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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의 작은 서재

The Lowland by Jhumpa Lahiri (2013) Margaret Kim (margaret7630) 2014-10-23  22:22:39

The Lowland


By


Jhumpa Lahiri




수바쉬 (Subhash)와 우다얀 (Udayan)15개월 차이의 형과 동생이며, 둘은 어렸을 적부터 늘 함께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대로 항상 붙어 다녔다. 그들은 서 벵갈의 수도인 캘커타 (Calcutta) 인근 톨리간지 (Tollygunge)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톨리 클럽 (Tolly Club)의 동쪽, 데샤프랜 사쉬말 (Deshapran Sashmal) 로드 끝,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 작은 회당이 있고, 코너를 돌면 나오는 조용한 엔클레이브 (enclave: 소수민족 혹은 이민족 집단 마을. 이웃은 모두 무슬림이고, 그들은 힌두이다 -마가렛 주)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과 평범한 중산층 집들이 있었다.


한때 이 동네 안에는 타원형의 연못 두개가 나란히 있었고, 그 뒤로 수 에이커에 이르는 저지대가 있었다. 장마가 끝나면 연못들의 수위가 올라 그것들 사이에 세워놓은 둑이 보이지 않았다. 저지대 역시 빗물로 가득차 깊이가 3-4 피트 정도 되었고, 물은 일년 동안 상당량이 남아있었다. 캘커타의 습한 기온으로 인해 물 증발 속도는 느렸지만, 점차 태양은 대부분의 넘쳤던 물을 증발시켜 버리고 다시 축축한 땅을 드러냈다. 수바쉬와 우다얀은 셀 수 없이 많이 그 저지대를 가로질러 다녔다. 이웃 마을의 외곽에 있는 들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축구를 했다.


그들이 매일 지나치는 톨리 클럽은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그 부근 사람들처럼 그들도 수백번 클럽의 나무문과 벽돌담을 지나쳐 다녔다.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그들의 아버지는 담장 뒤에서 트랙을 도는 말들을 구경하곤 했다. 길거리에 서서, 내기를 건 사람들과 티켓을 살 수 없는 다른 구경꾼들, 또는 클럽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후, 수바쉬와 우다얀이 태어난 무렵, 그곳의 담장이 더 높아졌고, 일반인들은 더 이상 안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의 이웃 중 비스밀라 (Bismillah)라는 사람이 그 클럽에서 캐디로 일했다. 그는 분할 (Partition of India: 1947년 영국에 의해 인도는 파키스탄과 인도로 나뉘어졌고, 이후 파키스탄은 다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나뉘어졌음. 또한 후에 벵갈 지역은 동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인도로 나뉘어 짐-마가렛 주) 이후 톨리간지에 남아있던 무슬림이었다. 그는 몇 파이사 [paisa:인도, 네팔, 파키스탄의 동전. 100 파이사가 1루피 (rupee)이다-마가렛의 주]를 받고 골프코스에서 잃어버렸거나 버려진 공들을 사람들에게 팔았다. 어떤 것들은 껍질이 갈라져 분홍색 안이 보이는 것도 있었다.


수바쉬와 우다얀은 처음엔 잘게 여기저기 움푹움푹 들어간 공을 막대기로 쳐서 주고 받고 했다. 그런 다음 비스밀라가 손잡이가 약간 구부려진 퍼팅 아이언 (퍼터)을 그들에게 팔았다. 그것은 열에받친 선수가 나무를 때려 그렇게 된 것이었다.


비스말라는 그들에게 어떻게 몸을 앞으로 숙이는지, 손은 어디에 놓는지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땅에 구멍을 파고 공을 천천히 굴려 그 안에 넣으려고 애를 썼다. 아주 먼 거리로 공을 날리기 위해서는 다른 아이언이 필요했지만, 그들은 그저 퍼터를 이용했다. 골프는 축구나 크리켓과는 달랐다. 형제가 만족하게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어느 날, 비스말라는 그들이 놀던 들의 땅바닥에다 톨리 클럽의 지도를 그려 안의 시설들을 설명해주면서 클럽에서 최근 침입자들을 퇴치하기 위해 경계 벽을 좀 더 세웠지만 아직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한 사람 정도 들어올 수 있는 철조망 담이 있다고 말했다. 수바쉬와 우다얀은 비스말라의 말을 듣고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들은 다른 골퍼들이 어두워져 모기를 피해 모두 코스를 벗어나 칵테일을 마시러 클럽하우스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퍼팅 아이언과 두 개의 빈 등유통을 들고 큰길 쪽으로 돌았다.


