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후에 손주에게

15년 즈음 후에 나는 분명히 할머니가 되어 손주의 손을 잡고 여의도를 거닐며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우리 **도 학교에서 배웠다시피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에 대한민국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지. 국민들이 얼음이 되는 마법에 걸렸어요. 할머니도 뉴스가 흐르는 모니터 앞에서 입을 벌린 채 옴짝달싹 못했어. 이게 현실일까? 혹시 꿈은 아닐까? 대통령이 비상계엄, 이랬는데, 내가 알고 있는 그 비상계엄 맞는가?

할머니는 역사 속 비상계엄 사태를 화면으로 봤지만 아주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공포라는 걸 알았지. 무기를 든 군인들이 죄 없는 시민을 죽일 수도 있고, 멋 모르고 명령을 따르던 군인들이 항거하는 시민에 의해 다치고 피를 흘릴 수도 있고, 후에 죄책감 때문에 고통이 밀려와 생이 괴로울 수도 있는… 전쟁처럼 아주 끔찍한 트라우마가 양산될 대재앙이었지.

그날 밤, 얼음처럼 꼼짝 않고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하나 지켜봤어. 여의도 국회의사당 담밖에 시민들과 기자들과 장갑차와 군용 버스에 탄 군인이 엉켜서 그 밤을 실타래처럼 꼬는 장면, 상공에 수많은 헬기가 지나갔다고 전하는 기자의 말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위기감에 가슴이 콩닥댔고, 의사당 잔디밭에 내린 헬기에서 총을 든 군인들이, 그들은 한 눈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는데(김정은 참수단이라 하더라고), 우왕좌왕하던 특수부대원들이 건물 현관으로 진입하려 했어. 안에서는 보좌관과 국회 직원 등이 사력을 다해 문을 잠그고 맞서고 있었지. 그 문을 통해 들어가지 못하던 군인들이 어디론가 줄달음쳐서 후미진 유리창을 깨고 어설프게 안으로 들어갔어. 후에 그들이 숨쉬던 공기는 갑자기 희뿌얘졌단다.

그때 사실 군인들은 뒤뚱대는 오리 같았어. 한 눈에도 어리둥절하고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었지. 오히려 국회 안팎의 일반인들이 마치 비상계엄발생시를 대비해 잘 훈련된 베테랑 군단 같았고.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이상한 안정감 같은 게 생겨나더라. 우려하던 그런 유혈 사태는 없겠구나, 우리는 훌륭한 민주주의 정신을 품은 한 민족 맞구나, 불의에 맞서는 시민과 군인의 마음이 생생히 전해졌어. 명령을 받았지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상한 일에 휩싸여 당혹해 하는 군인의 마음도 말이지.

우리 **도 알다시피 3시간도 안 되어서 비상계엄은 무효가 되었어. 하지만 대한민국은 물건이 가득 든 상자를 거꾸로 들고 흔들었을 때처럼 한동안 난장이 되었단다, 경제, 안보, 외교도 말이지. 할머니는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 찬성을 받기 전까지 열 하루 동안 아무 것도 못 한 채 뉴스에 파묻혀 살았단다. 2024년 12월 14일 오후 4시에 국회 본회의당에서 탄핵 찬성이 표결 되지 않았다면 8년 전처럼 직접 나가서 촛불을 들었을 거야. 그땐 촛불이 아니라 응원봉 같은 것을 들더구만… 할머니는 촛불을 서로 옮겨주며 전달되던 한마음이 뭉클하게 좋았지만 세상은 거듭 바뀌니 어쩌겠니. 그래도 마음이 더 중요하니까, 그런 건 곧 상관없게 되었지.

그때, 대통령 입에서 비상계엄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의도로 달려온 인근 주민들과 추위에 아랑곳없이 밖에 나와 목소리를 합하던 시민들도 그랬지만 할머니 가슴을 무엇보다 벅차게 해주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국힘에서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던 몇몇 국회의원이었어. 그 의원들은 국회의원이라는 직책을 직업의식이 아닌 소명의식으로 가지고 불변의 가치를 지키고자 한 정말 훌륭하고 멋진 사람들이었지.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꿋꿋했어. 당이나 사익을 우선 하지 않고 진심으로 이 나라를 위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해서 실행에 옮기는, 이후에 많은 겁박과 위협을 받을 것도 감수하고 옳은 일을 실행한 사람들 때문에 아, 이 나라가 그래도 바로 설 수 있는 기회가 있겠구나, 희망을 가졌지. 그런데 역사에서 그런 사람들을 뭐라할까, ** 야?

그래 맞아, 의인, 의인이야. 의로운 사람. 그러면 의인을 왕따하고 겁박하는 사람들은? 하하, 비의인이라는 말이 생겼니? 그래 그렇다면 그들은 옹졸하고 비겁한 비의인이겠구나. 바른 기치를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손익계산을 일삼는 사람들,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타인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정치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자격을 못 갖추지 않았겠니?

할머니는 진보냐 보수냐 상관없이 의인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주길 간절히 기원했단다. 정말 마음이 깨끗하고 바르고 오직 국민을 위해 제 안위를 저버릴 수 있는 의인들이 나라를 이끌어주길…

할머니 소원대로 이루어졌냐고? 글쎄, 어떻게 됐을까? 그 부분은 우리 **가 공부해 볼까. 그리고 다음에 이곳에 올 때 그에 대해 또 이야기를 나눠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