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은 경험기

*1*

저가 와우항공으로 유럽행 비행기티켓을 예매했는데 공교롭게도 결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공사가 파산을 선언했다. 할 수 없이 신용카드회사에 연락해 환불을 받고 항공권을 재구매 했다. 남편은 학회 때문에 가는 거라서 따로 한국카드로 끊고 막내와 내 것은 미국 신용카드로 결제했는데 미국측에서는 한번의 이메일로 모든 절차가 완료되어 빠르게 일이 마무리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카드고객센터와 길고 복잡하고 진 빠지게 연락을 수 차례 시도한 이후 두 달여만에 환불확정이 되었다.

같은 일을 확연히 다르게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본 결과 한국의 시스템이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하여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음을 알았다. 중간에 아무 책임소재가 없는 고객센터 도우미를 두어 대답도 정보도 시원하게 제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연락을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그런 과정에서 화가 날 고객으로부터 애먼 도우미만 원망받이가 되도록 한다. 도우미에게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고객은 끝까지 꾹꾹 이성을 지키며 손에 닿지 않는 카드회사를 향한 분노를 혼자 삭여야 했다.

항공사가 파산을 했군, 환불을 받고, 새항공권을 구입해야 하네,란 일련의 이미 유쾌하지 않은 과정속에 여행 전의 흥마저 깨뜨리는 복병을 숨겨두는 구조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규약이나 약정이 이미 명문화 되어있으므로 고객센터 도우미들을 교육시켜서 바로 응대할 수 있게 하던지 아니면 미국처럼 전문팀을 구성해 이메일 상으로 즉시 해답을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좋을 것이다. 온라인에서 신용카드로 상품을 구입하는 과정도, 반품하는 과정도 미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데 그 불필요한 체계가 왠지 허례허식이나 겉치레를 떠올리게 해 씁쓸했다.

*2*

새로 구입한 항공티켓은 러시아 항공이었다. 구매 후 며칠이 지나자 이번엔 러시아국적기 사고 소식이 들렸다. 이런…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출발일까지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환승지인 모스크바까지 무사히 갔다. 기내식이 정말 맛있었고 보잉 777의 좌석이 안락한데다 착지를 엄청나게 부드럽게 하는 기장의 솜씨에 탄복해서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우주항공국인 러시아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도 러시아항공을 이용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다. 거기까지였다면 말이다. 그런데 최종도착지인 베를린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컨베이어벨트 위에 우리 가방이 실리지 않았다. 설마 나오겠지 조금 더 기다려보자, 하다가 다음 도착기의 짐이 왕창 올라온 것을 보고서야 현실을 직시했다. 환승지인 모스크바에서 가방이 나홀로 여행을 떠난 모양이다. 나중에 가방에 부착된 스티커를 보니 뉴욕과 워싱턴에 다녀왔다. 분실신고를 받던 하청업체는 러시아항공 측에서 접수확인에 대한 알림장을 이메일 할 거라고 했다. 당장 갈아입을 옷과 속옷, 생필품 등은 어쩌나… 허전한 발걸음을 돌리면서도 머리는 그런 생각으로 바빴고 쉬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다리는 호텔을 향했다.

*3*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친 시간이 2시 50분. 얼굴에 실핏줄 하나 보이지 않는 남자는 시종일관 사무적인 태도와 미소 없는 응대를 했는데 독일이라서 그런지 나는 괜히 게슈타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가 입실이 3시부터이므로 10분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 흠, 독일은 시간관념이 철저하군… 공항에서 가방을 못 찾고 왔으니 혹 우리가 없을 때 가지고 오면 잘 맡아달라는 당부도 했으므로 나 같으면 미국에서 날아온 손님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을 지 예상이 되어서 얼른 들어가 쉴 수 있도록 배려를 할 것이다. 어쨌거나 다 내 마음 같진 않으니 서운타 않고 로비 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뒤에 서있던 손님들이 체크인을 시작했다. 그리곤 바로 우리 앞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다. 나는 살포시 놀라 그들에게 지금 체크인 마치고 키를 받았냐고 물었다. 예스,라는 대답을 듣고 프런트 데스크의 창백한 남자에게 따져 물었지만 앞손님은 작은 방이고 우리는 큰 방이어서 다르다는 이해 못할 말만 돌아왔다. 3시가 되자 남자가 우리에게 키를 넘겼다. 그 사이 두어 팀이 체크인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배정된 방은 노상카페 바로 윗방이었다. 아무래도 시끄럽고 담배연기가 올라올 것 같아, 베를린에서는 사람들이 정말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댄다, 다른 방으로 옮겨 달라고 하니 이미 다 차서 곤란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금요일 오후 3시에 모든 객실이 체크인 완료되어 다른 방이 없다고라? 에효… 한숨이 나와서 당신은 하늘에 대고 진실만을 말했음을 맹세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우습지만 신 앞에서 거짓을 말하면 안 되는 진리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길래 쓴웃음 지으며 알았다고 당신을 믿겠다고 말했다.

