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자식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

며칠 전 모교에 다녀왔다. 가을이니 캠퍼스에 가을 색이 짙었다. 가을이건만 모교에 가면 내가 늘 봄이었던 날을 떠올리면서 봄을 맞은 양 들뜨고 싱그러워진다. 머릿속에서 걸어 다니는 옛 시절의 나,가 모교라는 의미를 봄으로 만든다.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추억의 장소에 가면 그때 함께 했던 사람이 떠오르는 현상도 그중 한 가지다. 그 사람의 현재를 알고 있다면 문득 소식이 궁금해 전화기를 만지작거릴 테고, 그 사람이 언제부턴가 추억 속 존재가 되었다면, 게다가 꽤 친했던 사이라면, 가끔은 멀어지게 된 순간을 생각하게 된다.

모교에서 함께했던 내 친구중 하나가 후자의 사람이 되었다. 그 친구와는 갱년기 때문에 멀어졌다. 내게 갱년기는 나를 지탱하기도 힘든 시간이라 타인을 보듬어 안기란 불가능한 시기였다. 정신적으로 황폐한 시간을 보냈기에(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더욱이 그럴지 모르겠다.

그 친구는 말의 사설이 길었다. 나라면 1분 안에 마칠 얘기를 20분쯤 한다. 그러니 나머지 시간 동안은 인내를 요한다. 그런 성향은 결혼하고 나서 어느 지점부터 시작됐기에 캠퍼스에서 수다를 떨던 때와는 다른 친구가, 마치 새로 사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미국과 한국에서 떨어져 살았기에 조금씩 가랑비에 젖듯 스며들지 못하고 둑방의 물이 터지듯 그렇게 맞닥뜨렸다. 나는 원래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야기를 하도록 질문도 많이 하는데, 질문을 하면 더 길어지므로 언제부턴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위기를 느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보였다, 친구와 통화를 두려워하는 내 모습... 코로나 동안 만남이 뜸했고 친구는 더욱 자신의 세계에 갇혔다. 코로나 동안 혼자 지내면서 쌓은 벽으로 인해 사람들은 개성이 뚜렷해졌고 나도 달라졌다. 나는 갱년기를 맞았다. 친구는 진작부터 갱년기를 앓았다.

나는 참을성이 없어졌고, 안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하려면 경기가 일 지경이 되었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어느 날 친구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친구야, 하고 싶은 말을 본론부터 해줄 수 있겠어? 내 친구 말의 진행 순서는 이렇다. 먼저 자신의 가치관을 설파하고 서론을 말하고 이후에 천천히 진행해서 맨 마지막에 본론이 나온다. 나는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을 싫어하므로, 그 친구에게 늘 인내심을 가져야 했지만 친구이기에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무조건 참는 건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참다가 터지면 상대에게 물벼락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날 친구는 당혹스러워 했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오랜 습관은 어쩌지 못하는 것이고, 결론적으로 자신의 방식을 바꾸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의 갱년기가 끝난 후에나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런데, 실은 내가 힘든 건 긴 사설 때문이 아니었다. 길면서 겉도는 대화때문임을... 친구란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서로의 인생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며 서로의 행복을 응원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친구에게 언제부턴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우연한 계기로 그것이 기대에 부응해 주지 않은 친구의 아이들이 원인임을 알게 되었고 나는 원래 가족 이야기를 대화로 삼지 않는 편이지만, 이후부터는 아예 함구했다. 친구끼리의 대화가 공허해졌다.

친구의 아이는 잘 되야 한다. 친구의 아이가 잘 되면 엄마 친구로서 덕을 볼 수도 있다. 주변의 누구라도 아이들이 잘 되면 어른들에게도 좋다. 우리는 질투도 느끼지만 사실은 실익이라곤 없는 쓰잘데기 없는 감정이지. 타인의 행복 바이러스는 내게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으로 전달되고, 내가 곤란할 때 도와줄 사람은 주변의 잘 나가는 사람인 것이다.

모교에는 구석구석, 함께 한 우리의 시간이 있었으니 그 친구 생각이 났다. 그곳에서 불쑥, 넌 가족만큼 가까운 존재라던 친구의 고백이 수십 년 세월을 건너 되살아났다. 아, 그 친구는 원래 그랬지... 문제가 있으면 해결이 된 후에나 속을 털어놓는... 친구는 그냥 있는 대로 품어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갱년기 때문에 잊었다. 

갱년기 피크를 넘어섰다고 느끼는 지금,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다가오는 중이다. 갱년기를 넘기면 그때는 세상사 초월하여 봄날만큼 가볍고 소생하는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겠지. 그 험한 갱년기를 넘겼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