그들은 비스밀라가 말한 곳으로 갔지만 철조망 담이 없었다. 그래서 담을 넘기로 했다. 먼저 퍼터와 등유통을 담 너머로 던져놓고 차례로 담을 넘었다. 골프 코스는 부드러운 잔디가 깨끗하게 손질되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그들은 잠깐 걷거나 말을 탄 경비원에게 혹시 들키지 않았나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그들을 잡으로 온 사람은 없었다.


얼마 후 자칼의 울부짖는 소리를 신호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 형제는 떠나면서 등유통 두개를 그곳에 남겨 두었다. 표시를 해놓기 위해 하나는 담장 바깥쪽에, 다른 하나는 클럽 안쪽에 잎이 무성한 관목 뒤에 숨겨놓았다. 그후에도 그들은 그곳을 몇차례 찾아가서 물 속에 빠진 공들을 꺼내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퍼팅 아이언을 클럽 안쪽으로 던져놓고 담장 위로 올라갔는데, 반대 쪽에 있어야 할 등유통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져갔다고 우다얀이 말했다. 그는 그것을 찾기 시작했지만, 불빛이 거의 없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이것이 너희들이 찾고 있는 거냐? 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갑자기 경찰이 나타났다. 그는 클럽을 순찰 중이었고, 그들이 찾는 등유통을 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몇걸음 다가왔다. 땅위에 놓여있는 퍼팅 아이언을 보더니 그것을 집어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등유통을 땅바닥에 내려놓더니 손전등을 켜고 그들의 얼굴을 비춘 다음 그들의 몸을 살폈다. 그러더니 그들에게 형제냐고 물었다. 수바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호주머니에 든 것이 무었이냐고 물었고, 그들은 갖고 있던 골프공을 모두 꺼냈다. 그들은 경찰이 그것을 모두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 걸 보았다. 그는 공을 하나 꺼내더니 공중 위로 던지고 받고를 계속했다.


그는 형제에게 그것들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물었고,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경찰이 다시 그들에게 누군가 클럽에서 골프를 치도록 초대를 했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곳은 제한구역이라는 걸 말할 필요는 없겠지, 라고 말하며, 퍼팅 아이언을 살짝 수바쉬의 팔에 대며 이번이 첫번째 방문이냐고 물었다. 수바쉬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수바쉬에게 네 생각이었느냐고 물었고, 우다얀이 자기가 그렇게 하자고 했다고 나섰다. 경찰은 수바쉬에게 죄를 대신 뒤집어 쓰려는 아주 충성스런 동생을 두었다며, 이번 일은 클럽에 알리지 않겠다고 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경찰이 다시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 부모님과 얘기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대화를 거기서 끝낼 것인지 묻자 형제는 그곳에서 끝내자고 했다. 그러자 경찰이 수바쉬에게 뒤로 돌으라고 하더니 퍼팅 아이언으로 그의 엉덩이와 다리 뒤쪽을 때렸다.


그들 부모님은 그들을 때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수바쉬는 처음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잠시 후 끓는 물에 데인 것 같은 감각이 그의 피부에서 느껴졌다. 우다얀이 경찰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그는 수바쉬 옆에 끓어 앉아 수바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막았다. 그들은 힘껏 서로를 끌어 안았다. 잠시 후 아이언을 담장 너머로 던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에게 아무런 볼일이 없던 경찰은 그 자리를 떳다.


