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조금 특별해진 결혼기념일
22년 전 이 날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둘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으나 막연히 무언가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침에 눈을 떴다.
오늘 뭐할까? 글쎄 뭐하지? 어디 갈까? 어디 가지?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다가 두 사람은 친구한테 빌린 차를 타고 무주구천동을 향해 출발했다. 한국에 온 이후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고, 집에서 1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고, 아내의 추억속에 시원한 계곡물이 맑게 흘렀다는 요소들때문에 정해진 장소였다. 실은 고장난 차를 정비소에 맡긴 후 편도 1시간 거리를 출퇴근하기 녹록치 않아서 남편은 4일만에 집에 돌아왔고 그래서 몸이 찌뿌둥했다. 그런 남편이 집에서 쉬고 싶어하면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던 학부모 모임에 예정대로 참석해야겠다고 아내는 생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22년 전 결혼식을 올려서 특별한 날이 된 이 날을 조금은 특별하게 보내기 위해 자신의 하루를 상대에게 맞췄다. 그리고 이 날이 특별해질지 어떨지 아무런 감을 잡지 못한 채 막연히 집을 나섰다.
4월 중순이고 한반도는 미세먼지로 뒤덮였지만 땡볕 속에서는 따가움을 느꼈고 오르막길이라도 걷게 되면 겨드랑이에 엷은 땀이 차올랐다. 전라북도 무주군에 있는 덕유산 국립공원도 어쩔 수 없이 희뿌얬지만 가뭄비나무 아래는 공기가 서늘하고 맑았다. 평일 야영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늘로 뒤덮인 평상이 스무 개 이상 빈터로 남아서 아내와 남편은 그 중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텐트처럼 몸을 뉘였다. 독일 가뭄비나무가 하늘을 향해 10여 미터쯤 뻗어올라 군락을 이룬 숲 틈으로 듬성듬성 회청색 하늘이 보였다.
그늘에 누워 피톤치드를 들이키며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는데 아내는 문득 조금 더 특별하게 그 순간을 즐기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야외의 차 안에서 영화를 보는 낭만처럼 요즘 두 사람이 한참 빠져 있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면 어떨까 하는 착안을 그래서 했다. 쾌적하고 여유롭고 맑고 평온한 덕유산 자연휴양림에서 인생의 희노애락과 철학과 정의와 배우들의 열연과 멋진 캐릭터와 세련된 편집기술이 들어있는 드라마가 상영됐다. 새소리가 섞이고 햇살도 따스하고 가끔씩 시원한 바람이 머리속을 만져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의 진한 삶이 펼쳐지고 있는 드라마를 보는 느낌은… 예상 외로 특별했다.
아직 한 편이 남았지만 아내는 슬슬 잠이 쏟아져서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온 몸이 평상위에 밀착되었다.
남편은 아내가 깰까봐 조심하며 아내의 몸에 팔을 둘렀다. 오르락 내리락, 통통하고 작은 몸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남편은 아내의 숨결과 옅은 향기가 기쁘고 고마웠다. 아내가 곁에서 애기처럼 크릉거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선물처럼 느껴졌다. 3주 전쯤, 그는 부인을 잃은 동료를, 장례를 치루는 내내 그 허망해서 어쩌지 못하는 눈을 계속 끔벅거리던 중년 남자를 보았다. 눈물이 났다. 고혈압을 지병으로 가졌던 부인이 사우나를 하다가 갑자기 운명을 달리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은 아내에게 사우나에 가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자신은 고혈압이 아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남편은 이 작고 통통한 여인이 영원히 사라진 순간을 상상해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건 상상조차 하고싶지 않은 일이었다. “언제나 이렇게 내 곁에 있어라” 남편은 아내의 오동통한 팔을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내는 크르릉 소리에 눈을 떴다. 남편이 숲이 울리도록 코를 곯고 있었다. 다행히 야영장엔 아무도 없었다. 그늘이 옮겨간 자리엔 노란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양산 대신 가져온 우산으로 남편의 얼굴을 가려주던 아내는 집이 그리웠노라고 말하던 남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서 지금은 크르릉 컥 소리가 규칙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무호흡증은 없어보였다. 아내는 며칠 전에 들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떠올렸다. 동창의 남편이 쉰인 나이에 암에 걸렸다고 했다. 초기가 지나서 수술을 바로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집안의 대주인 그녀 남편이 혹여라도 세상을 뜬다면… 상상만으로도 듣는 이들의 눈앞이 캄캄해 졌다. 더 큰 호강은 바라지도 않는다. 등 뉘일 집 있고 먹고 싶은 거 먹을 수 있고 가끔 자연을 보러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고 건강만 하다면 그 이상 바랄 게 무엔가. 이 순간 아내는 아무도 없는 숲 속 야영장에서도 두려움은 커녕 평안을 느낀 것이 남편 덕임을 깨닫는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두 사람이 무주구천동 계곡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4시가 넘어서였다. 길가엔 아직 벚꽃이 피어 있었다. 긴 막대 잠자리채로 벚나무에서 벌을 잡는 아낙이 보였다. 그걸 잡아서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했지만 멀리 있어서 물어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파전으로 허기를 달랜 후 계곡 옆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나머지 한 편의 ‘나의 아저씨’를 시청했다. 이선균이 열연하는 아저씨의 캐릭터를 아내는 좋아했다. 곧고 정의롭고 인정 많고 의리 있고 실력 있고 욕심 없고… 웃었다, 울었다, 심금을 울리는 드라마를 보느라 작은 액정에 코를 박고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사정없이 흩날렸기 때문이다. 순간 눈 앞에는 하얀 벚꽃잎이 함박눈처럼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투명한 계곡물은 둥근 자갈 무늬를 만들며 쉼없이 출렁이고 새끼손톱만한 낙화잎은 팔랑팔랑 춤을 추며 꽃향을 내뿜고 먼 하늘이 붉게 물들어 세상은 그보다 낭만적일 수 없었다. 아, 너무 아름다워… 아내는 그 광경에 감동해서 눈시울을 붉혔다. 눈 앞의 장면이 뇌리에 새겨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의도치 않게 특별해져 버린 스물 두번째 결혼기념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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