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뛰던 날 – 뒷모습이 달라졌다

요즈음 아침에 로우지와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방학기간이라 막내와 남편은 자는 시간이다. 걸으면서 몸에 닿는 햇볕이 비타민 D를 만들고 눈에 담은 햇살이 세로토닌으로 바뀌는 상상을 한다. 파란 눈금이 층층이 올라가며 충전되는 건전지마냥 저 햇볕줄기가 내 몸에 들어와 하루치 에네르기를 비축해 주는…

로우지가 풀냄새를 맡거나 마킹을 하는 동안 나는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하늘을 본다. 어쩌면 저리 이쁠까… 6개월 넘게 살면서 메릴랜드의 많은 것에 익숙해졌는데 하늘만은 볼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 매번 처음 본 사람처럼 어쩌면 저렇게 하늘색이 파랗고 구름은 하얄까, 탄복한다. 그보다 식상한 하늘에 대한 감상평이 없겠으나 그 평범함이 무척 귀한 것이란 사실을 그것을 잃어본 후에 알게 되었다. 언제든 마음 편히 산책을 할 수 있는 삶, 이것은 큰 혜택이다.

아침에 하늘 바라기를 하면서 걷다 보면 멀리서 규칙적인 발소리와 웅성거림이 들린다. 한무리의 청소년들이 뛰는 소리다. 두서넛이 열을 맞추기도, 혼자서 뛰기도 한다. 남자아이도 있고 여자아이도 있다. 웃통을 벗은 아이, 헐렁한 티셔츠 바람의 아이, 맵시 있게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은 아이도 있다. 동양아이도 있고 서양아이도 있다. 그 아이들은 생김새와 옷차림이 모두 다르고 뛰는 폼새와 팔의 움직임도 다르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달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땀을 흘린다. 처음엔 같은 또래라 우리 딸, 스스로 체육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막내가 떠올랐다. 뛰고 있는 그 아이들과 자고 있는 막내가 대조 대차를 이루었지만, 두번째부터는 그냥 그 아이들만 보았다. 참 이쁘고 기특하게 보았다. 청소년기라 아침잠이 쏟아질텐데… 방학인데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참말 건강하게 하루를 시작해서 남의 자식이라도 너무 예뻐 엄마미소가 나왔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특히 심신이 건강한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지구상에 밝은 미래가 펼쳐지는 꿈을 꾸게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주변의 아이들, 친척, 친구의 자녀들이 한껏 노력해 목표를 달성하면, 혹은 열심히 달리는 모습 자체로도 가없는 환호를 터뜨린다. 진심으로 기특하고 멋지다.

한무리의 아이들이 로우지와 내 곁을 지나 멀리멀리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각각의 뒷모습이 눈에 띄게 달랐다. 훨훨 나는 아이가 있는 반면 온 몸으로 더워요, 지쳤어요,라고 소리치는 아이도 있었다. 다 재주가 있고 잘해서 뛰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지나간 트레일은 다시 조용해졌다. 바람에 잎새 부비는 소리, 로우지가 킁킁대는 소리, 동심원처럼 퍼졌다가 고요해지기를 반복하는 풀벌레 소리와 앙증맞은 부리로 내뱉는 새소리로 채워진 길을 꿈길처럼 걷는다. 내 눈은 다시 하늘에 닿았고 세상은 고요한 소리로 시끄러웠는데 문득 멀리 한 아이 모습이 보였다. 위태롭게 뛰어가던 그 아이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놀랍진 않았지만 막상 무리와 떨어져 혼자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이후 나는 로우지의 해찰과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는데 그사이 아이가 다 쉬었는지 일어나 우리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긴 하지만 터덜터덜 걷지 않고 뛰기 시작하는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내 속에서 막 응원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기특하다, 장하다, 최선을 다하는 너의 모습이 얼마나 멋진줄 아느뇨?

문득 큰아이 생각이 났다. 졸업을 했지만 바로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소속 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빈 벤치에 덩그마니 앉아 계속 달리는 친구들 보며 미래가 불안했을 것이다. 이번에 본 인터뷰에서 합격을 못하면 파트타임이라도 시작하려고요, 하는 결심을 말하자마자 다행히 원하던 곳에서 오퍼를 받았는데 지나고보니 그래서 더 겸허해지고 신중해질 거란 생각이 든다. 어렵게 얻은 것은 쉽게 포기하거나 하찮은 불만을 품지 않게 되니까. 사실 살다 보면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서 걷거나 달릴 힘이 없어질 때가 한두번 아니 열 대여섯 번이라도 온다. 그럴 때 아이야,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편히 쉬어 가자, 힘이 비축될테니 모아서 다시 뛰렴, 그것이 인생이야…

그 아이가 우리 곁을 지나치면서 엄마 미소를 잔뜩 머금고 있는 내 얼굴을 본 것 같진 않지만, 무안할까 싶어 나도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뛰어가는 모습에서 달리고 말겠다는 열망이 느껴졌다. 나의 느낌은 다음에 나간 산책길에서 바로 확인이 되었다. 아이들이 달리고 있었는데 그 아이도 있었다. 이번에는 네 명의 동료와 함께 열을 맞춰 뛰었고 유난히 가벼운 걸음의 아이가 왼편에서 리드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제일 비실비실 뛰었지만 저번 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뒷모습이 달라졌다. 함께 하는 에너지 효과와 아름다운 협동을 목도한 때문인지 나는 두 손으로 박수를 짝짝짝 울리며 파이팅을 외치고 싶었지만 주책 같아서 마음으로만 응원했다. 긴 다리로 헐렁한 셔츠를 풀럭거리며 달리는 아이야, 그리고 의리 있는 친구들 모두 파이팅!

나는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와 '경쟁'에 찌들어 사는 한국 청소년들을 보며 가슴이 아팠기 때문인지 이런 광경을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