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 온 딸아이

방학을 이용해 큰아이가 왔다. 식탁 네 자리에 다시 네 개의 매트가 깔렸다. 차를 타도 네 개의 좌석이 차고 영화표나 입장권은 네 장씩 끊고… 넷이서 빙수를 먹고 넷이서 산책을 하고 넷이서 한국드라마를 보고… 그러다 보니 실감이 났다. 아, 우리 가족이 본디 네 명이었지…

확실히 넷은 셋보다 풍성하고 꽉 찬 숫자다. 하지만 우리집에서 셋이 됐다 넷이 되었다 하는 과정에는 나름의 고충이 있다.

두 아이지만 터울이 꽤 지다 보니 큰 아이가 대학에 간 해부터 우리는 7년동안 세식구처럼 지내왔다. 막내는 자신이 외동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언니를 그리워하는 푸념이다. 대학을 가면 독립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지만 새삼 너무 일찍 독립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함께 사는 기간이 겨우 18년이라니… 게다가 사는 나라가 다르면 일년에 한 번 만나기도 녹록치 않다. 그러다 보니 점점 혼자 사는 세월이 길어진 큰아이는 오랜만에 만날 때면 편하고 적합화 된 제 생활방식과 가족의 생활패턴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것 같다.

부모는 A란 방식으로 살고 있어서 어릴 때 A란 방식으로 길들여졌지만 세상에 나가보니 B부터 Z까지의 방식이 존재하고 A보다 끌리고 편하고 재미있는 방식을 발견하여, 어느 샌가 제 방식대로 사는데 익숙해졌는데 집에 오면 A란 방식이 떡,하고 버티고 있으니 시차도 적응해야 하는데 관성의 법칙도 느끼고 회귀본능도 스멀대고… 혼란과 괴리감이 당연히 생기겠다.

이것은 단지 독립한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떨어져 살던 부부가 함께 살기 시작할 때, 혹은 직장생활로 바쁘던 남편이 퇴직해 집에서 내내 부인과 지내게 되면 갈등이 시작되는 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다투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거기엔 반드시 한 쪽의 인내가 마련돼 있다. 이 인내는 희생일 수도 있고 동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동화는 최상의 결과물이지만 희생은 예기치 않은 후폭풍을 불러올 소지가 있고 혹은 누군가의 생명을 갉아먹기도 한다. 혹은 관계의 소원함을 초래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헤매기 쉬운 인생의 미로다.

어쩌다 보니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몸에 익힌 가족 구성원의 재합체(reunion)에는 두 가지 패턴의 관계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1) 잠정적인 평화냐, 2) 회귀를 위한 적극적인 투쟁이냐. 잠정적인 평화는 임시방편으로는 좋지만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점점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표면적인 평화덕에 가늘지만 길게 유지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회귀를 위한 투쟁을 시도하는 편이다. 표면적으로만 유지되는 얕은 관계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툼이 일더라도 그때그때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히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더 달라지거나 멀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투쟁의 시작은 어찌 하는가? 그것은 정말 해야 할 ‘한마디’를 하면서부터 출발한다. 시시콜콜한 취향을 들이대면 안 된다. 이성이 있는 한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명명백백한 진리의 문제여야 가치가 있다. 진심으로 사랑을 담아 너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위해 이렇게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 한다. 어떨 땐 왜 그렇게 변화했는지 화가 나서 미리 목소리의 톤이 커져 있기도 하다. 큰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과 말투로 대응한다. 싸움을 싫어하는 아이는 잠시 맞추는 척 하다가 다시 혼자가 되면 제 방식으로 귀환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다시 만났을 때 또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알아주리라 생각하고 엄마표 진리를 이야기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너를 위해서임을 알 때까지…

그런 잔소리? 아니 굵은 소리는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요즈음 나는 힘이 없다. 만사가 귀찮고 재미도 못 느끼고 신나는 것도 없고… 나이 탓인가 보다. 그래서 이번 합체시에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자,고 미리부터 마음을 먹었다. 그랬건만… 아이가 변해왔다(아이들은 변하고 또 변하는가 보다). 나이를 먹으면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언지 깨닫는 것 같고 엄마 말에 수긍이 쉬워졌다. 어쩌면 그간의 노력이 효력을 발생하는가? 세월이 흐르면서 엄마는 이래저래 힘이 빠지고 아이는 생각하는 힘을 얻고… 만사 귀찮다 했더니 세상살이는 그렇게 맞춰지기도 하나보다. 때가 말이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도 필요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