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에게 바치는 글

내겐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일상이 있다. 온라인으로 하는 영어독서모임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 정해진 시간에 컴퓨터 앞에서 영어책을 읽는다. 이것이 나로서는 극기, 즉 나를 이겨내는 도전이었다. 나는 영어문장 읽기를 너무도 싫어해서 ESL학교 말고는 되도록이면 안 읽는 자세로 미국에서 살아왔다. 영어로 된 문장을 읽고자 하면 일단 속도가 더디고,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내용에 백프로 확신이 안 들고, 행간읽기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그러므로 답답함이 지나쳐 속이 뒤집히는 현상이 일어난다. 미국에서 이렇게 살면 아이들 학교에서 안내문이 배포될 때 곤란하다. 읽어야 하는데 못 읽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이 없으면 잇몸 작전이다. 남편이 읽거나 이런 나를 잘 아는 학부모 친구가 친절을 베풀거나 아이들이 알아서 한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으니 학교 통신문을 읽으려는 목적으로 영어책 읽기를 시작한 건 아니고, 어쩌다보니 선물로 받은 영어서적을 완독하게 되었는데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공도서관에 수두룩한 영어책을 놔두고 한국책 찾아 삼만리 하는 건 과거로 충분하다는 자각도 있었다. 그 즈음에 나는 이제 스스로를 위하며 살아보자는 결심을 했고 그러자 먼저 ‘시간’에 대한 관념이 떠올랐다. 나는 시간을 참 중히 여기는데 지금까지는 늘 식구들을 위해 내 시간을 열어놓고 살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 시간을 항상 대체품으로 여기고 남편의 스케줄에 혹은 아이들 스케줄에 필요하면 내 것을 기꺼이 희생했다. 그 마음가짐부터 바꿀 필요가 있었다. 독서클럽에 가입 후 나는 그 절대시간을 양보하지 않았다. 별것은 아니지만 나를 위한 삶의 작은 실천이 그렇게 시작됐다.

열 달 동안 열심히 읽었다. 단어실력이 모자라 전문성을 띠거나 어려운 문장은 영락없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어떤 책을 읽었다는 감회안에는 글내용을 잘 이해하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도 파악 혹은 나름 짐작하고, 그 의미를 내 삶 혹은 세상사에 적용해서 새로운 깨달음도 얻고… 그런 나름의 독서철학이 있는데 그래서 영어책 읽기는 의도치 않은 고행을 안겨줬다. 내용을 다 이해하기 위해 모르는 단어를 찾아 문장이 해석될 때까지 붙잡고 복습을 하다 보면 하루가 쫓기듯 지나가는 것이다. 게다가 새 단어는 왜 찾아도 찾아도 계속 새 단어로 남아있는지?

만삭을 넘긴 시간동안 꽤 많은 책을 읽어제쳤지만, 회화는 여전히 못한다. 듣기는 조금 나아진 것 같고 읽기는 꽤 좋아졌다^^ 지금은 영어로 된 문장을 읽을 때 속이 뒤틀리거나 답답한 현상이 많이 없어졌다. 모든 것은 시간의 투자 맞다. 자신에게 어떤 시간을 투자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모습과 삶이 달라지는 결과를 보면 앞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동기부여를 얻는다.

지금 나는 단순히 영어책을 좀 읽었더니 영어읽기가 나아졌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가족으로부터 내 시간을 지키고자 했던 일련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현재 뿔뿔이 흩어져 지구상 세 지역의 주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영향으로 11학년인 막내는 두 달전부터 집에 머물고, 큰 아이는 일주에 두 번 출근, 나머지 재택근무를 하고, 남편의 시간도 널널해 졌다.

먼저 밝히자면, 책에 관해서 우리집은 두 부류로 나뉜다. 나와 큰 애는 독서파, 남편과 막내는 비독서파. 책을 읽는 습관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양서를 통해 세상을 넓고 깊게 보고, 생각을 크고 깊게 할 기회를 가진다. 책을 안 읽어도 물론 그럴 수 있다. 허나 좋은 책을 읽으면 더 보탬이 된다. 그걸 잘 아는 나는 비독서파인 식구들에게 책읽기를 자꾸 권해보지만 쉽지 않다. 보다 못한 나는 코로나가 울 식구들의 시간을 늘어지게 한 4월 초에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 가족독서모임 해볼까욤??” 기대하지 않았건만 어인 일로 다들 찬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존스타인 백의 분노의 포도를 함께 읽고 있다. 독서 시작 전이나 후, 각자 지냈던 일상을 나누고 책 내용에 대한 소회도 말하면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그나마 회합의 시간을 가진다. 책을 관통한 성숙한 꿰뚫음도 있고 단면을 보는 미숙함도 있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도 느낀다. 무엇보다 다들 그 시간을 좋아한다. 감사한 일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나를 위해 투자한 시간이 가족 차원의 혜택으로 이어졌다. 지난 여름부터 영어읽기를 연습해오지 않았다면 (내 실력에) 아무리 가족이라도 (애들은 원어민이므로) 함께 영문학책을 읽을 순 없었을텐데… 비독서파 식구들이 고전문학을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을 기회를 얻지 못했을텐데… 무엇보다 떨어져 사는 네 식구가 일주일에 너댓번 깊은 대화를 목적으로 만나는 일은 힘들었을텐데… 독서토론을 한다고 돈이, 쌀이 나오지는 않지만 관계에 있어 정신적 교류를 최상으로 여기는 나한테는 이보다 큰 수확이 없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무조건 희생만 능사가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여자의 생애상 사회구조상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자신의 꿈, 바람, 삶을 제치고 가족을 우선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자기발전을 위한 도전은 가족 때문에 주저할 일도, 나중으로 미룰 일도 아닐지 모르겠다. 엄마의 성장은 훗날 어떻게든 가족을 위해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