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한강이 있던 자리

그 시각 한강은 빛섬 축제라는 이름으로 들썩였다. 젊은 손짓과 수다와 라면 냄새로 가득 찬 대기, 빛은 그 공간을 뚫고 반사벽에 미래와 현재, 식물과 동물, 기하학적인 무늬와 실존의 유형물을 형상화했다. 빛의 스틱을 손에 쥐고 마라톤을 뛰는 군중. 파란빛이 발광하는 헤드폰으로 귀를 덮고 반딧불이처럼 모여서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춰 고개와 엉덩이를 흔드는 사일런트 디스코 클럽. 기타 소리가 앰프에서 흔들려 퍼지면 가수는 철썩대는 물결에 맞춰 노래 부르고, 강 건너 마포에는 집으로 돌아온 가족을 품은 창이 노란빛을 흘렸다.

그리고 그 시각, 들썩이던 한강이 여의도를 범람해서 한반도를 흐르고 오세아니아를 덮고 아프리카와 남극을 적셨다. 그곳의 사람들은 한강이 한국에 있는 강이라는 사실은 모를지라도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쓴 작가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강은 한순간 물에서 불이 되어 인터넷과 라디오와 TV를 화덕처럼 달구더니 어느새 레이저 빛이 되어 서점의 가판대와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각, 한강의 날이 시작되고 한강의 이름이 노벨이라는 찬란한 명판에 아로새겨지는 한강의 역사가 시작됐는데,

난데없이 나는 토지를 읽던 밤들을 생각했다. 문장들이 꿈틀대고, 피처럼 붉거나 풀 먹인 홑청처럼 하얗고, 축축하거나 달디달아서, 괜시리 공허했었다.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을까. 산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자격조건도 그랬지만 영어로는 도저히 이 맛을 살릴 재간이 없을 테니 노벨문학상은 한글과는 요원한 별나라겠구나... 그런 같잖은 생각을 했던 밤이다.

하찮은 나는 몰랐다.

손바닥 만한 액정 안에 세계가 담기고,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챗지피티가 시와 소설을 쓰는 세상이 도래할 줄을...

그런 변화에 겨우겨우 익숙해지며 사는 중인데

난데없이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또한번 익숙해져야 할 역사가 탄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한국문학에 양대 산맥을 박경리 선생과 한강으로 삼고 있었다. 한강은 내게 천재였다.

눈이 아니라 온몸으로 책을 읽는 버릇 때문일까. 채식주의자를 읽었을 때, 작품 속 영혜가 속을 게우듯 나도 진저리를 쳤지만, 폭력에 대한 폭로와 경종, 휴머니즘, 그로테스크 안에 단단히 박힌 작가의 천재성을 보았다. 흰을 읽었을 때는 그 생각에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나같은 범인은 근접하지 못할 재주라서 천재라 명명했다. 알고 보니 타고난 감수성, 어깨근육이 굳을 만큼 쓰고 쓰는 사람, 시도 쓰는 시인, 아버지와 형제들이 가진 DNA, 그래서 그의 아들에게도 글쓰기 DNA는 이어 흐르지 않을까, 란 막연한 추측. 양순하게 말을 하고, 세상의 폭력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면서 그 안에 들어가 울면서 파헤치는 사람. 끝까지 파헤쳐서 마침내 구멍을 뚫어 하얀 빛을 내고 마는 사람, 그래요, 당신은 나는 엄두도 내지 못할 글을 사락사락, 잘도 쓰는 작가입니다.

광주의 피해자와 제주의 피해자들을 문학으로 구원하고, 허물어져 가는 출판계에 기둥을 세워주고, 한국을 빛내고, 젊은, 아시안, 여성이란 3박자의 노벨문학상 유리천장을 깨뜨리고, 아들에게 어떤 짐도 지우지 않고 수박의 맛을 알게 해주기 위해? 생명을 부여한 사람...

이 시각 한강은 아들과 조용히 차를 마시며 자축 파티를 열겠다고 했다. 한강 작가가 한민족에게 떨구어준 달콤한 꿀을 받아 나도 당신도 풍미 그윽한 차를 마시는 순간에, 한강에는 기어이 불꽃 축포가 터지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은 세상 어딘가에서 한 사람의 작가때문에 이 난리가 나겠지만 2024년엔 그곳이 한국이어서 행복하다. 작가의 바른 인성이 일군 시간이라 더 의미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