어린시절부터 수바쉬는 조심스러운 아이였다. 그는 항상 엄마 근처에서 맴돌았고, 아버지가 마당에서 기르는 화분에 꽃 심는 것을 돕기도 했다. 그는 게임을 보며 시끄럽게 소리치는 게 싫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혼자있는 시간이거나, 혼자라고 느낄 때였다. 아침에 침대에 누워 벽에 새처럼 깜박거리는 햇살을 바라보는 시간같은. 때때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그에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한 친척들은 그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반면, 우다얀은 달랐다. 그는 항상 어딘가로 숨어서 부모님이 찾게 만들었고, 굉장히 활동적이었다.


집을 나서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만큼 컸을 때에도 그들은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항상 붙어 다녔다. 언젠가 그들은 우다얀의 제안으로 한 영화 스튜디오 밖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따금 영화 촬영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 중 그들을 아는 누군가가 불러 그들은 얽혀있는 전선 및 케이블과 이글거리는 조명 가운데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들은 선글래스를 끼고 분장실에서 나오는 여배우들을 보기도 했는데, 우다얀은 용감하게 그들에게 다가가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색깔들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마리 동물처럼 자기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바쉬는 그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는 가능하면 자신의 존재를 최소화하려고 애를 썼다. 마치 나무껍질이나 풀 색으로 몸의 색을 바꿔 그것들과 섞여버리는 동물들처럼 말이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닮은 점이 많았다. 목소리는 너무 똑같아서 어떤 질문에 대답을 하면 사람들은 누가 대답했는지 구별하지 못했다. 또 체스보드에 앉아 있는 모습, 즉 한쪽 다리는 구부리고, 다른 한쪽을 편채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은 정말 거울처럼 똑같았다. 뿐만 아니라 옷을 입고 있는 모습도 비슷했다. 부모에게서 받은 연한 구릿빛 형체는 쌍둥이같았다. 이중관절의 손가락, 날렵한 용모, 곱슬머리 등.


수바쉬는 자신의 얌전한 성격이 그의 부모의 눈에는 창의력이 부족한, 아니 창의력이 전혀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의 부모는 그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또한 그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의무적으로 그들에게 복종해야 했고, 그들을 놀래키거나 감동을 주는 일 따윈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우다얀의 몫이었다.


수바쉬가 일년 먼저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우다얀이 그없이 수바쉬가 학교에 간다는 게 말이 안된다며 우겨서 동시에 둘이 같은 교실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에는 대학 입학을 위해 가정교사를 고용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의 엄마는 전보다 두배 더 바느질을 해야했다. 우다얀은 기초 전기 회로망을 배운 후 집에 초인종을 설치하기도 했다. 둘은 모르스 코드를 익혀 그것을 사용해 초인종을 누르며 둘만의 비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은 대학은 서로 다른 곳으로 진학했다. 우다얀은 물리를 공부하기 위해 프레지던시 (Presidency), 수바쉬는 화공과를 가기 위해 자다퍼 (Jadavpur)에 입학했다. 그들은 별 특별할 것 없는 그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한 유일한 소년들이었다. 인도 철도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대학 졸업장이 없는 걸 유일하게 후회하는 그들의 아버지는 밖엘 나가면 축하받느라 중간중간 멈추지 않을 수 없다고 기뻐하며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아이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으며, 자신들의 노력으로 그런 결과를 성취하게 되었다고 자랑했다.


입학 선물로 수바쉬는 갖고 있는 낡은 나무 체스판 대신 대리석 체스판을, 우다얀은 단파 방송용 라디오를 원했다. 그는 좀 더 많은 세상의 소식을 듣고 싶어 했다. 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부품을 구해 둘이 조립해 라디오를 만들었다. 그들은 안테나를 조종하고 위치를 바꿔가며 이것저것 전파가 잡히는 세계의 뉴스를 들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나오면 그저 짐작했다. 1964년 미국이 베트남에 군대를 보냈고, 브라질에서는 군사쿠테타가 있었다. 캘커타에서는 사티야지트 (Satiyajit Rey)의 새로운 영화가 나왔고, 스리나가 (Srinagar)에 있는 사원에서 성유물이 도둑맞은 사건으로 무슬림과 힌두 사이에 유혈 사태가 벌어져 100명 이상이 숨졌다. 델리에서는 여전히 중앙 정부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해 봄 네루 (Nehru)가 심장마비로 죽자 그의 딸 인디라 (Indira)가 의회로 들어왔고, 2년이내에 수상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1967년 어느 날, 신문과 인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들은 여태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낙잘바리 (Naxalbari)라는 곳을 듣게 되었다. 그곳은 다절링 디스트릭트 (Darjeeling District)에 있는 여러 마을들 중 하나로, 희말라야 산맥 기슭의 작은 산들 속에 있는 마을이었다. 캘커타에서 거의 4백 마일 떨어진 그곳은 톨리군지 보다는 티벳 (Tibet)에 더 가까웠다.


