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독감을 앓고 난 후…

(1)

웰캄투 동막골에서 강혜정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마이 아파.” 그 고통보다는 분명 덜 하겠지만 지난주 나도 마이 아팠다. 보이지 않는 엄청난 악력이 내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는데 내 머리는 호두가 되고, 내 관자놀이는 호두를 깨부수려는 망치로 사정없이 가격되는 느낌이었다.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3일동안 잠칠을 했고 이후 4일동안 침대에 누워 아무 것도 못했다. TV소리는 머리가 쿵쿵댔고 긴 카톡이 와서 네 줄째 읽는데 퓨즈가 나간 것처럼 눈앞이 노랬다가 캄캄해져서 깜짝 놀랐다. 평소 긴 글을 읽지 못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상한 게 아니라 힘이 없음을 알았다. 말도 길게 할 수 없었고 듣기도 힘들었다. 그냥 단답식이 좋았다. 알고 보니 의견 말하기, 남의 말 들어주기, 독서나 뉴스시청도 힘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나는 지독한 독감에 걸린 덕에 매우 단순한 힘의 원리를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집에는 십여 일 동안 여러 변화가 생겼다. 남편과 막내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나누어 하며 나까지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식물잎은 군데군데 노랗게 사위었고 욕조에는 거뭇한 곰팡이와 찐득한 물때가 꼈다. 욕실 바닥엔 머리카락과 먼지가 쌓였고 탁자 위는 자잘한 물건들이 널부러졌다. 아, 식물에 물을 주고 욕실을 청소하고 강아지의 배를 쓰다듬는 작은 행위조차 내가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구나… 독서와 산책, 주변사람 챙기기, 입바른 소리를 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나라와 지구를 걱정하고 미래를 꿈꾸는 일들은 얼마나 힘이 넘쳐나야 가능한 일이던지... 나는 그간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만 신경이 집중되고 때때로 자립하기 보다 남에게 의지하려는 사람을 보면 단순히 ‘좁고 이기적’이란 생각을 했는데 어쩌면 그들에겐 힘이 없는 모양이다.

생각도 그렇다.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는 어떤 주제나 이슈에도 흥미를 느낄 수 있지만 나를 지탱하기만도 버거운 상태가 되니 단지 내게 위로나 기분을 좋게 하는 이야기만을 갈구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주제에도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구나…

진정한 힘이란 나를 넘어서 나의 힘을 확장시켜 나와 세상을 함께 성장시키며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와 같은 힘의 원리를 새삼 이해하니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 사람은 왜 자기 안에 갇혀서 저토록 좁은 세상만 보며 우기고 사는 것일까, 의아 했던 시선을 저 사람에게는 힘이 없구나, 하는 측은지심으로 바꾸니 사람에 대한 실망도 적어지고 노여움도, 마음의 분란도 사그라들었다.

(2)

사람이 지독하게 아프면 정말 내 나라 음식만 먹고 싶어지나 보다. 요리엔 똥손이요 잼병인 남편이 샐러드와 치킨누들 수프를 챙겨주는데 보기만 해도 속이 느글거렸다. 죽과 콩나물국만 먹혔다. 원래 어떤 국적의 음식도 다 잘 먹는 나로서는 신경험이었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실화가 생각났다. 외국인 부인을 둔 한국 남편이 암투병을 하는동안 정성껏 요리한 부인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못했다. 몇 십년?동안 부인이 해준 음식을 잘 먹고 살았건만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애가 탄 부인은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겠냐고 물었고 남편은 어렸을 적 먹었던 한식을 이야기했다. 이후 부인은 수소문을 해가며 남편이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극진히 공수해 바쳤고 최선을 다해 병간호를 한 덕에 남편은 회복을 했다. 남편은 이제 자신이 부인을 위해 살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고자 했으나 부인은 뜻밖에 이혼을 요구했다. 부인은 아픈 남편이 자신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사실에 큰 충격과 실망을 느끼며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남편은 진심을 다해 부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이해를 구했으나 부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살던 동굴 쪽에 머리를 두듯이(수구초심) 음식에도 그런 의미가 들어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내고 싶을 때 예전에 엄마가 해 준 그 맛이 그토록 그리운 것일지도…

(3)

머리가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을 때, 마침 곁에 있던 막내가 내 등을 살살 문지르며 위로를 했다. 머리가 박살날 것 같은 위기감과 서러움에 놀라 울면서도 내 등을 어루만지는 막내의 갸녀린 손가락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그래서 깨달았다. 사람의 따스한 손길만큼 아픔을 상쇄시키는 묘약도 없으리란 사실을… 엄마를 부축해서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가습기를 틀어주고 1시간 마다 물과 약국에서 사온 면역증강제를 챙겨주고… 숙제와 시험공부를 하는 틈틈이 죽을 끓이고 계란찜도 만들고… 언제 이렇게 커서 아픈 엄마를 보살피는 믿음직한 딸이 되었는지…

비록 똥손이라 무엇을 해도 맛이 없지만 삼시 세끼를 챙겨주고 약을 사오고 막내 도시락을 싸주는 남편도…

가족은 나의 시간과 인생과 희생이 스며들어가 서로에게 그런 의미가 되는 관계임을… 따뜻하고 의지가 되고 위로와 힘이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