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는 맛

새벽 4시,

출발할 때 예측한 시간은 소용이 없었다. 전날 가늠해 본 소요시간도 맞지 않았다. 매해 다를 터이고 실제 달려봐야 걸리는 시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월 1일 새해 해맞이를 위해 동해로 떠난다면 말이다.

도로를 달릴 때 차가 좀 많다 싶으면 남편이 하는 말이 있다. 다 **으로 가나 봐! 여기서 **은 늘 우리의 목적지가 된다. 처음엔 단순한 발상의 극치에 피식거렸지만 요즈음 나는 그런가벼, 라고 대꾸한다. 익숙해진 부부사이의 만담이다. 그런데 이번은 정말이다. 그 새벽에 그쪽 방향으로 뚫린 많고 많은 터널을 느리게 달리다 말다 하는 차들은 종착지가 하나일 거라고 예상할 밖에 없었다. 주차걱정도 꾸물댔다. 여유시간은 슬슬 빼먹은 곶감처럼 자취를 감추고 교통체증이 이어지는데 주차걱정이 꾸물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의 전환 뿐이긴 하겠다. ‘길가다 해 뜨면 해 보면 되지 뭐. 일출이 목적이지 강구항에 도착하는 게 목적은 아니잖아.’ 이것은 보통 내 입에서 나올 법한 대사인데 남편이 먼저 한다. 이 부부는… 점점 닮아간다. 뒤에서 막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가족… 모두 닮아간다.

사실은 무조건 마음의 여유를 부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매사 노력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결과엔 겸허히 미소를 짓지만 나쁜 결과에 대해서도 마음을 볶지 않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게 사람마음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온순해지고 초연해졌다. 실패에서는 교훈을 얻는 게 중요하다. 성공과 실패, 어느 쪽이든 다 성공일 수 있다, 교훈을 얻는다면 말이다. 이 새벽에는 앞으로 해맞이를 할 양이면 더 서두르거나 목적지 근처에서 숙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작년까지 좋은 일이 별로 없었다. 삼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르는 첫 해를 보면서 새해를 열면 한 해가 온통 밝은 날들로 들어찰 지 모른다는 자기암시에 끌려 인파가 엄청 몰릴 것으로 예상된 강원도 정동진을 피해 경북 영덕에 있는 강구항에 왔다. 하지만 영덕은 조금 특별한 이유로 붐볐다.

영덕은 대나무를 닮은 다리의 소유자라 하여 이름 지어진, 대게로 유명했고, 12월부터 4월까지 대게 철이었고, 한국에는 영덕 대게 맛을 아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니까…

7시 25분, 다행히 동트기 전에 강구항에 도착했고 달걀 흰자위 같은 안개를 뚫은 노른자 같은 해가 7시 40분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박수를 치면서 희망을 기원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만으로도 이미 좋은 일은 시작되고 있었다.

태양의 모습을 원껏 바라보다가 끝없이 늘어선 강구항의 대게 집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올 때처럼 거북이 걸음은 계속됐다.

야들야들한 대게 살과 싱싱한 굴, 초장에 버무린 오징어와 야채, 고구마 튀김… 갖가지 별미를 음미하는 동안 나는 또 한가지 맛을 음미한다. 한국 사는 맛. 세상 어디에도 찐 게야 있으나 내장을 넣고 볶아 게딱지에 얹어 나오는 밥과 함께 해물탕이나 게국지를 먹을 때 그 한국 사는 맛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정월의 찬기운을 떨쳐내는 감미롭고 칼칼하고 시원한 국물 맛이라… 말이 쉽지 감미롭고 칼칼하고 시원한 맛이 어찌 한 숟가락에서 난 단 말인가.

우리 애들은 말한다. 한국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다고. 그 중에 최고는 떡볶이라고. 보스턴에서 역이민을 꿈꾸는 지인은 말한다. 한국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다고. 그 중에 최고는 칼국수라고. 맛집의 떡볶이와 칼국수는 미쉐린 가이드와 대적한다. 미쉐린 가이드란 그것 먹으러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니… 요즈음엔 퓨전까지 합세하여 먹기 전까지 어떤 맛일지 모를 음식도 많아졌으나 영덕 대게, 초당 순두부, 춘천 닭갈비, 전주 비빔밥, 제주 오메기와 몸국, 부산 돼지국밥, 금산 어죽, 남원 추어탕, 고창의 풍천장어, 나주 곰탕, 전라도 갓김치…는 그냥이라도 한국에 올 만한 이유일 것이다.

새해 첫날, 동해의 첫 태양과 눈을 맞추고 영덕 대게로 한국 사는 맛을 음미하면서 2023년을 활짝 껴안는다. 부디 이 한 해여, 누구에게나 평온함으로 그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