별 반응이 없는 하타에게 오늘 밤 자신들과 함께 가자며, 여자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타가 자신은 창녀들을 싫어한다고 하자, 엔치는 그것이 바로 그날 밤 자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클럽에 오는 여자들은 신선한 아이들이며, 일본에서 보내주는 늙은 일본 아줌마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클럽 가까이 가자 많은 군인들이 밖에 서 있었다. 보통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시끄럽고 떠들석할텐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그들은 영국인의 소유였다가 지금은 클럽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 집의 한쪽, 넓은 베란다 앞 쪽에 한 그룹으로 서 있었다. 후지모리가 그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했다. 그들이 달려가자 현관에서 다른 교관들이 나오며 마당에 서 있는 군인들에게 뒤로 물르라며, 아무 것도 손대지 말라고 명령했다. 후지모리가 자신은 군의관이라고 했다. 다시 한번 더 뒤로 물러서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이로타 소령 (Major Irota)으로, 유일하게 군복을 입지 않고, 푸른색 실크 가운과 맨발이었다.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 사람이 없냐고, 말하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후지모리가 한 소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하타와 엔치는 그의 곁에 섰다. 그 소녀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의 머리가 너무 멀리 위쪽으로 꺾여져 있었다. 목이 부러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이로타 소령이 다시 한번 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본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입을 다물고 다들 그곳에서 떠나라며 후지모리에게 시체를 안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의 명령대로 안으로 들어가자 당직장교가 그들을 부엌 뒤쪽에 있는 비좁은 방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한 정육점 테이블 위에 그녀를 내려놓자 그는 마대로 그녀를 싸라고 했다. 마대로 그녀의 시체를 싸면서 엔치가 일층짜리 건물인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목이 부러졌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후지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소녀가 그가 본 첫번째 시체였다. 그녀는 못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열다섯살 정도되는 소녀였다. 하타는 그녀의 얼굴 생김새로 보아 한국인이 아닌가 계속 생각했다. 그녀는 음모도 많이 자라지 않은 어린 소녀였다. 처음 그가 그 소녀를 안으로 옮기기 위해 후지모리와 함께 들어올리다 윗층 창문틀 너머로 밖을 내다보는 두명의 여자아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걸 보았는지, 그들은 재빨리 창문 뒤로 몸을 숨겼다.

그곳의 저녁 시간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소란스러웠다. 어느 누구도 몇 시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소녀가 지금은 장교들의 재미를 위해 사용되고 있는 바로 그 방들 중 하나에서 뛰어내려 죽음에 이른 일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엔치는 술에 너무 취해 정신을 잃었고, 그와 후지모리는 그들이 싸놓은 시체를 당직장교와 상병이 큰소리로 하나 둘 셋을 세면서 좌우로 흔들더니 마치 무우자루 던지듯 집 뒷쪽에 서있던 작은 짐자동차에 싣는 것을 본 이후 서로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조금 후 하타는 결국 윗층으로 올라갔다. 새로 온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문틀 너머로 보고 있던 소녀들, 그들이 죽은 소녀의 몸을 얼마나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계속 떠올라서 였다. 층계참에서는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군인들이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한명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며, 겨우 한명밖에 안줄었다고 불평했다.

하타는 그들을 지나 계속 나아갔다. 보통 장교들은 여자와 몇 시간을 보내거나 때론 하룻밤을 보낼 특권이 있었지만, 이번 경우엔 특별 공수인 것 같았다. 직업 여성을 공급받는 데 너무 이골이난 그들에게 소녀들의 도착은 초조하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누군가 그들이 도착하면 가장 먼저 재미를 보는 사람이 야마시타 장군(General Yamashita) 일 것이라고 했다. 네명의 소녀들이 시모노세키(Shimonoseki)에서 필리핀을 거쳐 그곳으로 보내졌는데, 긴 항해로 다른 두명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이제 세명이 됐는데, 모두를 만족시켜줄 만큼의 젊은 여자들이 급히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하타 역시 섹스를 원할 때도 있었고, 그럴 때면 40살 정도의 일본 여자와 관계를 맺곤 했지만, 그녀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그가 왜 새로 온 소녀들에게 가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길은 없지만, 특별히 그녀들이 걱정이 되었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소녀들의 수가 극히 적다는 것이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짜증나게 했다. 그는 불이 음탕하게 밝혀진 한 방에 한명씩 들어가 있는 그 세명의 소녀들을 계속 생각했다. 그때 한 방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한 소녀가 울면서 뛰쳐 나왔는데, 그녀는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허벅지 안쪽에는 희미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그를 지나치려 하자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제발 자기를 놔달라고 했다.

잠시 후 허리에 수건을 감은 건장한 장교가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하타와 함께 온 그룹 캡틴이었다. 그는 그녀를 붙잡고 있는 하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하타를 보면서 '오빠, 제발 보내주세요'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그 교관이 하타에게서 그녀를 낚아채더니 뺨을 세게 때렸다. 그리고 조용해진 그녀를 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그녀가 뒤를 돌아 하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녀는 잿빛 얼굴로 그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하타는 기지의 집 옆을 걸으며 그 소녀를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전쟁에서 살아남아 지금은 싱가폴이나 한국 혹은 이 나라 미국에 살고 있지는 않는지, 아니면 엔치처럼 금방 죽었는지 궁금했다. 그가 앞마당 쪽으로 돌자, 처음 그에게 인사를 했던 청년 두명이 아직 그곳에 있다가, 그중 한명이 써니가 그곳에 있다고 말하며 그의 고개를 차고 위의 지붕창 쪽으로 살짝 젖혔다. 그곳 창문의 두꺼운 커튼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가 그 청년에게 자신의 딸 써니를 아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알려줬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며 자리를 떴다.

하타는 집 옆에 붙어 있는 나무 층계를 날으듯이 올라갔다. 층계참에서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췄다. 그곳의 문은 반은 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반대편에 레이스 커튼이 달려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그곳에서 써니가 그녀의 딸이나 그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아닌, 그저 모르는 다른 여자였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