그곳에 사는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차농장과 커다란 조직농장에서 일하는 부족 소작농이었다. 몇 세대에 걸쳐서 그들은 많이 바뀌지 않은 봉건제 하에서 살아왔다. 그런 그들을 부자 지주들이 꼭둑각시처럼 조종했다. 그들은 그들이 가꿔왔던 들에서 떠나야했고, 그들이 기른 작물에서 수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은 고리대금업자들의 먹이가 되었다. 최저 생활 임금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굶어죽기도 했다. 그해 3, 낙잘바리의 한 소작인이 그가 불법적으로 쫓겨난 땅을 경작하려고 하자, 그의 지주가 사람들을 보내 그를 폭행했고, 그의 쟁기와 숫소를 빼았았다. 경찰은 개입하기를 거부했다.


이 사건 후, 소작인 그룹의 보복이 시작됐다. 그들은 그들을 속인 권리증과 기록들을 불태워버리고, 무력으로 땅을 점거했다. 이번이 다절링 디스트릭트에서 발생한 첫번째 소작농들의 항쟁은 아니었지만, 이번에 그들의 작전은 전투적이었다.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채, 붉은 깃발을 들고 마오쩌뚱의 장수를 비는 구호를 외쳤다 (Long Live Mao Tse-tung!). 그들의 배후에 두명의 벵갈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항거가 점점 커지자 경찰이 그 지역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비공인 통행금지를 실시했고, 제멋대로 사람들을 체포했다. 5월에, 남녀 소작농 그룹이 활로 경찰을 공격해 죽였다. 다음 날 지역 경찰이 길에서 저항하는 사람들과 대면했다. 경찰중 한사람이 팔에 활을 맞았고, 경찰은 그들에게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거부하자 그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곳에서 11명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중 8명이 여성이었다.


밤에 라디오를 듣고 난 후 수바쉬와 우다얀은 그것에 대해 토론을 했다. 수바쉬가 소작농들이 하는 것이 목숨을 걸고 할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냐고 묻자, 우다얀은 물론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후 길에서, 대학에서, 소작농들을 옹호하고, 살인에 항의하는 데모가 있었다. 수바쉬와 우다얀이 다니는 대학 건물의 창문에도 낙잘바리를 지지하는 배너가 붙었다.


낙잘바리에서는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소작농들은 상응 정부를 따로 만들었고, 지주들을 납치해서 죽였다. 7월에, 중앙 정부는 낙잘바리에서 활을 갖고 다니는 걸 금지했다. 그리고 서 벵갈 내각의 인가로 5백명의 경찰과 남자들이 그 지역을 공격했다. 그들은 가장 가난한 마을의 진흙집들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은 내란인들을 잡아 항복하지 않으면 죽였다.


라디오를 듣던 우다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쌓여있던 책과 신문들을 멀리 밀어버렸다. 그는 라디오를 껐다. 그는 방안을 왔다갔다 하더니 마루바닥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올리기도 했다. 그를 본 수바쉬가 괜찮냐고 물었다. 우다얀은 가만히 서 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들은 뉴스가 둘 다에게 충격이었지만, 우다얀은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가해진 육체적인 공격인 것처럼 반응을 보였다.


