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의 직장 첫날

2019년 8월 12일,

아침에 큰아이가 첫 출근을 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에도 아이스크림 가게, 떡볶이 가게, 영어과외 알바를 했고 학교에선 꾸준하게 스타디 워크를 했고 페이가 나오는 인턴십도 했기에 출근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본인도 그런지 첫 출근 잘 했다는 문자가 싱그럽게 날라왔다.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고 드레스 코드인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긴 머리는 묶었을까. 뚝딱뚝딱 해치우는 교포화장도 했으려나… 큰 아이가 일하게 된 곳은 바라던 어린이 병원이다. 새로 지은 고층 신식건물도 꽤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보기 좋게 떨어진 첫 인터뷰도 그 곳의 다른 부서였다.

아, 그러고 보니 첫 인터뷰 날이 생각난다. 졸업식을 마치고 이사한 다음날이어서 우리는 아직 딸아이가 살고 싶어하는 주에 머물러 있었다. 또래 세 명이서 하우스 쉐어를 하므로 우리는 따로 호텔에서 자고 인터뷰 마칠 시간에 병원에서 픽업하기로 했다. 검은 유리가 강아지 눈처럼 반짝이는 건물에서 환하게 웃으며 나오는 아이를 보며 이곳에서 일하게 되겠구나,란 생각을 했었다. 아니 그런 기원을 갖고 가까이 오는 아이의 사진을 건물과 함께 찍었다. 그런데 막상 다가온 아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상의로 검은색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는데 까망뿐 아니라 허연 티끌이 화농진 여드름처럼 곳곳에 보풀로 피어 있는 것이다. 세상에… 졸업식 마치고 이삿짐 챙기고 시험준비 하고… 그러느라 경황이 없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만 그런 옷을 입고 인터뷰 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적당한 옷이 있냐고 말로만 확인한 내 잘못이 컸다. 큰아이는 많은 면이 나와 달라서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어떤 면으로는 분명히 확고하고 성숙한데 어떤 면으로는 세상물정을 하나도 모른다. 잘 하려니 믿다가 꼭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할 일도 마음에 들고 사람들 하고도 모두 좋았다며 말마디마다 유리만큼 빛나던 희망 앞에서 보풀이 덕지덕지 일어난 낡은 스웨터는 복선처럼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단지 그 옷 때문에 떨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세상에는 드레스코드 하나 못 챙기는 어리버리한 신입사원이 못미더울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상하네요, 곧 연락이 올 것처럼 말했는데… 라고 이야기하는 큰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었던 말은, 너도 마음에 들었겠지만 나중에 인터뷰한 사람 중에 더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오퍼를 주는 것이 이 시스템이니까. 우리 유진이가 일은 잘 할텐데…. 그들이 너를 놓쳤구나… 정도였다. 할 말은 더 많았지만 겁을 주는 것 같아 속엣말로 삼켰다. 이제 네 삶은 안락했던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났다. 사회는 좀 더 규율이 있고 또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하는 곳이지, 넓은 의미의 드레스코드 같은 것…

결국 그곳에선 연락이 오지 않았고 인턴십 하던 대학병원이나 다른 파트타임 자리에서 콜이 왔지만 고사를 하면서 녹록치 않은 직장 구하기가 이어졌다. 그 사이 집에 다니러 온 아이에게 인터뷰용 옷을 사주었는데 그 옷을 입고 본 인터뷰들은 합격이 되어 그 중에 선택을 했으니 이것은 과연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큰아이는 의사가 되고 싶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꾸어 온 꿈이다. 하지만 의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걷는 길과, 재미로 차 있는 세상의 길에 각각 한 발씩을 올려놓고 어기적거리며 걸어왔다. 꿈을 포기한 적도 청춘을 포기한 적도 오늘을 포기한 적도 없다. 오롯이 공부에 할애했어야 할 시간을 쪼개서 많은 활동을 하며 살아온 아이의 생애는 좋은 눈으로 보면 넓게 살았고, 세상의 원칙을 잣대로 대자면 한 손에 들 떡을 나뉘어 쥔 꼴 밖엔 안 된다. 그 위태한 점수를 가지고도 큰아이는 꿈을 버리지 않고 도전하는 중이다. 솔직히 세상 물정을 조금 더 아는 이 엄마는 마음을 비웠다. 나는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겪을 아이의 상실에 마음을 써왔는데 이젠 그런 세상의 이치도 경험하는 것이 아이를 크게 하리란 생각이다. 학창시절 늘 지각을 하던 자녀가 취직을 했는데 첫날에 버릇대로 늦자 즉시 해고가 되었고 이후 알람을 몇 개씩 맞춰놓는 버릇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나를 고무한다.

병원의 연구보조로서 받는 연봉은 박봉이다. 그래도 오늘 큰아이는 행복하다. 인생의 메뉴얼상, 직장으로의 첫 출근길은 당연히 행복하다. 그것도 바라던 곳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사회생활이란 게 그렇다. 학교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해야 할 일과 사람들이 다르다. 공부는 매우 보편적이며 독립적인 영역으로서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자율성이 보장되지만 직장일은 피동적(대부분)이며 연계성과 강제성이 강하다. 사람관계도 그렇다. 친구는 나와 잘 맞고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을 골라 사귈 수 있지만 직장동료는 그냥 그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뚜렷하게 가치관이나 성격에 차이를 보여도, 나아가 그로 인해 갈등이 야기되어도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생활이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는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Grit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벽돌공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세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1) 벽돌을 쌓고 있어요. 2) 교회당을 짓습니다. 3) 하나님이 계실 가옥을 짓는 중이지요. 첫번째 대답은 벽돌공을 단순한 직업으로, 두번째는 커리어로, 세번째는 소명으로 생각하는 대답이라고 했다. 소명은 어떤 일을 하든 생길 수 있으며 ‘내 일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청소부는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사회를 복되게 한다는 소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 소명을 느낀다면 그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강력하게 역경을 헤쳐나갈 무기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보람된 시간으로 청춘을 채울 방법도 없을 것이다. 적은 보수, 심술 궂은 동료와 상사, 쾌적하지 않은 환경 등을 맞닥뜨리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인생을 충만하게 하는가를 생각한다면 그 일을 첫날처럼 꾸준히 행복하게 해나가리라. 생각해보면 나 자신, 그런 깨달음 없이 직장생활을 하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오늘, 아이가 첫 퇴근을 했을 때 따뜻한 저녁을 함께 못하는 대신 소명에 관한 이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