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보스턴에 모이다

지구촌의 세 군데 땅에서 제각기 살아가는 우리집 네 식구는 11월의 어느 날, 보스턴의 모 호텔에 모였다. 코로나 때문에 몇 차례 미루었던 비행기표 사용기한이 얼마 안 남은 차에, 남편이 미국 갈 일이 생겼고 때마침 추수감사절 연휴인 덕에 옳다구나 네 식구는 고향의 땅 보스턴에서 랑데부를 도모했다.

미국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자느라 비행기를 놓친 막내가 하루 늦게 조인한다는 소식과 큰 아이가 방학을 이용해 친구 결혼식이 열리는 이집트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반가움만 가득했던 가슴에 한숨이 부풀어 올라 내장이 쪼그라든다. 역시 사람은 잘 안 변한다. 한번 잠에 들었다 하면 알람 소리를 못 듣는 막내와 한국에서 미국 프롬파티를 참가한 전력도 있는 큰 애의 천품은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었다. 그런 기질때문에 내 마음에서는 가끔, 제 인생이 달렸는데 알아서 잘 하겠지,와 정말 잘 하고 있으려나,가 싸우기도 하는데 늘 이성의 힘으로 믿음에 힘을 싣지만 막상 이런 일을 맞닥뜨리면 불안이 승리의 깃발을 움켜쥐는 것이다. 스텝준비도 해야 하는데 가능한 일정이니? 물으면 가능하다니 할 말도 없고 목표지향적으로 자라지 않은 건 가풍 때문이란 생각에 할말도 없다. 우선은 반대를 했지만, 시간을 쪼개 친구 결혼식에 가는 의리를 왜?,란 생각 반, 다 큰 성인을 어쩌랴,는 생각 반으로 결국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 에세이 쓰고 늦게 자서 알람을 못 들었다는데, 인간은 어차피 실수의 동물인걸… 하며 애써 생각을 전환하여 실랑이 따위는 접고, 기껍게 추억여행을 시작한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 갔을 때는 우리 마음대로 드나들던 현(現) 타인의 대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아이들 살갗을 태웠던 수영장에선 함께 놀던 친구들의 소식을 교환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다녔던 교회에 가서는 걸려있는 교인들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으며 교회의 번영과 모두의 행복을 기원하고, 아이들은 모교에서 작아진 놀이기구를 뒤뚱대며 오르내리고… 반가워서 슬쩍 눈시울을 붉히거나 웃거나 소리를 지르며 네 사람은 10여년도 더 된 기억속을 뛰어다니면서 현재를 여행했다.

이상한 것은 기억과 추억이 별개란 사실이었다. 뻔질나게 데려다 주고 걸어 다녔으면서도 애들 학교의 너른 풀밭 뒤편에 펼쳐진 환상의 자작나무숲을 처음 발견하고,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여겼던 장소들은 서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엄청 넓다고 생각했던 지인의 집은 아담했고 삐까번쩍 하다고 여긴 곳곳이 고즈넉하게 느껴졌는데 이 모든 현상은 기억의 왜곡이라기 보다 지난 10여년 동안 내 경험이 커진 때문에 발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 속 장소는 추억속의 나를 불러와야 제대로 매치가 될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기 때문에 주택들은 다 대궐로 보였을 것이고, 어디에 가던 흐드러진 자연이 있어 학교의 자작나무 숲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태 길치는 모든 장소를 각각 떨어뜨려 인식하다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어진 행보를 거듭한 후에야 새롭게 위치를 연결했다. 추억속의 나는 순박하고 어리숙하고 띨띨하고 순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했다. 그것은 추억의 장소를 여행할 때마다 밀려드는 그리움과 포근함이 그 사실을 입증했다. 남편도 딸들도 입으로 눈으로 그 사실을 발설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 시절, 우린 지금보다 덜 세련되고 덜 여유롭고 세상사를 잘 알지 못했지만 행복했다.

왜일까? 나는 왜 그때가 더 행복했다고 느끼는 걸까?

더 젊어서? 넷이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살아서? 더 파란 하늘 아래라서? 경제관념이 더 없어서? 울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공기가 맑아서? 보스턴의 문물은 세련되고 사방이 아름다워서? 그런 가운데 자연은 흐드러져서? 더 희망찬 꿈에 부풀어서? 노후와 죽음 따위는 생각지 않고 살아서?

놀랍게도 이 모든 사실은 전부 이유가 됐다. 하나를 덧붙인다면 나의 사고방식과 유사한 사람들이 많아서,도 있겠다.

원래 추억은 부드럽고 환한 거지만, 더 여유롭거나 더 세상을 잘 알고 처신하게 됐다고 더 행복한 건 아니라는 사실도 입증됐다. 행복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누리며 살 때 느끼는 정신의 세계인 것이다.

젊은 시절 사는 게 힘들어서 세월이 빨리 가길 고대했던 해나 할머님이 계셨다. 어르신은 3-job을 뛰면서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고대했는데 자식들이 커서 제 몫을 하며 살아가면 좀 쉬고 싶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자식이 잘 장성해서 할머님은 손주들을 돌보며 식구들 밥을 해주는 노년의 한가지 삶을 진심으로 즐기셨다.

해나 할머님은 원하는 걸 누리므로 행복하신 것이다. 노년에 내 삶을 즐기는 것과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은 다른 행보지만 양쪽 다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세월이 더디게 가는 것과 빨리 가길 바라는 현상은 정반대지만 각각의 사람에게 다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즉 행복의 기준은 개성만큼이나 서로 다를 수 있다.

보스턴에 모인 네 사람은 모두 그 시절을 행복하게 추억했다. 나는 많이 감사했는데, 풍족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