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으로 인하여

집에서 40여분 떨어진 곳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던 늦은 오후였다. 심한 길치인 나는 GPS에 의존해 생활반경을 넓혀 살아가는데 그날도 멘토처럼, 지침서처럼 네비가 하라는 대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30여분 남은 지점에서 고속도로를 타라기에 열심히 오른쪽에 붙어서 입구를 찾는데 진입로 바로 앞에 떡하니 경찰차가 가로놓여 있어서 나 뿐 아니라 아무도 그곳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곳을 지나쳐 달리면서 네비님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역시나 믿음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나는 순하게 지시를 따랐다. 그런데 가다보니 다시 처음 지점으로 돌아와 있었고 같은 EXIT으로 나가라는 허무한 말을 들었다. 그렇게 같은 행동을 세번째 반복하다가 바보짓임을 깨닫고 일단 직진을 하기로 했다. 달리다 보면 집 가는 길이 나오리라...... . 방향치에 길치인 나답게 집과 가까워지는지 멀어지는지 모르는 채 무작정 달렸다. 다행히 고속도로 다른 진입로로 안내를 받았으나 놀랍게도 그곳조차 동일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GPS는 그제서야 내 루트에 문제가 생겼다며 다른 길을 찾는 듯했지만 똑같은 메시지만 반복되고 고속도로 외의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졌고 차마다 밝혀진 전조등 탓에 눈과 마음이 매우 싱숭생숭해졌다.

주간도로를 달려야 하는 초대형 트럭들은 차선 두 개에 걸쳐 긴 줄로 늘어서 있었고 나는 그 틈에 끼여 기다리다가, 근처 빌딩 주차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남편으로부터 몇 시간 전에 그 고속도로에서 대형 유조차가 넘어져 주변 교통이 마비된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기름이 유출된 탓에 예상 해소시간이 자정도 넘는다기에 네비를 지방도로로 설정해서 멀리 돌아가기로 했다. 길은 통하기 마련이라는 진리만 믿고… 허나 모두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 터이고 퇴근차들까지 몰려 어떤 구간에서는 1마일을 2시간여에 걸쳐 운전하는 기행을 경험했다. 지긋이 거리를 둘 수도 없어서 앞차의 꽁무니를 충실하게 졸졸 따랐다. 조금씩이라도 전진을 해줘야 신호등이 바뀌면 뒤에서 한 대라도 길을 건널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평시처럼 앞 차와 간격을 두며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짧은 다리 끝에 달린 발의 끝없는 움직임때문에 30분쯤 지나자 오른쪽 엉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에고… 한숨이 나왔고 고의는 아니겠지만 한 사람의 운전자 때문에 벌어진 이 사태가 마치 카스트라토의 운명처럼 슬픈 생각이 들었다.

카스트라토는 바로크시대 유행했던 거세한 남성 성악가를 말한다. 사춘기 이전에 거세하여 남성호르몬 분비를 막아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하며 곱고 넓은 음역대로 맑고 힘있는 가창력을 뽐내는 사람들이다. 1688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로마교황이 지배하는 영역안에서 여성이 무대에 서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 교회성가대나 오페라 무대에서 남성만이 노래를 부르는 현실에서 소프라노와 알토 음역대를 소화하는 성악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거세 이후에 성인이 되면서 허파와 가슴이 성장하여 힘있는 소리가 나와 여성보다 더 멋진 연주가 가능했던 카스트라토는 거세를 하면 보상금이 나오고 성공했을 때 파리넬리처럼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기에 가난한 가정의 부모들이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슬픈 역사를 가졌다.

만약 교황 클레멘스가 이따위 무모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수많은 카스트라토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겠지...

역사를 살펴보면 한사람 때문에 생겨난 비극의 주인공은 수도 없이 많았다.

안네, 홀로코스터로 인해 희생된 유태인들, 하물며 조상이 저지른 잔혹상의 죄책감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 심한 병을 앓고 있는 나치의 후손들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과 원한을 품고 죽어간 소중한 조상들과 위안부와 차출된 노동자들

삼천궁녀

사도세자

총격사고로 죽은 학생들과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

브레이크를 천만번 밟았다 떼면서 원숭이 꼬리만큼씩 움직이던 나와 수많은 우리를 있게 한 원인제공자가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대체 왜 여성을 차별해서, 원하지 않는 수많은 카스트라토의 삶을 비극으로 몬 교황 클레멘스 9세,

히틀러,

정한론을 제기한 사이고 다카모리,

의자왕과 영조와 조승희…

도 결국 한 사람이었다.

힘이 있던 없던 우리는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해 비극도 일어나고 행복도 살아나는 것이 이 사회의 메카니즘이다.

내가 한 사람으로 인해 불행을 겪을 수도 혜택을 볼 수도 있듯이 나 한 사람때문에 타인이 기쁘고 슬플 수 있다. 5시간동안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로 인해 기뻐했던 혹은 슬퍼했던 사람들을 생각했고 나를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스치었고 내가 살아가면서 취해야 할 행동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