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미국, 다른 삶(6)-내 무슬림 친구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한 남자로부터 열렬한 구애를 받고, 미국사는 그 남자를 따라 낯설게 타국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나기홍과, 남편이 미국에서 공부하겠다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와 가난한 아내로 살기 시작한 나는 카운티에서 운영하는 ESL class에서 처음 만났다.

차도르를 쓴 나기홍은 내 친할머니를 몹시 닮았다. 엄마가 천상 양반댁 규수라 칭했던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이랬을 거라고 나는 상상했다. 터키인과 한국인이 어찌 그리 찰떡같이 오버랩 될 수 있었을까. 갸름하고 마른 얼굴에 큰 이목구비와 호리호리한 체격만큼이나 분위기가 닮아서 였을 것이다. 나기홍은 양반댁 규수 같은 기품을 품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된 지 며칠 지나 나는 우리 할머니한테 대하듯 친근한 말투로 나기홍에게 말을 걸었다. 나기홍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친구가 되었고 딸아이와 나를 집으로 초대해 주었다.

처음 그녀 집에 가던 날엔 설레었다. 긴 팔과 다리, 풍성하고 까만 머리의 일부를 볼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밖에서 내내 꽁꽁 싸매어진 그녀의 몸이 조금 자유를 얻을 모습이 꽤 궁금했다. 그날,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세 살 된 큰아이의 발장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오랜 시간 밖에서 기다렸다. 혹시 집에 없는 걸까? 낮잠이라도 자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딸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조금 실망했다. 나기홍은 여전히 꽁꽁 싸매어진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러느라 시간이 걸린 듯 했다.

자동차가 없고 친척의 아기를 봐주던 나기홍은 언제나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학교 라이드는 그 친척이 해준다고 했다). 그리고 토마토 수프와 모닝빵과 초코렛 케이크를 구워주었다. 큰아이가 좋아한 그녀의 음식이었다. 막 구워낸 초코빵에 으깬 땅콩과 녹인 초코렛을 듬뿍 끼얹은 케이크는 놀랍도록 맛있었다. 언제나 문밖에서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두번째부터는 그러려니 했고 단정하게 양 뺨을 대고 인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나기홍이 참 좋았다. 나기홍은 참하고 진실되고 생각이 깊고 예의 바르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알고보니 나보다 열 살 정도 젊었지만 전혀 어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땐 임신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아기가 세 살이 되어 프리스쿨을 시작하면 대학에 갈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꿈도 꾸었다. 그리고 꿈을 이루었다. 아마도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10여년 전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마음속 진정한 친구다.

나기홍이 아기를 출산한 해는 2001년이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11일에는 미국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극이슬람주의 단체 알카에다가 미국의 민간기를 납치해 뉴욕의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 DC의 펜타곤을 공격했고 펜실베니아에서는 비행기 전복사고를 일으켜 3천 여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희생자중엔 미국시민이 다수였지만 전세계 78개국의 시민들도 있었다. 이 전무후무한 테러로 인해 미국은 끔찍한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초토화되었다. *무역센터의 붕괴로 주가가 폭락하고 뉴욕에서는 한달만에 143,000개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경제적 환란마저 닥쳤다. 그리고 이 도미노는 곧 미국내에서 이슬람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확산되고 길다가 묻지마 폭행을 당하는 무슬림들이 생겨나는 카오스로 이어졌다.

내가 처음 미국의 중동정책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계기는 레바논 출신 여기자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초토화된 마을에서 피난하며 쓴 일기형식의 책(아이들아 평화를 믿어라)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9.11은 실로 악순환의 메커니즘이 낳은 결과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버지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이미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동에 거친 힘을 써온 미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첨예한 갈등에서 더욱 화가 난 극이슬람주의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미국의 정책과 패권주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아들 부시 때 9.11과 같은 테러를 자행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동지역의 죄 없는 민간인들이 이스라엘군과 미군에 의해 희생된, 내 피와 우정이 무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자들의 분개와 노여움의 비뚤어진 앙갚음인 셈이다. 그리고 9.11으로 사랑하는 이나 직장을 잃어 이성마저 잃은 미국인들에 의해 무고한 무슬림이 분별없이 공격당하는 일이 또 벌어졌던 것이다.

내 친구 나기홍이 동성친구 앞에서까지 쓰던 차도르(혹은 히잡)는 무슬림 여성들의 종교적 신념이다. 나기홍은 밤에 수영장에서도 쓴다고 했다.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는 신에 대한 복종의 상징물이 자신을 극한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 이 생뚱맞은 혼돈을 당신은 어찌 감내하겠는가. 그녀들 중 누군가는 집에만 머물고, 누군가는 길을 나서기 전에 차도르를 벗어 가방에 넣고, 집에만 있을 수도 차도르를 벗을 수도 없는 누군가는 매일 살얼음 위처럼 길을 걸었다. 이슬람 성원인 모스크가 습격을 당하고 바르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범인(凡人)이 난데없이 테러리스트란 누명을 쓰게 된 혼돈의 어느 날, 나는 나기홍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 아기의 엄마로 살아가던 나기홍이었다.

-계속-

cf.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하던중 9.11과 중동정세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씩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은 링크 공유해요. 여러 문헌을 접하다보면 반복되는 공통된 팩트를 파악할 수 있지요.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가짜뉴스를 구분하기 위해선 다독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한가지 편향된 정보를 읽고 그것을 진실로 믿어버리면 진실이 왜곡될 수 있지요. 모든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보다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https://www.history.com/topics/21st-century/9-11-attacks

http://yellow.kr/blog/?p=789

http://hopia.net/kime/mid_special0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