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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의 이야기

같은 미국, 다른 삶(9)-Macy`s에서 일하다 깨닫은... Yunah Kim (kyeonah) 2020-6-30  05:24:49



같은 미국, 다른 삶(9)-Macy’s에서 일하다 깨닫은...


 

 

미국에 온 지 7년차 되던 해였다. 아이들 옷을 사느라 들른 곳에서 구인 팻말을 보았다. 순간의 주저도 없이 관계자를 붙들고 물었다. 제가 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마르고 자그마한 동남아계 아저씨는 반색을 했다. 물론 일할 수 있지요, 전화번호를 남기고 가세요. 며칠 후 전화를 받았고 정식 인터뷰를 보러 갔다. 인터뷰는 그 아저씨가 담당했다. 이름이 박티라고 했다. 알고 보니 매니저였다. 일대일 인터뷰였는데 1시간 정도 진행됐다. 어렴풋이 짐작컨대 이런 과정을 나만 치뤘거나, 혹은 내가 예외적으로 긴 테스트를 받은 듯 했다. 박티는 내 영어실력이 영 탐탁치 않았을 것이고 과연 이 여자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못 미더웠을 것이다. 1시간여 동안 내 신상에 대한 브리핑은 물론, 엄청난 매뉴얼을 들었고, 하다못해 역할극까지 했다. 본인을 손님이라 생각하고 회원가입을 권유해보라고 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손님연기의 박티를 붙들고, 박티가 알려준 멤버십 가입과정과 혜택을 성심을 다해 설명했다. 오버액션에 발연기를 펼쳐야 했지만 난 정말 돈이 필요했다. 그 절실함이 부끄러움이나 쑥스러움쯤 친구하게 만들었다. 엄마 회갑이 다가오는데란 생각이 머릿속에 웅크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박티는 내 절실함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기회를 주었던 것 같고 가능성을 캐내려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박티는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나는 임시직이나마 Macy’s의 아동복 판매원이 되었다. 땡스기빙 몇 주 전부터 연초 세일기간까지 백화점에서는 판매직원을 보충한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채용되어 잠깐의 연수를 거쳐 각 매장에 파견되는데 나는 박티가 지목해서 원하던 아동복 매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Macy’s에서는 많은 종류의 쿠폰이 발행됐는데 그것을 처리하는 일이 빅딜이었다. 쿠폰은 일정 규칙이 없어서 정보를 입력하고 스캔하는 순서가 각기 달랐고 가짓수도 많았다. 연수라는 건 쿠폰처리 훈련과정을 의미한다. 혼자 현금인출기처럼 생긴 기계 앞에서 비슷비슷하게 생긴 쿠폰들의 설명서를 하나씩 읽고 처리법을 숙지한 후 일일이 확인 사인을 한다. 두세 개 처리하는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옆 기계에서는 친구인 듯한 처자 둘이서 하나를 끝낼 때마다 donenext를 말했는데 내가 하나를 사인하는 동안 서너 번의 donenext 소리가 들려왔고 덕분에 사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나는 거북이처럼 느리구나, 이렇게 하면 밤을 새도 모자라겠구나곧 학창시절 세계사 과목을 포기한 것처럼 이 작업도 포기해야 할 운명임을 깨닫았다. , 어쩐다

 

나는 성실하지만 태생이 교과서적인 사람은 아니다. 선생님의 지시나 엄마의 잔소리를 걸러서 듣고 어떤 지침이라도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수행하는 버릇이 있다. 올곧은 성격이어서 잔꾀를 배타하지만 효과적이지 않을 땐 과감하게 생략할 줄도 안다. 그런고로 조금 고민을 했고 곧 다음과 같은 스텝을 밟았다. 안 읽고 사인하기! 너무 티를 내도 안 되므로 천천히 넘기며쿠폰 때문에 판매일을 못하진 않을 것이다!! 란 신념을 가지고!! 나중에 박티는 내가 그 작업을 꽤 빨리 끝냈다며 생각보다 우수한 여자 아님?? 하는 눈길과 미소를 건넸다. 근데 지금 생각하니 너 제대로 안 읽었지? 라는 눈총이었을지도그런데 그런 것도 기록에 남아 보고가 되다니… Macy’s는 섣불리 눙을 치면 안 될 일터였다.

