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2 때 생긴 일

중 2때였다. 어느 하루, 담임께서 부르시더니 수업 끝나면 교무실로 내려와 업무를 도와 달라 하셨다. 평상시에 없던 일이라 조금 이상했지만, 또 그닥 이상한 일은 아니기에 그런갑다 하고 내려갔다.

선생님은 하잘 것 없이 좁은 네모 칸에 점 찍는 일을 시키시더니 자리를 뜨셨다. 몇 장에 걸친 출석부에 점 찍는 일을, 선생님도 할 일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시는구나 란 동지애를 일으키며, 정신없이 하고 있는데 선생님과 내 친구가 나타났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인사할 기회를 못 찾고 나는 종이에 점만 콕콕 찍어 댔다. 친구가 혼나기 시작했다. 선생님 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요지였고, 친구는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다고 읊조렸다. 나는 친구가 무안할까봐 출석부에 코를 박다시피 볼펜촉에만 시선을 고정하여 눌러대다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친구의 죄명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전교생이 시를 한 편씩 써내야 했는데, 친구는 시인의 작품을 베껴서 제출했다는 것이다.

친구가 떠나고 선생님은 볼펜 하나를 드시더니 내 옆에서 함께 점을 찍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점을 왜그리 엉터리로 찍냐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점들은 정중앙에 반듯하게 놓이는 반면 내 점들은 풀풀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후부터 심혈을 기울여 내 점들도 정중앙에 오롯하게 담기게 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점 찍기가 끝나자 선생님은 더 시킬 일이 없다 하셨고 교실로 돌아와보니 친구는 없었다. 나중에 자초지정을 들어보니 시를 쓰기도 싫고 못 쓰겠어서 언니의 조언대로 베꼈는데 선생님이 귀신같이 아셨다고 킬킬 웃었다.

사실은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게 다 무슨 시츄에이션일까, 궁리에 들긴 했었다. 선생님은 하필 친구 혼나는 시간에 내가 그 옆에 있도록 상황을 조정하셨고, 친구는 시인의 시를 베꼈다고 혼났다…?? 하지만 아무 것도 짚이는 것이 없어서 우연의 일치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 나는 영어반장 같은 걸 맡고 있었고 영어선생님인 담임과 교류가 많은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잡일을 시키기에 만만해서 도움을 청하셨을 수도 있고, 친구는 그냥 그런 죄목에 해당하여 우연하게 그 자리에 불려온 것이라는 시나리오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후, 정말 잊고 지냈다. 허나 내 뇌리는 그러지 않았던가 보다. 며칠 후 불현듯, 선생님의 의중이 파악되는 현타를 맞았다. 어쩌면 나도 시를 베꼈을 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신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허나 친구의 것처럼 여부 확인이 불가능하자, 타산지석의 훈육을 하신 거라는 추정이 펼쳐졌다. 나는 문예반이기도 해서 나름 한자성어를 섞어가며 조금 심혈을 기울여 기성세대풍으로 시를 써냈는데 그 한자성어가 의심을 일으켰을 거라는 확신이 명명백백하게 들었다.

이후 내 해마는 바빠졌다. 그때 내 표정은 어땠던가? 양심에 찔리거나 겁먹은 눈빛은 아니었겠지? 아마도 그 사건을 나와 연결 지을 수 없었던 고로, 분명 그런 류의 감정표출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선생님은 진위를 알고 싶으셨을 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선생님은 직접적으로 혼낼 생각은 없으셨고, 만약 나도 같은 죄를 지었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길 바라셨을 거라는 심증이 일었다.

잊었다고 생각한 그 일이 다시 뇌리를 휘저은 계기는? 당연히 있었다. 담임선생님과 음악선생님이 웃으면서 대화하고 있는 장면을 본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음악시간에 죄를 저지른 적이 있어서 음악선생님을 보면 얼굴을 감추고 도망 다니기 바빴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모범생 같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부도 숙제도 하고 싶은 것을 골라서 하고 선생님이 시켜도 내 기준에 온당치 않으면 따르지 않았다. 그런고로 시간마다 숙제검사 안 하기를 요행으로 바랐는데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벌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음악선생님이 너무너무 겁을 주면서 숙제검사를 시작하셨다. 숙제를 안 한 아이는 천하에 몹쓸 학생이고 된통 혼을 내주겠다… 뭐 그런 식으로 엄포를 놓으며 출발하셨다. 조금 겁을 먹은 나는 부랴부랴 멀리 앉은 내 친구에게 쪽지를 보내 숙제 공책을 빌렸다. 그리고 선생님이 검사 후 뒤로 가셨을 때 공책이 친구에게 건너갈 수 있도록 타이밍을 조절했다. 반 친구들의 협조로 공책이 무사히 주인에게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일어났다. 나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다른 아이가 같은 행위를 시도하다가 선생님께 걸린 것이다. 그 애들의 공책은 선생님 눈 앞에서 오고 갔다. 세상에… 어찌 안 걸릴 수 있겠는가.

처음에 선생님은 어리둥절 했지만 상황을 알아채고 그 아이들을 앞으로 끌어냈다. 이어서 선생님은 아까도 무언가 등뒤에서 건너 다닌 것 같은데… 라며 이실직고를 종용했고, 나는 벌떡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쌍한 내 친구는 나 때문에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 선생님은 가끔씩 배운 노래를 부르게 하던 그 아이가 이런 사악한? 트릭스터(trickster)였다는 사실에 당황하신 듯 했고 그래서 더 화를 극렬하게 내신 듯 했다. 그때 나는 인간 볼케이노를 봤다. 눈물 콧물을 빼며 나는 선생님 앞에서 녹아내렸다.

다음 음악시간부터 마음이 어땠겠는가. 나는 고개를 처박은 채 한번도 앞을 쳐다보지 않고 음악수업이 빨리 끝나기만 바랐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뻔뻔한 학생 짓은 막을 내렸다. 안 하고 싶은 걸 억지로 했다는 게 아니라 안 했으면 안 했음을 당당히 밝히는 학생이 된 것이다. 내 기준에 안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트릭을 써서 선생님을 속이는 행위는 나쁜 짓이었다. 무릎 꿇고 앉아 흐물댈 때 그 깨달음이 왔다. 두세 달 후, 음악선생님은 다시 내 이름을 불러 노래를 시키는 것으로 죄를 사했음을 알렸지만 한동안 움츠렸던 내 목에서는 밝고 맑은 노래가 흐르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음악선생님은 내게 인간 볼케이노였다. 그런데 요즈음, 선생님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혼이 쏙 빠지게 혼쭐나지 않았다면 내 뻔뻔한 속임수는 얼마나 지속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반면 시를 베끼지 않았는데 노골적인 의심을 받았다면 선생님들이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는 피해 의식을 주홍 글씨처럼 가슴에 달고 살았을 지 모르겠다. 그랬다면 한참 사춘기인 소녀의 자존감에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었을까.

사실 상이한 두 선생님 방식의 인성교육에서 건질 걸 건진 건 우연이겠지만 이제는 잘 알겠다.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고, 그 안에 숨겨진 보물을 캐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