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기 좋은 주

미국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 과연 50개 주중 어디에 둥지를 틀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함께 연대해서 일하는 동료가 있을 때는 그곳에 가면 되지만 남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서 우리는 막연하게 50개 주를 펼쳐 놓고 머리를 맞댔다. 처음에 남편과 막내는 전에 살던 매사추세츠로 가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물론 나도 그곳을 너무 사랑해서 후보에 넣긴 했지만, 두 사람처럼 당연하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매사추세츠는 정말 아름답고 우아하면서 지적이고 진솔한 곳이지만 길고 혹독한 겨울은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마저도 사랑스러울 수 있겠으나, 흰 눈의 구릉지대로 변신하는 1월에 반팔을 입고 거니는 청년들과 다르게 나는 정말 고난의 시간을 맞이한다. 캘리포니아에서 매사추세츠로 이사해 대면한 첫 겨울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살을 에는 칼바람 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살아서 돌아다녔다. 3월엔 매화나 산수유, 동백꽃이 피어야 하는데 눈꽃만 피니 한숨이 나오고, 4월에 내리는 흰 눈은 슬프게도 가슴을 짓눌렀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지리한 겨울을 반으로 가르기 위해 피설여행을 떠났다. 다만 며칠이라도 가벼운 옷차림으로 햇볕 속에서 뒹굴다 오면 나머지 겨울이 견딜만 해졌다.

나는 남편 없이 아이들과 지냈던 겨울동안 많은 사건사고를 겪었는데 그것이 치명적인 원인이 되어 결국 다른 주를 선택하게 되었다. 눈 길에 한번은 차사고를 내고 한번은 차사고를 당해 상당기간 통원치료를 받았고, 한번은 동네 동양인들의 미니밴 여러 대에 유리창을 깬 범죄도 당해봤다. 그때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했던 사람은 동네 주민이었는데 한국으로 오는 바람에 진행상황을 지켜보진 못했으나 분명 벌은 받았을 것이다. 쌓인 눈을 걷어내고 차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바퀴가 눈 턱을 오르지 못해 걸어서 학교에 데려다주고, 두텁게 얼음막이 낀 앞유리창을 녹이다가 녹이다가 시간이 촉박해 조그맣게 구멍만 내어 아슬아슬하게 운전을 한 적도 있다. 실내 주차장이 있으면 해결될 사안이지만 문제는 예산이겠지.    

보편적으로 인종차별이 존재하지 않고 지성인이 많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한번 가까워지면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매사추세츠는 여전히 내 가슴속 고향이다. 이 자리를 빌어 보고싶고 그리운 친구들께 당신의 손짓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매사추세츠행을 포기한 이후 우리는 조지아에서, 캘리포니아에서, 매사추세츠에서 살아본 경험에 한 주를 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정을 추구하는 타입은 아닌 게다.

현재 막내의 학교가 전 학생 IB시스템을 취하고 있어서 IB학교를 찾다 보니 아리조나에 꽤 좋은 학교가 많았다. 피닉스와 세도나도 멋지고! 그런데 인텔의 전회장이 퇴직 후 설립했다는 IB학교들은 명성에 걸맞게 waiting list가 길었다. 생활비가 적게 들고 춥긴 커녕 뜨거운 아리조나와는 그래서 굿바이.

큰아이가 인턴에 이어 갭이어 동안 일하게 될 곳이 시카고라 그곳은 어떨까 했지만 칼바람이 유명한 곳인만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큰아이는 시카고 사랑에 빠졌다. 도시가 정말 멋지단다. 하지만 엄마가 견딜 수 있는 날씨가 아니라고 해서 그곳도 바이~

시애틀에 살았던 시동생이 시애틀 자랑을 많이 해서 찾아보니 학군 좋은 곳은 집값과 생활비가 매우 비싼데다 날씨는 영하로 내려가지 않지만 겨울 우기때문에 해 나는 일수가 미국 평균 205일인데 비해 152일 정도였다. 한국에서 미세먼지로 덮인 회색하늘에 트라우마가 생긴 터라 군청색 하늘과 흰구름에 대한 동경을 쫓아 이곳도 안녕.

한국 수입원으로 미국에서 살 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사항은 (주거비포함) 물가다. 현지 직장인 경우 주마다 물가 대비 임금이 책정되지만 환전하는 경우엔 물가 싼 주가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지낼 수 있으니 말이다. 참고삼아 싼 주를 살펴보면 미시시피, 알칸사스, 오클라호마, 미시간, 테네시가 1위부터 5위를 차지한다 (cnbc통계). 그런데 한인으로서는 아무래도 범접하기 어려운 이름. 게다가 학생이 있으니 학군을 고려해야 하는데 아다시피 학군이 좋으면 동네는 비싸진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짜장면도 먹기 힘든 곳을 선택하나?

이렇게 저렇게 살펴보면 역시나 산 좋고 물 좋은 곳은 없다. 환경 좋고 학군 좋으면 당연히 그 혜택을 돈으로 치뤄야 하고 극한이나 극서의 날씨와 따분함을 견디는 대가는 렌트비와 물가로 보상이 따른다.

그리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잠시동안 탐험했던 시도를 멈추고 범위를 획기적으로 좁히니 버지니아와 메릴랜드가 남았다. 날씨 적당하고 자연과 주거환경 좋고 한인마켓이나 식당도 많고 여행하기 수월하고… 주거비용 비싸지만 막내가 가고 싶어하는 학교가 메릴랜드에 있고 남편이 1년동안 적을 둘 곳이 DC여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메릴랜드로 가게 됐다^^. 메릴랜드 주민 여러분 잘 부탁드립니다^^

주를 정하기 위해 지역정보를 찾으면서 나는 특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50 개 주중 어디가 살기 좋아요? 하는 꽤 많은 질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좋다고 대답한 사실을 말이다. 직장, 학군, 주변환경, 날씨, 자연… 각자의 필요에 의해 살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최고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건 큰 복이다. 잘 산다(살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사실 한국에 살면서 한국이 제일 살기 좋은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한가지 조건을 붙이긴 하지만, “돈만 있으면…” 그런데 돈 있으면 어디든 살기 좋다. 그래도 한국을 살기 좋은 곳으로 추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 멀리서 그리워하는 거 말고 한국에 살면서 자식교육도 시키면서 살기 좋다고 말하는… 한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나는 조만간 매릴렌드가 제일 살기 좋아요, 라고 외칠 기대에 부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