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기 좋은 도시

14년간의 긴 미국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오기 전, 우리는 주거지를 남편 직장과 가까운 천안으로 정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아본 내가 갑자기 천안댁이 되기로 했을 때 아,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골아낙이 되는구나 생각했다 (미국에서 스스로 컨트리 워먼이라 여겼기에^^) . 천안삼거리에서 호두과자를 사먹으며 흙먼지 이는 길을 걷고 배추밭 거름냄새를 맡는겨?? 라고까지는 예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울 이외의 지방을 시골이라 여겼던 옛정서가 내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우스개 소리인데, 만약 그때 다른 후보지인 세종에서 살기로 결정했다면 아마 지금쯤 그사이 두 배(과장법^^)로 뛴 집값덕에 못 먹어도 배를 두드리고 지낼 지 모르겠다. 역시 황금을 돌까지는 아니더라도 먼 친척 보듯 하는 우리에게 재운은 제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멀리멀리서 남의 댁만 기웃거리는 모양이다. 우리는, 정확히 노력한만큼의 대가를 받고 투명하게 세금을 잘 내며 최영장군만큼 당당히 살아가라는 운명인 듯한데 황금과는 애초에 연 없는 관계이니 뭐 그닥 애달프진 않다.

적어도 4,5년새 집값이 두 배로 뛰지 않은 천안은 주변지역에 비해 집값이 착하다. 서울, 특히 강남권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불당동은 천안의 강남이라 불리는 곳인데 학군 좋고, 학원 많고, 각종 편의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강남까지는 차로 1시간 남짓, KTX /SRT역사가 있어 서울역까지 35분, 수서역까지 30분 이내로 다닐 수 있다. 제대로 된 수도권이다. 서울에서 친구들과 헤어져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어떨 땐 내가 먼저 도착해 있다. 이것이 천안의 매력이다. 교통 편리하고 서울의 비싼 집값과 물가를 피해 살면서도 서울의 문화시설을 쉽게 누릴 수 있는 점. 예술의 전당이나 고궁, 여의도와 한강, 고속터미날이나 가로수길도 서울 사는 사람처럼 출입하기 용이하다. 전라도나 경상도, 부산에 가기도 서울보다 용이하다. 메이커를 따지기 보다는 가성비를 중시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천안 불당동이 꽤 살기 좋은 곳이 된다.

처음, 천안삼거리와 호두과자만 알고 입성한 천안은 이제 나의 두번째 고향이 되었다. 특히 불당동은 신시가지인지라 누구든 도시인으로 살수 있지만 단대 호숫가나 호서대 호숫가에 누워 하늘 보며 꽃향 맡고 낮잠 자다 책도 읽는 미국 컨트리 생활의 단맛도 즐길 수 있다. 사실 그런 장소를 알고 난 후부터 나는 천안의 팬이 되었다.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세련된 공산품을 고르고 재래시장에서 싱싱한 농산물도 사고 사찰에 들러 고즈넉함도 즐기고 아파트에 구비된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도 하고 뒷산에도 오르고 광덕산에 가서  ’기’도 받고 2시간만 달리면 서해가 있고 큰 대학병원이 두 곳이나 있고, 시청에서는 인문학 강의나 각종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코스코나 이마트 트레이더스 같은 대형마트가 즐비하고..

그리고 마루찬(가명)도 있는데,.

마루찬은 정말 한국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반찬가게다. 요일마다 주메뉴를 바꿔서 맛있는 메인 디쉬를 간단하게 열을 가해 먹게 해주는 신세계를 부여한다. 내가 미국에서 어떤 오후시간을 보냈는가를 생각하면 이건 정말 신세계다. 나는 저녁식사를 위해 늘 새롭게 요리했는데 항상 한끼 분량만 만들어서 다 먹어치우고 다음날엔 새로운 메뉴를 준비했다. 반찬은 꼬박꼬박 3찬을 마련했다. 당시 우리 식구들에겐 버릇이 있었다. 오늘 메뉴 뭔가요?라고 묻는 버릇. 물론 가끔 외식도, 투고도 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새 발의 피만큼 했다. 생각하면 정말 다시 못 행할 어메이징한 행보였다. 마루찬을 알고 난 이후 내 저녁시간은 바뀌었다. 재료를 꺼내서 씻고 자르고 재우고 볶고하는 대신 산책을 나간다. 최종목적지는 마루찬이다. 최상의 재료를 엄선해 천연조미료로 정성껏 준비한 마루찬 음식을 들고 오며 나는 한국 사는 혜택을 느낀다.

대전에 내려와서 마루찬 만한 곳을 찾지 못해 한동안 방황했다. 아직도 마루찬 사장님이 보내는 광고를 휴대폰으로 구독한다. 설마 먹지도 못하는 음식리스트를 보며 침이라도 흘리자는?? 심사는 아니고 ^^ 수십가지 메뉴 끝에 써 있는 사장님의 넋두리가 궁금해서다. 매일 바뀌는 메뉴만큼 사족도 다양한데 어떤 날은 시를, 어떤 날은 명언에 자신의 감상을, 어떤 날은 얼마나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는지를, 어떤 날은 드라마나 가족이야기도 한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는 이런 글을 보았다.

‘저녁시간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모습으로) 마루찬을 찾아오는 손님이 웃어주시면 10분 20분 더더더 가게를 열게 돼요. 8시까지 하는 영업을 9시 반까지 하는 이유는 한 두개 더 팔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저처럼 지치고 힘든 분을 위해 그런 것이니 이 마음 잘 알아주세요. ㅋㅋ’

내가 마루찬 앞으로 산책을 갈 즈음엔 가게 앞에 여러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일이 많았다. 삐까 뻔쩍한 외제차도 많고 심지어는 페라리도 보았다(ㅋㅋ 나 촌 아줌마 맞다~). 자녀를 픽업하며 저녁메뉴를 고르는 엄마들, 그런 손님을 위한 가게인줄 알았는데(요리에 취미나 재주가 없거나 사교로 바쁜 사람들을 위한…) 그런데 마루찬 사장님은 온종일 일을 하고 지친 몸으로 가족의 식사를 챙겨야 하는 고객을 위해 음식을 더 정성 들여 만들었나 보다.

속 깊은 마루찬의 음식이 있는 천안,

없는 것 빼고 있을 것 다 있는 천안,

매주 노숙자 봉사를 하는 구의원이 있는 천안,

높은 아파트숲을 조금만 벗어나면 논과 밭과 산과 자연이 있는 천안,

그리하여 살기 좋은 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