 

최종적으로는 시큐리티 가이(security guy)가 연수를 담당했다.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말했는데 영어라면 알아듣는 건 알아듣고, 마는 건 마는데 익숙한 나는 그 과정의 목적을 나중에서야 무릎을 치며 이해했다. 그의 농담에 웃는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졸졸 어디론가 따라 들어갔는데 그곳은 보안실이었다. 안에는 몇 십 개의 모니터가 생생하게 매장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내가 이해한 바는 아, 좀도둑 잡는 보안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구나정도 였다. 그런데 사실은 깊은 뜻이 숨어 있는 연출이었다.

 

일을 시작한 이후, 박티가 지정해 주는 시간대에 판매일을 했다. 박티는 매우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어서 모두로부터 편리한 시간을 수집해 스케줄을 짰고 가끔만 오락가락 하는 시간을 잘 메모해 두면 몇 명의 직원들이 훌륭하게 아동복 매장을 지켜낼 수 있었다. 4시간? 만에 한번씩 10?간 휴식시간이 주어지는데 쉴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실제 앉을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적었다. 하지만 중년의 아줌마로서 아픈 허리와 뜨거운 발바닥을 잠시라도 달래기 위해 나는 그 휴식시간을 무척 소중히 이용했다.

 

박티는 가끔씩 매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담당판매원이 매장에 있는 지, 휴식시간을 제대로 지키는지도 체크할 수 있는 방법 같았다. 무심한 듯 하지만 매장은 나름의 노하우와 감시하에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땡땡이 친 만큼 역시 쿠폰처리에 미숙했다. 도대체 일관성이라고는 없었다. 매번 다른 쿠폰이 보이고 거기서 규칙 같은 걸 발견하기 힘들어서 그냥 되는대로 이리저리 해보다가 모르면 선배직원에게 구원을 청했다. 모두 기꺼이 도와줬다. 반면 나도 그들에게 도움을 줄 일을 발견했다. 마감 때 그랬다. 현금등록기에서 꺼낸 돈을 각각 지폐별로 명세표에 적어 합계를 내야 하는데 한번은 세 명이 모여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옷을 정리하다가 무슨 일인가 가보니 계산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조용히 연필을 들고 산수를 해서 숫자를 적었더니 모두 감탄을 했다. 한 사람은 천재라고까지 말했다. 참 재미있는 문화충격이었다. 마감 때 마지막 정리를 자처하는 방법은 팀원들과 좋은 유대를 이룰 수 있는 비법이기도 했다. 처음엔 텃새를 부리던 사람도 점차 친절한 태도로 바뀐 건 그 비법이 유효하다는 증거였다.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뒷정리를 할 땐 바빴다. 매장을 고루 돌면서 흩어진 옷이 있으면 개고 탈의실에 옷더미가 쌓여 있는 경우엔 서둘러 제자리에 돌려놓고 손님이 있으면 계산도 해야 하고 막판엔 명세서와 현금을 들고 회계과에 다녀와야 한다. 그러느라 빙빙 바삐 돌아다닌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려고 출입문을 나서려는데 연수를 담당했던 시큐리티 가이가 불러 세웠다. 다른 사람들은 유유히 나가는데 나만 가방검사를 하자고 했다. 1,2 주 동안 한번도 없던 일이어서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쥐를 본 것처럼 기분이 불결해 졌다. 기분이 정전기처럼 들러붙은 내 표정을 일견한 후 시큐리티 가이는 묵묵히 가방 안을 조사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출입문을 빠져나오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의 어떤 점이 의심스러웠을까?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결론은 흐트러진 매대가 있는지 확인하며 혼자 열심히 돌아다니는 모습이 모니터에 포착됐고 그것이 수상하게 비쳐진 모양이었다. 그때 불현듯 깨닫았다. 모니터로 가득한 보안실을 연수생들에게 보여준 목적 말이다. ‘너희를 똑똑히 지켜보고 있으니 도둑질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나는 수많은 카메라가 좀도둑을 감시하는 용이라고만 생각했지 나를 감시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충격이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따져봤다. 나는 나를 알지만 타인은 나를 잘 모르잖아시큐리티 가이에겐 모두가 잠재적 도둑일 수 있겠지. 그 사람은 제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야생각의 흐름 끝에 나빴던 기분이 사라졌다.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으므로시큐리티 가이는 이후부터 나를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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