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가지 한국 사는 즐거움

구미 사는 수와 대전 사는 나는 동탄역에서 만나 픽업 나온, 수원 사는 진과 랑데부 했다. 세 사람의 인연은 열 여덟 살 재수학원에서 시작되었고 결혼 후 구미와 수원과 미국에서 터를 잡고 사느라 잘 만나지 못하다가 이번에 함께 여행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강원도에 다녀왔다.

미국에 살고 있었다면, 식구중 나만 쏙 빠져나와 친구들과 여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가족끼리 혹은 가족단위로 했겠지. 한국에서는 나이 쉰 즈음 되면 많은 여인네들이 갱년기를 핑계로 친구들과 여행을 갔거나 간다. 자식들은 품을 떠났고 호르몬은 몸을 떠나고 수분은 진피를 떠나 마른 새집처럼 버석해진 심신으로 빈집증후군을 앓다가 누군가 운을 띄우면 그래 그래… 박수를 치며 여행을 계획하는 것이다. 땀을 흘리다 맞이한 소낙비처럼 여행의 계획은 그저 시원하다^^

결혼 후 친구들과 하는 첫 여행이면서 우리 셋의 동행이 처음인지라 나는 설레면서도 과연 어떤 추억이 될까 흥미진진했다.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가족과의 여행은 여행지와의 만남에 기대를 걸며 편안하게 출발하기 마련이지만 친구들과의 여행, 특히 최초의 시도는 기대 반 우려 반이 되어 마음가짐부터 다르게 했다.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떠나지만 여행중에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등을 돌리게 되는 현상은 평시에 길어야 몇 시간동안 만나고 접해봤던 사람의 새벽과 늦은 밤과 삼시 세끼를 며칠동안 공유하면서 불편을 느낄 때 발생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많다고 들었다. 심지어 신혼여행지에서 싸우고 돌아와 이혼하는 커플들도 있다지 않은가. 그러니 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친구들의 습관과 취향과 버릇을 오롯이 맞닥뜨릴 이번 여행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즐거운 추억이 될지 생각해 보는 건 예방접종처럼 필요했다. 하지만 생각해봐도 정답이란 게 따로 없었다. 친구던, 부부던, 부모자식간이던 그저 상대를 위하고 이해하려는 마음과 바른 예절을 지키는 도리보다 더 건강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노하우가 없는 것이다.

사실 내가 이런 예방접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했다. 진과 나는 각자의 의사표현과 자기 철학이 뚜렷한 편이라 의견이 대립될 때는 논쟁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러다보면 뒤끝에 빈정이 상하기도 했다. 우리는 20대 초반, 독서토론을 하면서 정기적으로 만났는데 주제에 관한 논쟁을 논쟁으로 끝내는 편인 나는 감정을 상해하는 진이 부담스러웠던 지라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겠다는 착안이 들었던 것이다(진은 놀랍게도 그런 버릇이 없어졌다^^). 정확한 걸 좋아하고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해야 하는 나의 속성상 그 일은 미리 다짐을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주로 한국에서 살아온 두 친구는 물질이나 돈에 관한 이야기를 서슴지 않지만 나는 절대 대화의 주제로 삼지 않는 것이 소유론적 개념이다.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속으로 불편해 하기보다 슬그머니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야겠다고도 다짐한다. 그러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행이 시작됐다. 그리고 잘 다녀왔다.

우리는 서로를 배려했다. 예를 들면 바닷가에서 긴 시간을 보낸 적 없는 진은 하염없이 뒹굴며 바다를 즐기는 나를 배려해서 처음으로 오랜 시간동안 모래밭에 앉아있었고, 지역적 영향으로 보수성향이 된 수는 진보성향의 진과 나의 자한당 욕을 감내하며 들었고, 재화의 움직임과 메이커와 가격을 궁금해하는 두 사람의 속세 이야기를 나는 그러려니 들었다(속으론 딴짓을 했다^^).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권하고 상대가 가고 싶어하는 곳에 들르고 상대가 불편해 하는 것을 함께 걱정하고 상대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니, 시간이 좋게좋게 흘러갔다. 또 한번 인생수업이 된 것이다.

물론 나로서는 익숙한 가족과의 여행이 상대적으로 떠올랐다. 어떨 땐 침묵하는 남편과의 시간이 그리웠다. 수다를 많이 떨면 뒤끝에 허무를 느끼는 성향 때문에 적당한 침묵을 좋아하고, 또 자연을 만나서 자연과 대화하길 즐기는 내가 이틀동안 반달치 수다를 떨고 두달치 이야기쯤 듣는 버거움을 경험했으나, 말과 웃음과 추억과 인생의 공유로 가득했던 친구들과의 여행이 색다른 재미를 준다는 사실도 깨달했다. 이번 여행을 즐거워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또다른 기쁨으로 남으니 그것도 큰 기꺼움이었다. 그리하여 어쩌면 우리는 조만간에 또 함께 여행을 떠날지 모른다.

친구들과의 여행, 이것은 또 한가지 한국 사는 즐거움이 될 듯한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