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분에서 2인분으로 줄여 밥을 짓다

늘 해오던 식사준비를 4인분에서 3인분으로 줄여야 했을 때, 나는 당혹스럽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오랜 동안 손에 익은 4인 분량을 얼만큼 줄여야 3인분이 될 지 모르겠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자꾸 큰 아이의 부재가 각인됐기 때문이다. 큰아이 대학 갔을 때 일이다. 약 2주 전부터는 3인분에서 2인분으로 줄여 밥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에 떠난 사람은 남편이다.

문득 언젠가 2인분에서 1인분으로 줄여야 할 때도 오겠지?란 생각을 하자 마음이 이상했다. 그런 날이 근시일 내에 올 수도, 먼 훗날 올 수도, 혹은 내가 먼저 죽으면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다수의 우리가 혼자 남는 때를 맞이할 테고 그때는 줄어든 1인분이 단순한 1인분 이상의 의미가 될 것이다. 1인분은 버거운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맞바뀌겠지… 그것에 비하면 4인분에서 3인분에서 2인분으로 줄어드는 과정은 (핵가족 사회에서) 당연하고 평범한 인생사다.

3인분에서 2인분으로 줄어든 이번엔 말이다, 고백하자면 별로 당혹스럽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남편이 떠났는데도, 이별의 순간 만큼은 짠했지만, 마음에 큰 동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은근히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지난 1년을 참 잘못 보낸 결과였고 우리에겐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던 참이었다. 즉 이번에 3인분에서 2인분으로 바뀐 식사는 홀가분 혹은 평온이란 의미를 가진다.

남편이 나누어 해오던 일까지 몽땅 혼자 감당하자니 몸에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다툼이 없으니 마음에 화평을 느낀다. 그 뿐 아니다. 침대 한가운데서 대자로 뻗어서 자며 넓네~, 세면기와 변기가 쉬 더러워지지 않아서 좋네~, 좁은 집은 적당하게 살만하네~… 로 바뀌기도 했다. 솔직히 조금 물러나 앉아 우리 부부가 함께 해온 24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관조해 보면 약간 의아한 행보다. 23년동안은 제법 알콩달콩 살았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사이는 관계를 어찌 맺으며 살아가느냐가 참말로 중요하다. 부부니까, 부모니까… 그런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 진짜 핵심은 서로 간에 ‘관계 맺음’이다. 나는 우리 부부에게도 서로 이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오는구나, 약간 놀라고 서글프고 인내하고 반복되는 시간을 버티다가 남편을 보냈다.

그렇다면 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미 예상했겠지만 답은 뻔하다. 이것은 레알 권태기!

권태기의 부부란 이런 것인가 보다. 아내는 남편이 예쁘지 않고 남편은 아내가 예쁘지 않다. 함께 있어봤자 재미도 없고 싸움의 빈도만 늘게 된다.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서 매듭을 풀려는 스타일과 까딱하면 토라져 입을 함구하는 성격은 서로에게 독이 된다. 한사람은 답답해 가슴이 폭파되고 한사람은 시끄러워서 귀를 막고 싶다. 결국 말없이 불통하면서 살아가는 부부는 차라리 혼자 있을 때 숨통이 트인다. 20여 년 이상 피식거리며 웃고 넘기던 상대의 단점이 너무 거슬려서 결혼생활 자체가 불행의 씨앗처럼 느껴진다. 가끔씩 이혼을 하면 어떨까,란 상상을 해본다… 뭐 심각하게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극단적인 예를 들면 그런 지경도 한 두 번 경험을 해봤다는 말이다.

이런 권태기는 처음이다. 길어봤자 싸운 후 며칠 미운 생각이 들다가도 스르륵 풀어져 애틋한 반쪽이라는 믿음에 변함이 없었는데 이번엔 거의 몇 개월 동안 부동의 권태로움이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난생 처음 묘한 경험을 한다. 덕분에 수많은 여인들을 이해하는 뜻 깊은 계기도 되었다. 밥사주는... 의 정해인, BTS, 양준일... 등의 덕후가 되는 여인들 말이다. 나는 그쪽으로는 많이 둔해서 그동안 비록 남편이 멋지다고 생각하진 않지만(대신 착한가?^^) 남의 남자 또한 멋진 줄 모르고 살았는데 야릇하게 타남자들이 근사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라? 뭐지, 이런 감정?? 나는 요즈음 드라마에서 혹은 다큐에서 성숙하고 의연하고 생각과 마음이 깊고 큰 캐릭터의 남자를 보면 자꾸 멋져서 심쿵하고 만다.

이거이 권태기, 레알 권태기!! 어쨌거나 남편은 직장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고 기러기생활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함께 있으면서 싸우느니 잠시 떨어져 살면서 서로에 대한 의미를 새로이 정립해 볼 좋은 기회다. 중요한 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행복한 것이어야 한다. 내 인생의 최종 행복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남편과 손잡고 사이 좋게 산책 다니는 삶이다. 그를 위한 일보 후퇴, 어쩌면 이 권태기는 그런 시간일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