막내가 샤워를 하고 난 이후 카페에서 전화가 왔다. 카페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데 샤워실 바닥이 욕실바닥보다 높았고 출입문이 달려있지 않았다. 방바닥은 욕실바닥과 같던지 조금 낮았던가 보다. 욕실이 온통 한강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방바닥도 새어나온 물로 젖어 있었다. 막내와 둘이서 열심히 수건으로 닦고 짜내고 닦던 참이었다. 아마도 방의 마루 틈으로 물이 샜을 것이다. 덕분에 일요일에 방을 바꾸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고진감래라, 나쁘지 않군… 게다가 옮긴 객실엔 샤워부스에 문이 달려있었다.

*4*

러시아항공사로부터 기다리던 이메일은 오지 않았고 어찌된 일인지 식료품이 든 가방은 이틀째, 옷가방은 사흘째 말없이 돌아왔다.

우리는 3일동안 속옷과 양말을 빨아서 헤어드라이기로 말려 입고 찔찔 흘린 땀이 여기저기 베인 겉옷을 총 4일 동안 입고서 푹푹 찌는 베를린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보니 같은 옷을 입어서 하루에 다 다녀온 여행 같았다. 유럽은 이상기온이라 했다. 구동독에 위치한 조용하고 고즈넉한 아파트식 호텔에는 햇볕이 무자비하게 들어왔다. 날은 새벽 5시부터 밝아왔고 오후 9시 즈음 어두워졌다. 에어컨이 없어서 찜질방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근처 마켓에서 필요한 생필품과 화장품과 썬크림을 사서 바르고 칼칼한 한국음식을 그리워하며 별 맛 없는 베를린의 음식을 사먹었다. 남편의 학회가 시작되기 직전, 셔츠와 바지를 사야할까, 갈등하던 차에 옷가방이 돌아왔는데, 사과의 편지나 이메일 조차 보내지 않은 항공사의 행태가 괘씸해서, 나쁜 관행이 반복되고 있는 듯 해서, 클레임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들의 규정도 규정이려니와 문득 러시아란 나라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곤 러시아에 대해 별로 알지도 못하고 겪어보지도 못했으면서 특정 선입견을 갖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약간 놀랐다. 예전의 나는 정의가 승리하고 뉴스는 사실만을 보도하며 진실은 언젠간 밝혀지고 바른 것은 그른 것에 우위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찮은 선입견 같은 것은 갖지 않고 살았는데 말이다.

어쩌면 한국의 카드회사처럼 러시아 항공에서도 고객의 심리적 불편함 같은 건 배려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소한 일로 진을 빼느니 남은 시간을 즐기는 것이 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한가지 지혜란 생각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베를린에 대해선 어떤 감상을 가지게 될는지…

한 나라에 대한 이미지, 그것은 각자가 경험한 바대로 그려진다. 러시아는 러시아인에 의해 독일은 독일인에 의해 한국은 한국인에 의해… 좋은 경험을 한 사람은 좋게, 나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나쁘게 그 나라를 그린다. 경솔하게 그려서는 안 되는 이미지지만 쉽사리 그려지기도 하지. 그림의 한 선이나 점이 될 내 한마디, 내 행동은 나라의 대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성숙하고 바르게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