그는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수바쉬가 어디 가냐고 묻자, 우다얀은 잘 모르겠다며, 걷고 싶다고 말했다. 수바쉬가 어찌됐든 이제 끝난 것 같다고 말하자, 우다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것이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수바쉬가 무슨 시작이냐고 묻자, 우다얀은 좀 더 큰 일에 대한, 이라고 대답했다.


이후부터 우다얀은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어 그것에 관한 책과 발행물들을 집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가 우다얀이 가져온 발행물들을 보면서 자신의 세대 때에도 마르크스를 읽었지만, 지금도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하자 우다얀은 아버지 세대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세대는 독립된 나라를 세웠지 않느냐고 말하자 인도의 독립이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왜 그때 영국에 저항하지 못했느냐고, 왜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공산주의자에게 투표했으면서 왜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하지 못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물론 수바쉬와 우다얀은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어느 당이나 조합에 가입할 수가 없었다. 독립운동 동안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의 직장의 조건이었다. 규칙을 어긴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한번도 그런 위험을 무릅쓴 적이 없었다. 수바쉬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은 그들 모두를 위해서, 책임감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고 말했지만 우다얀은 생각이 달랐다.


어느 날 둘은 기말 시험을 끝내고 옛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기 위해 저지대를 지나고 있었는데, 수바쉬가 우다얀에게 지금 캘커타의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이 정말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우다얀은 이미 효과를 보고 있다며, 마오가 중국을 바꿔놨지 않느냐고 말했다. 수바쉬가 인도는 중국이 아니라고 하자 우다얀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차 정류장으로 오고 가면서 함께 톨리 클럽을 지날 때면 우다얀은 모욕적이라고 했다. 아직도 도시 전체 슬럼가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있는데, 왜 소수의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100에이커나 되는 땅에 벽을 쌓아야하는 것이냐고 했다. 수바쉬는 예전에 둘이 그곳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렸지만, 우다얀은 골프가 매판 부르조와들의 오락이라고 말했다. 톨리 클럽은 인도가 아직 반식민지 국가임을 증명하는 곳이며, 영국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1968 , 통일 전선 (United Front) 정부가 무너지고, 서 벵갈은 직접적인 대통령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교육시스템 또한 위기에 봉착했다. 그것은 인도의 현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으로, 젊은이들에게 보통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무시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급진주의 학생들이 늘어나게 한 메시지였다. 파리와 미국의 버클리처럼 캘커타 전역에서도 학생들이 시험을 거부했고, 학위를 찢어버렸다. 그들은 학교 행정부가 부패했다고 외쳤다. 그들은 부총장들을 사무실에 가둬놓고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물과 음식을 주지 않았다.


이런 편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교수들의 격려에 힘입어 수바쉬와 우다얀은 대학원에 진학했다. 수바쉬는 학교를 캘커타 대학으로 바꿨지만, 우다얀은 그가 다니던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두 형제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성취하고, 언젠간 그들의 부모를 부양할 거라고 기대했다.


우다얀은 가끔 저녁식사 시간에 함께하지 않았다. 그가 없으면 아무도 낙잘바리의 운동이나 다른 게릴라 활동 등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수바쉬는 우다얀이 이런 것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우다얀이 없으면 조용한 가운데 식사를 할 수 있어서 그의 아버지는 더 좋아했고, 수바쉬도 동생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그립기도 했지만, 때로는 혼자 책상에 앉으면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우다얀은 이상한 시간에 집에 돌아왔고, 오면 라디오를 틀었다. 공식적인 뉴스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다절링과 실리구리 (Siliguri) 등에 있는 비밀스런 방송국을 찾았다.


