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집

보온병을 홀더에 꽂고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주파수를 맞추면 이제 한 시간 동안 달릴 준비가 완료되요. 출발과 동시에 제 마음에는 두가지 꽃이 피어납니다. 기쁨과 감사가 매달린 꽃… 아버지를 뵙는 기쁨과 언제든 아버지께로 달릴 수 있는 제 차가 있어서, 한달에 한 두 번이지만 새록새록 감사가 솟지요. 대중교통으로 닿기 힘든 곳이라 더 그렇고 제가 아버지 집을 많이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아버지 집은 늘 쾌적한 기온과 향긋 알싸한 꽃향이 번지고 잔잔한 음악이 흘러요. 벽면의 반을 채운 창으로 하늘과 산자락이 들어와 환하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요. 아버지 집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것들로 꽉 차 있지요. 가족사진, 약주와 커피와 상다리가 휘어지는 잔칫상, 아버지가 30년 근속으로 받으신 감사메달도 있고 자주 하시던 운동기구까지… 하늘나라에서 아버지가 이 모든 것과 함께 티 한 점 없이 행복하시길 기원하는 우리의 마음도…

아버지 집 옆엔 다정한 이웃들이 계시죠. 덕분에 아버지가 외롭지 않으실 듯해서 마음이 놓여요. 제가 가면 모두 따스한 품으로 맞아주는 것만 봐도 아버지께 얼마나 다정한 이웃일까, 짐작할 수 있답니다. 아버지가 재활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무좀치료 때문에 일주에 한번씩 피부과에 다닌 적이 있잖아요. 그때 아버지는 입원실 식구들을 위해 간식을 챙겼는데 그게 큰 즐거움이신 게 느껴졌죠.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힘들던 시절이라 모두들 답답하셨을 테니, 외래를 다니는 아버지가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게 느껴졌어요. 저는 신나게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먹거리를 챙겼지요. 아버지가 산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특별히 맛난 걸 준비한 날엔 입술을 크게 열어 ‘사람들이 횡재하는구먼’, 고마움을 그리 표현하시기도 했고요. 전 그런 아버지가 참 좋았어요. 속 깊은 정 뿐 아니라 위트 만땅인 아버지… 아버지가 퇴원하실 때 복도로 따라 나오며 아쉬워하던 입원실 이웃을 떠나 이젠 새로운 이웃과 정을 나누고 계시는 우리 아버지…

이곳에서 아버지는 특별한 이웃들과 함께 지내고 계시죠. 성별이 다른 분도 있고 병원이라면 소아과에 입원했을 친구들도 있고요. 가끔 어린 친구들의 부모를 봐요. 조용히 흐느끼면서 저처럼 오래 머물다 가는 사람들… 제가 아버지께서 좋아할 만한 책을 함께 읽고 있을 때, 어린 친구의 부모는 아이가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고 오려 붙이면서 아이와 함께 머물다 떠나기도 해요. 어떤 어머님은 두 시간도 넘게 울면서 보고싶다는 말을 날숨과 함께 내뱉기도 하시고요. 그럴 때면 숨을 죽이고 고개 숙여 조의를 표하면서 조용히 저도 눈물을 흘려요. 우리는 같은 색의 눈물을 흘려요. 죽음이 갈라놓아 함께 하지 못하는 허망함에 그리움이 녹아 든 눈물요. 그 맛은 여전히 짜고 그 맛은 에려요. 그 맛은 진하고 그 맛은 여운을 남기죠. 그 맛엔 사랑이 담겼어요. 다른 게 아니에요. 살아생전 못했다는 자책이나 후회가 아니라 그냥 사랑이에요. 어떤 이들은 자식과 부모의 상실을 다르다고 구분 짓지만 사랑은 그렇게 틀에 갇힌 게 아니에요. 사랑은 말로 하기보다는 느낌이고요, 사랑은 늘 마음그릇에 담기는 거고요.

그곳에서 그렇게 사랑 가득한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 집을 더 좋아하게 된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에서 죽음이 동떨어져 있지 않은 사실도 직시하고요. 다소 길거나 짧거나 하지만 생의 끝은 늘 죽음으로 마무리 되잖아요. 누구도 예외 없이요.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지만 이를 모른 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는 게 우리네 인생임을 새삼 반추하고요.

생 1939년…, 졸 2022년…

2022년이 이제 몇 시간이면 저물어요. 2022년은 제 생애 54년 동안 건재했던 아버지의 존재가 사라진 커다란 결핍의 해이기도 하지만 제게 죽음은 그냥 생의 일부라는 신성한 가르침을 준 해이기도 하지요. 죽음에 대해 좀 담담 해졌고요. 2022년의 새해결심은 사랑받은 분들께 사랑을 드리자,였는데, 나름 노력했지만 어땠을 지 모르겠네요. 많이 부족했겠지만 노력을 안 한 것보다는 나았다고 생각해요.

2023년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내지 말자로 정합니다. 죽음의 득의는 삶을 진정하게 맞이해 영위할 힘을 부여하는 것… ‘너는 원래 그리 살잖냐…’ 아버지가 말씀하시네요. 네, 본디 제가 욕심을 좀 안 부리지요. 한순간 한순간 최선을 다해 살 되, 2023년에는 더 욕심을 버리는 한 해로 살아볼게요. 아버지, 그립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