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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의 이야기

호박죽 끓이다가 Yunah Kim (kyeonah) 2021-5-31  15:41:57



호박죽 끓이다가

 

 


단호박을 씻어서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호박살이 부드럽게 익을 무렵 특유의 달큰하고 구수한 포자가 공기중에 날개를 단다. 무딘 칼을 준비한다. 칼날이 씨알도 안 먹히게 단단했던 껍질은 나긋나긋 해져서 그 부드러운 배를 갈라 씨를 걷어내고 주황살을 듬뿍듬뿍 발라내어 블렌더에 넣고 물을 부어 원하는 텍스쳐가 될 때까지 돌린다. 나는 도르륵 도르륵 작은 알갱이가 끼어 있는 질감을 좋아해서 너무 곱지 않게 간다. 유리 블렌더에는 곧 선명하고 포근한 호박물이 가득 찬다. 걸쭉하고 맛깔스런 호박물을 냄비에 부어 끓이면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설탕으로 감칠맛을 돋우면 세상 맛난 호박죽은 축복속에 완성된다. 되직하게 농도를 맞추면 찹쌀물이나 녹말물을 섞지 않아도 좋다. 그 안에 미리 삶아 둔 팥을 넣어 한소끔 더 끓이면 화룡점정팥과 어우러진 호박죽은 인생에 있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팥은 씻어서 물을 넉넉히 붓고 양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여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팥내가 나는데 그 상태로 뚜껑을 덮어 한동안 두면 조금 서걱대던 팥이 말랑해진다.

 

단호박죽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워서 나는 까딱하면 끓인다. 손님이 오실 때 준비해 놓으면 다들 화들짝 환영이다. 내겐 일상처럼 별스러울 것 없는 호박죽 끓이기는 요즈음 조금 특별한 시간으로 변했다. 호박죽이 눌지 않게 휘휘 저으면서 언니를 떠올린다. 오래 전에 이웃으로 살았던 언니 부부가 멀리서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런저런 먹거리 속에 호박죽을 끼워 대접했다. 언니가 버들가지처럼 낭창하게 웃으며 내뻗던 손끝과 마주친 선한 눈빛, 아마도 그 순간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후부터 호박죽을 끓일 때면 언니가 떠오르곤 했는데 이제 나는 그 행위가 혼란스럽고 슬프다. 언니는 호박죽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헤어지면서 따뜻한 포옹을 했으며 그때 단단하게 맞닿았던 어깨에 다시는 닿을 수 없게 되었고 더이상 맛있는 호박죽을 대접할 수 없게 되었다. 언니의 발병과 투병과 죽음… 1년 조금 넘긴 시간속에 이런 생의 변환은 이상하게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멀쩡했던 사람이그래서일 것이다. 호박죽을 좋아했던 수많은 사람속에서 언니의 호박죽이 단단하게 내 머리에 박혀버린 것은


그리고 어떤 근본적인 이유가 계속 호박죽을 끓일 때마다 언니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나를 거듭 슬프게 만들었다.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 근본적인 이유다.


사실 언니의 남편과 내 남편이 직장 동료였고 언니의 딸과 내 딸이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하지 못했다. 남편과 자식이 친구면 너도 꼭 친해야 해? 라고 묻는다면 우리집에서 호박죽을 먹은 날, 나는 본연의 나로 돌아와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충족으로 행복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 기뻤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친해지지 못했던 원인이 내게 있었고 은연중 죄책감이 감정선을 건드린다는 사실을친해지지 못했던 이유가 언니에게 있었다면 언니의 소천소식에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안쓰럽고 안됐다는 마음으로 한동안 고인의 명복을 빌다가 조금씩 잊겠지시간이 흐를수록 죄스럽거나 슬프거나 안타깝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있을 때 잘 해야 한다. 부모님도 살아 계실 때, 남편, 아내, 자식도 곁에 있을 때, 친구와 지인도 함께 어울릴 때모르는 타인이라도 도움을 필요로 할 때그들에게 마음을 열어 최선을 다해야 훗날 후회가 없다.

살다 보면 깨닫는다. 배신을 하기 보다 당하는 편이, 때리기 보다 맞는 것이, 사기를 치느니 손해를 보는 쪽이 낫다. 당장은 힘들지만 다리도 뻗고 자고 영원히 마음에 검은 얼룩이 남지 않는다. 뻔히 알고 있는데도 살면서 때때로 놓치고 마는 진리... 

 

언니가 있을 때 더 내 시간을 내어주고 이야기도 잘 들어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나는 호박죽을 끓일 때마다 언니를 떠올리며 살아갈 것 같다. 그렇게라도 내 마음에 언니를 두면 이 미안함이 씻겨질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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