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지 1년

1년 전 밤, 델레스 공항에 도착해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눈 뜨자마자 하늘을 바라봤지. 하늘에서 말갛고 말갛고… 그립고 정겹고 청량한 풍미가 났다. 눈가에 겹솔잎이 자글자글 피도록 정신없이 웃었다.

매일 아침 창문을 거침없이 열어제끼는 일상이 복구됐다. 고것만으로도 삶에 기쁨이 감돌았다. 아마도 8개월까지는 늘 하늘에 대고 고맙고 반갑고 기쁜 감정을 고백했던 것 같다. 내가 봐도 내가 신기했다. 어떻게 지치지도 않고 하늘바라기를 하며 매순간 그 벅참을 느끼는지? 8개월이 지난 후엔 약간 무뎌졌다. 가족을 보듯 덤덤하게 인사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여전히 크게 좋아하고 고마웠다. 1년이 된 오늘, 그 하늘은 이제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요즈음은 춥고 흐린 날이 많아서인지 해가 나면 해가 더 반갑다. 그래도 2019년을 마무리하면서 가장 감사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맑은 공기보다 더한 것을 찾을 순 없다.

2019년의 메릴랜드(DC와 VA포함)는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내가 적립해 놓은 ‘미국의 이미지’를 휘리릭 바꾸어 놓았다.

길가다 마주치는 사람과 눈을 맞추며 하이, 하고 인사하는 관습,

왕복 2차선인 곳에서 좌회전 차량을 위해 반대편 직진 차량이 양보하는 미풍,

차선을 이리저리 바꾸지 않고 한 레인에 머무는 진득함,

타인을 위해 출입문을 꼭 잡고 기다리는 인내심,

넓은 땅답게 복잡하지 않은 공공주차장(몇몇 대도시를 제외하고 말이다),

보행자 우선,

걸어서는 닿을 수 없는 상업지구…

메릴랜드는 위에 열거한 전반적인 모습이 미국보다 차라리 한국과 닮았다.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미국이 변한 것인가? 메릴랜드가 다른 것인가? 사실은 둘 다겠지. 한국도 변하는데 미국도 당연히 변하겠고 주마다 다른 풍습과 문화를 가졌다는 사실은 상식이고... 어쩌면 미국에 대한 나의 그 ‘멋진 이미지’는 ‘보스톤 이미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7년동안 살면서 굳혀진 이미지. 메릴랜드 주민이 된 이후 나는 알게 되었다. 사실은 미국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보스톤을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그러다가 지난달, 보스톤에서 날라온 설국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왜 굳이 좋은 친구들이 있는 보스톤으로 돌아가지 않았는지를 떠올렸다. 그 시간 메릴랜드에서는 아직 듬성듬성 붙어있는 단풍잎이 가을 햇살을 받아 오렌지빛을 내뿜고 있었다. 문득 메릴랜드 역시 좋은 곳이란 느낌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무엇보다 1년 내내 미세먼지 따위 걱정없이 편안한 숨을 쉬게 해주지 않았던가. 겨울은 1,2월 두 달만 견디면 되고, 봄에는 갖가지 어여쁘고 진귀한 꽃이 세상천지에 만발해서 황홀했고, 여름은 온통 진초록, 바닷물에 주저없이 뛰어들만큼 화끈하고, 가을엔 동네단풍이 오래도록 예뻐서 산책길에 눈과 마음이 순해지는… 그래서 깨달았다, 이제 메릴랜드에도 정이 들었군요…

10학년 2학기에 전학 온 막내는 힘들지만 힘차게 살아간다. 공교롭게도 언니는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막내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왔다. 입시를 앞둔 시점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사는 것이 우리집 전통이 되버렸다. 단, 언니는 한국학교에서 입시와 상관없는 시간을 보냈으나 막내는 미국학교에서 현실에 부딪혀 수험생 모드로 살아간다. 메릴랜드에서 고교졸업장을 받기 위해선 졸업 전까지 US history와 government 과목을 들어야 해서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 11학년에 다른 친구들보다 한 과목을 더 듣기까지 한다. 처음엔 친구가 없어서 낯설어 하더니 이젠 그런 걸 투덜댈 여유가 없단다. 그래도 생일파티에 초대도 받고 친구한테 선물도 받아온다. 그럴 때 나는 제일 기쁘다. 속으로 다행이다, 한다. 

막내는 한국학교에서 먹던 점심을 많이 그리워했다. 점심만큼은 한국학교의 완승이다. 막 지은 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과 영양소를 고루 갖춘 여러 찬. 한국학교는 무상이니(참고: 지역별로 다르다) 정말 고마운 혜택이다. 막내는 지금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다. 사실 점심을 싸주게 된 계기는 첫날 같이 먹을 친구가 없다며 굶고 왔기 때문이었다. 안쓰럽기도 했지만 자라나는 청소년이 끼니를 굶는다니 큰일날 소리다. 다음 날은 꼭 사 먹으라고 신신당부에 협박도 했건만 여전히 굶고 와서 세째날부터 당장 도시락을 싸주기 시작했다. 미국에 올 때 밥지을 각오는 했지만 도시락을 싸게 될 줄은 몰랐다. 막내는 원하는 클럽 오디션에서 떨어져 상심을 겪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무탈하고 고마운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온지 1년, 마침 연말이어서 한 해를 반추해 봤다. 뭐 커다란 성공이나 획기적인 발전은 없지만 맑은 공기, 사는 곳에 정붙이기, 아이가 학교에 잘 적응해 다니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창 남편의 사망이나 멋진 선배의 암투병과 죽음처럼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왔던 한 해였다. 뉴스에서는 강원 산불로 집을 잃은 할머니의 하나뿐인 바람이 산불이 나기 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전한다. 극히 불행을 느끼는 현재가 아니라면 실은 어제처럼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 수 있는 것도 커다란 행복이다. 특별히 감사할 일이나 행운 같은 거 하나도 없었다는 자조 대신 조금만 돌아보면 주변에 그런 것 투성이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이 한해를 무탈히 보낸 당신의 시간은 그 자체로 빛이 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평범한 우리 모두에게 전한다. Merry X-mas &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