어느 날 저녁, 우다얀이 함께 가자고 해서 수바쉬는 호기심에 북 캘커타에 있는 어떤 집에서 열리는 모임 장소에 함께 갔다. 작고 연기 가득한 방 안에는 대부분 학생들로 가득했다. 벽에는 비닐 포장된 레닌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방안의 분위기는 반 모스크바, 친 북경이었다. 수바쉬는 요란하고 거친 토론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모임은 질서정연하고 수업같은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곳에서는 신하(Sinha)라는 의대생이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다얀은 신하의 말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바쉬가 옆에 있는데도 그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수바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이데올로기로 과연 인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는 일년 전 낙잘바리 봉기로 불이 붙여졌다고 해도 혁명이 당연시 따라와야 한다고는 생각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용기가 부족해서 혹은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결점이 그로 하여금 그의 동생의 정치적 신념을 공유하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는 전에 둘이 초인종으로 우스꽝스런 신호를 보내 서로 웃곤 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는 우다얀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신하가 보내는 메시지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우다얀은 이제 몰래 페인트로 벽에 구호를 적고 다녔다. 어느 날 수바쉬가 그러다가 경찰에 붙잡히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고 말했지만, 우다얀은 잡힐리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바쉬 더러 원하면 함께 하자고 했고, 수바쉬는 망을 봐주게 되었다. 부모님께는 심야 영화를 보러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느 날, 수바쉬가 망을 보고 우다얀이 슬로건을 쓰는데, 수바쉬는 우다얀의 손이 떨리는 걸 보았다. 최근 그가 라디오 채널을 돌리거나 뭔가를 말하면서 손을 공중에 들 때, 혹은 신문을 넘길 때 그의 손이 떨리는 걸 보았다.


수바쉬는 전에 둘이 함께 톨리 클럽의 담을 넘던 일이 생각났지만, 아무도 그들이 한 일을 눈치채지 못했고, 아무도 그들을 벌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우다얀 혼자서 즐거워하는 일이었다. 수바쉬는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우다얀을 따라나온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항상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두려움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석사가 끝난 후, 수바쉬와 우다얀은 그들 세대의 많은 다른 젊은이들처럼 필요이상의 자격의 갖춘 무직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고, 수입을 집에 보탰다. 우다얀은 톨리간지에서 가까운 기술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는 평범한 일을 하게 된 것에 만족하는 듯 싶었고, 경력을 쌓는 일에 무관심했다.


수바쉬는 미국의 몇몇 박사 프로그램에 지원하기로 했다. 이민법이 바껴서 인도 학생들이 입학하기가 훨씬 용이해졌다. 대학원에서 그는 화학과 환경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었다. 석유와 질소가 바다와 하천 그리고 호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유학에 대해 부모님께 말하기 전 우다얀에게 먼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생이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랬다. 그는 우다얀도 일자리가 더 많은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함께 가면 두사람 다 훨씬 더 지내기가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다얀은 아무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지금의 상황에서 발을 뺄 수가 있느냐고. 수바쉬가 그것은 학위 프로그램이며, 몇년 걸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자, 우다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만약 수바쉬가 외국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바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우다얀은 자신이 잘 안다며, 수바쉬에게 너는 너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잖아, 라고 말했다. 수바쉬가 네가 하는 행동은 이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느냐고 하자, 우다얀은 신문을 넘기면서 변화를 바라는 것이 이기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바쉬가 부모님을 생각하라고, 만약 네가 경찰에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겠냐고 하자, 우다얀은 인생에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다고 말했다. 수바쉬가 그분들이 없었으면 넌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자, 우다얀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후 화를 삭히고 돌아온 우다얀은 수바쉬에게 넌 나의 다른 한쪽이며,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가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비록 우다얀이 처음으로 그 사실을 인정한 말을 했다고 해도, 수바쉬에게는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가 순종해야 했던 명령 중의 하나로, 그 동안 우다얀이 하자는대로 따라야 했던 또 다른 훈계로 들렸다.


