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미국, 다른 삶(2) - 미국 음식문화와 한국 주부

나의 감옥, 그것은 집이란 공간에만 머물며 외부와 차단되었던 고립에서 생겨난 것만은 아니었다. 만약 한국에서 외국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한국어를 잘 못 한다면 그래도 나는 여전히 존중하며 예의를 갖추어 대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도와주려 애를 쓰겠지. 그것이 내 상식이었다. 그런데 어떤 미국인들은 달랐다. 영어로 말을 잘 못하는 외국인을 무시하거나 속이려 들었다. 계약할 때 자기가 한 말을 수 분 후에 바꾸던 리싱 오피스 직원, 길을 물어보았을 때 대답한 후 알겠냐고 되묻기에 미안한데 모르겠다고 말하자 모르면서 뭘 그리 빤히 쳐다보냐던 낯선 여인, 자신이 한 말을 모른척 하며 손님을 곤란에 빠뜨린 천가게 종업원… 그들은 단지 영어 때문에 나를 열패감에 휩싸이게 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욕망하며 살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꽤 오랜동안 영어공부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며 따라가려 애썼다. 세월이 지나 생각해보니 나쁜 경험이 아니었다.

아이 프리스쿨이 있는 미국교회에서 일요일 저녁에 ESL 수업이 있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을 때, 그곳에 John 할아버지가 있었다. 앞에 문이 있는데 그 문이 잠겨 있다면…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을 가지고 쳐다보게 되리라. 잠겨 있으니 그냥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상상을 한다. 그러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탈출하기를 기원할 때, 짙푸른 바람과 낭창한 포도넝쿨과 드넓은 수평선을 만나리라는 기대로 그 문을 마구 흔들어 대겠지. 내겐 그 순간 문밖에서 손잡이를 돌려준 이가 John 할아버지였다.

조지아에 사는 John 할아버지는 내게 참 고마운 분이다. 영어로 말을 잘 못 해도 예의를 갖춰 존중하며 친절한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만난 많은 사람들로 인해 미국에 좋은 사람이 더 많음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첫 만남을 아직도 기억한다. 커다란 체구에 그리 친근한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재주껏 활짝 웃으면서 너를 환영해, 란 느낌을 여울 깊게 던져주었다. 그는 남편과 나의 선생님이 되었다. 우린 서로의 집도 왕래하며 서로의 문화를 진정어린 눈으로 들여다 보면서 서로 다름을 신기해 했다. 예를 들면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말이다.

미국에서는, 아침에 우유에 시리얼이나, 커피에 토스트나 베이글을 먹어요. 한국은 어떤가요?

한국에서는 밥과 반찬을 먹어요. (20년 전^^)

미국에서는 점심에 샌드위치나 커피, 때론 건너뛰는 사람도 있어요. 시간을 절약해 일찍 퇴근하죠. 아이들은 피넛버터 앤 젤리 샌드위치를 좋아해요.

한국에서는 점심에 밥과 반찬을 먹어요. 아이들도 그렇게 먹고요.

아, 그렇군요(약간 의아한 표정). 미국에서는 저녁에 스테이크, 샐러드, 파스타, 삶은 야채 등등 특별식을 먹어요. 투고도 하고 마트에서 산 냉동음식을 데워 먹기도 하고 피자배달도 시키고요. 어떤 주부들은 한번에 왕창 해놓고 다음날 남은 음식을 즐기기도 하고요. 한국에서는 저녁에 특별한 것을 먹나요?

한국에서는 저녁에도 밥과 국이나 찌개, 반찬을 먹어요. 고기도 구워먹고요.

네?? 세끼를 다 밥과 반찬을 먹는다고요?

네. 일반적으로 그런 가정이 많아요. 점심에 국수류를 먹기도 하고요.

국과 반찬은 매번 같은 걸 먹나요?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어요.

와우, 한국의 주부들은 식사준비하느라 정말 바쁘겠군요.

미국주부와 비교해보니 그렇네요…

나는 John 할아버지 덕분에 미국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며 조지아를 떠난 후엔 가끔씩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알고 보면 그땐 아저씨였던 John 할아버지는 이젠 정말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치매에 걸린 부인은 요양원에 있고 아들을 먼저 여읜 슬픔을 겪었지만 여전히 외국인 학생과의 만남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며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20여년 전, 그 댁에서 처음 먹어 본 치킨 캐서롤의 맛은 정말 신세계였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절 내겐 그야말로 골메이 밀(gourmet meal)처럼 느껴졌다. 하물며 내가 가지고 있던 미국음식에 대한 얕은 틀도 깨뜨렸다. 햄버거와 감자튀김, 스테이크나 샐러드 말고도 요렇게 섬세하고 융숭한 요리가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면목이었다. 알고 보니 캐서롤은 프랑스식 요리이며 조리법은 간단했다.

그날 내가 먹어본 것은 미국화된 캐서롤이었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미국에 살면서 유럽 레시피를 조금씩 변형시킨 것이 현 미국의 음식문화라 했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애플파이는 영국과 네덜란드와 스웨덴으로부터, 피자와 파스타는 이탈리아에서, 프렌치 프라이는 벨기에로부터 건너온 것이지만 미국의 맛과 오리지날의 맛에는 차이가 있다. 그걸 사람들은 Americanized라 표현한다. 알고보면 미국 본토에서 태어난 음식도 꽤 있다. 버팔로 윙, 브라우니, 뉴잉글랜드의 클램 챠우더와 랍스터 샌드위치, 텍사스 바비큐, 루이지애나의 케이준…

또다른 ESL선생님이었던 샤를린은 요리하기를 좋아해서 가끔 점심과 저녁, 두 번에 걸쳐 음식을 해먹는다. 주변엔 한 번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데 자신은 별나다며 웃었다. 나는 John할아버지한테 배운 바가 있어서 샤를린의 말을 잘 이해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 말이 내게 문화충격을 주었다. 20여년 전 한국에서는 하루에 두 번 요리하는 것이 전혀 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혼 때, 나는 출근을 하면서도 남편에게 밥과 반찬을 차려주었다. 결혼 전에는 겨우 일어나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허겁지겁 뛰쳐나가던 내가 7시까지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인 탓에 직장에서 꾸벅꾸벅 졸았고 그런 새색시에게 밤송이 같은 농담은 재미삼아 툭툭 던져졌다. 퇴근 후 수영장에 다니던 일상은 저녁을 요리하는 일상으로 바뀌었다.전업주부에 유학생 와이프가 된 이후엔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 뿐 아니라 도시락 두 개를 싸서 학교에 보내는 큰아들 엄마의 일상이 되었다. 체력이 저질인지라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면 오전중엔 에너지가 바닥이 났다. 그런 한국적인 나의 일과가 미국주부들의 삶에 투영되자 갑자기 혼란이 찾아왔다. 왜 한국주부들은 한국주부처럼 살까? 세상엔 다른 방식으로도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