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좀 바뀔래요? – 나이가 뭐라고…

막내가 화가 났다. 아직 사춘기 용광로 무드트랙인 울 막내의 심기를 이번엔 어떤 문제가 건드렸을까, 나는 공정한 재판관의 무드로 심상히 묻는다. 무조건 편을 들어주지 않고 논리성과 합리성을 따져 대답해 주므로 막내는 참고삼아 엄마의 의견에 귀를 잘 기울인다. 제 편을 들어주면 신나 하고 반대 의견을 내도 처음에는 팩폭(fact 폭격)이라느니, 엄마 미워요, 하는 대항성 발언을 하지만 곧 생각을 정리할 줄 알아서 나는 편하게 말할 수 있다.

이번에 화가 난 자초지정은 다음과 같았다.

그간 막내는 학교에서 여는 크리스마스 바자 준비 때문에 몸과 마음과 손가락이 분주했다. 공동 캡틴을 맡고 있는 동아리에서 양초를 만들기로 한 때문이다. 아이디어 헌팅을 하고 포스터를 만들고 웹서핑을 하고 모든 재료를 주문하기까지도 시간이 걸렸지만 배송된 택배상자를 열어 낱개포장한 수십개의 유리잔을 하나하나 들여다본 후 다시 싸고 흠이 있는 건 반송에 재주문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이 엄마는 솔직히 지나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건 좋으나 금 같은 시간이 정처없이 흘러서 정작 해야 할 일들엔 덜 할애가 되니 말이다. 어쨌거나 한참 대학 입시로 바쁜 12학년 캡틴을 배려해서 혼자 동분서주한 것까진 문제가 없었다. 바자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테이블 정리를 하는 동안 캡틴 선배와 다른 한 친구에게 설거지 마무리를 부탁했던 모양이다. 설거지를 하기로 한 두 사람이 30여분쯤 후에 돌아와서 벙글대며 다 했다고 했단다. 그런데 다음날 디자인선생님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는데 첨부된 사진 속 디자인실 싱크엔 초를 녹이느라 사용한 도구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막내는 어찌된 영문인지를 파악한 후 두 사람에게 앞으론 보다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멘트를 날린 모양이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한 친구로부터는 사과의 메시지와 함께 설거지를 마치겠다는 답변이 왔는데 캡틴선배는 사과는 커녕 기분이 나쁘니 다음날 만나서 얘기하자는 답변이 온 것이다. 막내는 오늘 일찍 등교해 선배를 만났다. “엄마, 글쎄 그 오빠가 자기가 두 학년이나 위인데 나이도 어린 후배가 건방지게 그 따위 충고를 했다고 너무 기분이 나쁘대. 그런데 나이가 많으면 행동을 더 잘해야지 나이 어린 사람한테 충고 듣는 것만 신경을 쓰나요…” 막내가 열을 내며 말하는 동안 그 헤프닝을 그냥 치기와 장난 정도로 여기고 있던 내 마음이 많이 무거워졌다. 17세인 소년이 살아가는 방식이 안타까워서… 있어야 할 곳엔 없고 없어야 할 곳에 있는 나이의 혼란 때문에…

사실 그날 오전, 나는 사우나에 가서 반대의 경우를 보았다. 보통 탕에서 몸을 불리고 안마탕과 사우나를 들락거리는 동안 물품이 든 바구니는 칸막이벽 위에 올려놓는다. 이후 때를 밀려고 개인 수도를 찾을 때면 많은 자리에 물품만 놓여있고 사람은 없다. 빈자리를 찾으면 다행이지만 아니면 누군가의 대야를 한쪽에 밀어 놓고 그 자리에 앉는다. 그러다 사람이 오면 의자와 대야를 들고 철새처럼 다른 자리로 옮겨간다. 그 자리는 애초에 누군가의 자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다투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한국의 대중목욕탕 문화를 혼자 거부하는 처사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한다. 설령 고집을 부려 앉아있더라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렇다고 매번 뿌연 물안개 속에 대고 자리를 맡지 맙시다, 큰소리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허나 진정으로 외치고 싶다. 자리를 맡아 놓지 맙시다!) 다들 그런 줄 아는 문화를 혼자 아니라고 외치는 스트라이크는 일의 경중을 따져 일으켜야 한다. 사사건건 들고일어나면 사회부적응자가 되버리니까. 목욕탕에 자리를 맡는 일은 정의와 상관없으므로 그러려니 한다.

하려던 이야기로 다시 넘어가서, 나는 오늘 다행히 빈자리를 발견해 앉았다. 조금 있다 할머니 한 분이 내 옆자리의 물품을 치우고 앉으셨다. 10여분쯤 지났을까, 대여섯살 되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한 엄마가 자리주인이라며 나타났다. 할머니는 조금 기분이 상하신 듯 했지만 느릿느릿 자신의 물품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탕으로 향했다. 아이 엄마는 누군가의 잔재를 없애듯 주변에 열심히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대중 목욕탕에 내자리가 어디 있겠어요… 라는 말을 겨우 삼켜 둔 내 목울대가 그 모습에 더욱 욱씬거렸다. 만약 할머니가 저항을 하셨다면 내 오지랖은 기어이 할머니 편을 들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관심을 접으려 했는데 아이 엄마의 행동이 너무 과장된다. (이런 참견) 실례입니다만… 아이한테 본을 보이셔야죠. 엄마는 아이에게 그런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람이에요… 이번엔 그 말이 올라와 혀뿌리가 불뚝댄다.

이 헤프닝엔 네 가지 오류가 있었다. 첫째는 자기 것이 아닌 자리를 자기 자리라고 주장한 오류, 둘째는 거동이 부자유한 약자를 돕지 않은 도의적 오류, 셋째는 할머니가 머문 자리를 과장되게 청소한 오류(할머니 의자는 치워져 있었다), 넷째는 아이에게 이 모든 오류를 교육시킨 오류.

여기에서 성을 내는 것은 지나친 오지랖이라며 내 이성이 그냥 돌아오신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하는 것으로 끝내라고 말을 해서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지만 이번엔 부디 옆에 있는 아이가 오동통한 이 아줌마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게 있었으면 하는 복잡한 바람이 일었다.

막내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무거워진 이유는 사실 조금 더 복잡하다. 어쩌면 17세 선배도 환경의 영향으로 무심결에 나이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을 배웠을 지 모르겠다. 아니 그랬겠지. 한국에는 장유유서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가 삼강오륜에서 무조건 나이가 많으면 대접을 해야한다고 가르치진 않았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다고 가르쳤을 뿐이다. 이 순한 생각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연장자이니 무조건 존중과 공경을 받아야 한다는 의식은 오류다. 연장자가 더 훌륭하고 존경할만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아이 엄마가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했어야 미풍이 되는 건 거동이 불편한 약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와 상관없이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미풍을 지키면 된다. 그러면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동은 사라질 것이다. 나이는 ‘절대가치’가 아니다.

있어야 할 데 없어진 걸 보았는데(목욕탕에서) 없어야 할 데 나타난 나이(17세 소년)… 나이 뿐 아니라 진정한 가치관에 대한 혼동, 우리는 이런 것을 찾아 하나씩 바꾸어 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