그런데, 뜻밖에 집을 떠난 사람은 바로 우다얀이었다. 그는 잠깐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가벼운 베낭 하나 챙겨서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떠났다. 그는 떠나 있는 동안 집으로 소식을 전혀 보내지 않았다. 한달 후 그는 초라한 몰골로 돌아왔는데, 그의 떨리는 손은 더 악화되어 찻잔을 쥐고 있으면 접시에 부딪쳐 딸그랑 소리가 날 정도였다. 아침이면, 그가 자고난 침대가 흠뻑 젖어 차가웠고, 그가 누웠던 곳은 거므스레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깨어났는데, 심장이 무섭게 빨리 뛰고, 목에는 온통 붉은 반점들이 덮여 있었다. 의사는 혈액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모두들 혹시 그가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에 걸린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결과는 과민성 갑상선 질환이었다. 그후 그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그들과 함께 지냈지만, 몸만 그들과 함께 있었을 뿐 절반의 우다얀은 다른 곳에 있었다. 도시를 떠나 무엇을 보고 배웠는지, 그리고 뭘 했는지에 대해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더 이상 수바쉬에게 미국으로 가지 말라고 말리지도 않았다. 저녁에 함께 라디오를 들을 때에도, 신문을 보면서도 그는 거의 반응이 없었다. 뭔가가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수바쉬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관련이 없는 뭔가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1969422, 캘커타에 세번째 공산당이 창설되던 날, 수바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캘커타에 속해 있다고 생각치 않았다. 이제 그 도시는 자신이 떠날 준비를 해야하는 곳이었다. 수바쉬는 우다얀이 그곳에 참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집회에 참석치 않았고, 우다얀 역시 그에게 함께 가자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이미 서로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몇달 후, 수바쉬는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 (Rhode Island)에 있는 학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고, 그 동안 우다얀에게서 이념으로 가득찬 편지가 한통 왔었고, 그는 그것을 읽자마자 소각하라고 했다. 그후 어느 날, 우다얀에게서 두번째 편지를 받았는데, 그 안에는 어떤 젊은 여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우다얀은 편지에 그녀의 이름은 가우리 (Gauri)이고, 학교 친구인 마나쉬 (Manash)의 여동생이며 프레지던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는 것, 만난지는 2년 정도 됐고 그녀의 부모님은 두분 다 돌아가시고 오빠와 함께 살고 있으며, 그녀와 간단히 결혼신고를 했고,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썼다. 사진 뒤에 적힌 날짜를 보니 수바쉬가 캘커타를 떠나기 전으로, 우다얀은 함께 지내면서도 가우리의 존재를 수바쉬에게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수바쉬는 혹시 몰라 이번에도 편지는 소각하고 사진은 지갑에 넣고 다니며 가끔 꺼내 보면서 언제나 가우리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 우다얀이 그런 여자를 찾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더 패배감을 느낀다.


가우리의 아버지는 지방법원 판사였고, 부모님은 두분 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그녀는 할머니에게서 자랐다. 우다얀과 가우리는 자신들의 만남을 주변 사람들, 특히 가우리의 오빠 마나쉬에게 비밀로 하려고 애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마나쉬가 일부러 둘만의 시간을 갖게끔 계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둘은 부모님한테도 알리지 않고 우다얀이 함께하는 공산당 친구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용히 결혼식을 올렸다.


한편, 수바쉬는 박사 2년차 때 같이 살던 룸메이트가 학교에 일자리를 얻어 시카고로 가게 되어 혼자 살게 되었다. 1년 반 동안 가족을 보지 못했는데, 최근 우다얀에서 온 편지에는 이상하리만치 낙잘바리라든지, 편지 밑에 항상 적혀있던 구호같은 게 없었다. 그의 부모에게서 온 편지에는 가우리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었고, 그저 결혼 문제는 그의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무시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래서 수바쉬는 부모님께 그의 결혼은 그들이 마련해준 대로 하겠다고 답장을 했다. 그후 어느 여름 날, 수바쉬는 9살짜리 아들이 있는 간호사인 홀리 (Holly)라는 연상의 이혼녀를 만나 깊은 관계를 갖게 되고, 부모님의 뜻을 어기고 반항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죄책감을 갖지만, 그녀가 다시 남편과 합치는 바람에 관계가 끝나고 만다.


그리고 1971, 수바쉬가 로드 아일랜드에서의 세번째 맞이하는 가을, 캘커타에서는 Durga Pujo (Durga 여신을 기리는 힌두 축제-마가렛 주) 축제 준비로 한창일 무렵, 어느 날, 그는 캘커타로부터 항상 그맘때쯤이면 부모님이 보내주시던 상자 대신 그들 모두의 인생을 뒤바꿀 전보 한통을 받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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