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나는요 교포

영화 그린 북을 보았다. 실제 1960년대를 살던 두 남자의 감동적인 우정이 모티프가 된 영화다. 별볼일 없이 주먹만 센 이탈리안 토니는 뉴욕에 살면서 흑인을 은근히 차별한다. 어느 날, 실직상태가 된 토니는 미남부 순회공연이 예정되어 있는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보디가드이자 운전기사 노릇을 하기로 한다. 8주동안 꽤 후한 주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토니는 선착금으로 절반을 받고 8주동안 짜여진 일정이 빠짐없이 수행됐을 때 나머지 액수를 받기로 한다. 흑인에 대한 남편의 편견을 아는 아내는 토니가 얼마 못 버티고 돌아올 것을 걱정한다. 토니는 충분한 대가를 받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대꾸한다. 토니의 아내는 12월 23일 마지막 공연이 끝나면 크리스마스 전까지 꼭 집으로 돌아오라고 엄포를 놓는다.

남부에서는 Jim Craw 법(separate but equal)으로 대놓고 인종차별이 자행되고 있어서 고용인 토니는 어떤 숙소나 식당도 이용할 자유가 있지만 보스인 돈은 제한된 숙박소와 식당을 이용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그 뿐이 아니다. 연주회를 주최한 호스트의 집에서 기품 있는 피아니스트는 박수갈채와 찬사를 받으면서도 백인들이 사용하는 실내 화장실을 쓰지 못하고 야외 간이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말을 듣는다. 멋진 양복점에서는 옷을 착용해 보지도 못하고, 야간에는 일정 지역을 돌아다니지 못하고, 백인들의 바에서 술 마실 자유도 없다. 카네기 홀 2층의 궁전 같은 집에서 거주하고 집사를 거느리고 바르고 고상한 언어를 구사하며 멋진 문장으로 토니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돈인데 말이다. 남부에서 돈은 피아노 앞을 떠나면 들판에서 노동을 하고 연주회장 입장조차 금지된 다른 흑인들과 다를 바 없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백인들에게 묻지마 폭력을 당한다. 그린 북의 리스트에서 벗어난 자유는 없어보였다. ‘그린 북’은 흑인들이 차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호텔, 식당, 주유소 등의 정보가 들어있는 여행안내서다. 1936년 우체부 빅터휴고 그린이 창간한 책으로 1966년까지 발간되었으며 1964년 Civil Rights Act, 즉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되기 전까지 흑인에게 성서만큼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토니는 보디가드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내지만 이 모든 수모나 위험을 무릅쓰면서 돈이 왜 Deep South, 백인들의 소굴로 순회공연을 떠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쩌다 토니로 인해 곤경에 처했다 빠져나온 돈은 백인들의 횡포에 토니까지 싸잡아 원망을 한다.토니는 변명이랍시고 자신의 생활은 흑인의 것보다 나을 것이 없고 ‘네 인생이 나보다 낫다’는 궤변을 토해서 돈의 격분을 산다. 돈은 연주회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가정도 잃었고 자신은 결국 백인도 아니면서 흑인도 못 되는 철저한 외토리일 뿐이라며 울분을 터뜨린다. 수많은 헤프닝을 헤쳐가면서 긴 여정속에서 속마음을 나누는 두 사람, 그렇게 속을 비워낸 마음 안에 대신 진한 우정이 쌓인다.

주최측 횡포로 마지막 공연을 끝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 성탄절 이브는 얄궂게도 눈보라가 성질을 부린다. 눈을 뚫고 오랜 시간 운전을 하다가 눈을 뜰 수 없도록 지쳐버린 토니가 귀가를 포기한 순간, 두 사람의 자리는 바뀐다. 돈이 운전을 하고 토니는 뒷좌석에서 잠을 잔다. 돈은 토니가 아내와 한 약속을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꼿꼿이 피어난 찬란한 우정의 클라이막스다.

영화는 따뜻한 우정이 생산해낸 무한 감동의 대잔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엔 칼자국처럼 돈의 아픈 대사가 진하게 박힌다.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철저한 외톨이’

오랜 시간 동안 고국을 그리워하면서도 몸은 미국에 머물어서 조금씩 조금씩 미국사람이 되가는 사람들…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존재. 이것은 흡사 교포들의 세계이며 한국에 살면서 내가 느꼈던 내 모습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나는 14년동안 철저하게 한국인으로 살았다. 수도없이 I’m Korean을 말하면서… 하지만 한국에서는 미국아짐으로 불리웠다. 한번은 정말 막막하도록 고독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집렌트를 줄 때였다. 한국은 입주자가 집청소를 하는 문화지만 나는 이를 바꾸고 싶었다. 길거리나 유원지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까지 짚어 볼 좋은 기회였다. 이사를 나가는 사람은 자신의 쓰레기는 물론이고 새로 입주하는 사람을 위해 기존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것이 선하고 바른 예절이다. 우리집은 그렇게 양도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틀에 걸쳐 집의 피부가 벗겨질만큼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첫 세입자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구두로 했지만 이사 나갈 때 처음의 상태처럼 청소를 해주십사 약속을 했다. 그런데 두번째 세입자가 들어오는 날,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아 문제를 제기했을 때, 두 세입자와 부동산 업자가 한국에서는 들어오는 사람이 청소를 하는게 맞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순환을 시키면 되는 사안이라고 맞섰지만 3대 1로 열세에 몰린 내 아이디어는 그저 한국실정과 맞지 않는 틀린 생각일 뿐이었다.

그린 북의 돈은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남부로 순회공연을 떠난 이유다. 

어떤 이는 그냥 한국의 문화대로 살면 편하지 않겠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그릇된 문화를 묵과하면서 동화되는 건 퇴행과 같다. 당신이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이 잘 되길 바란다면 용기를 낼 곳에서는 용기를 내어 주세요!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치워야 하는 습관이 한국을 더 아름답게 만들 것이란 예측은 무리한 생각이 아니다. 내가 양보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들은 별스런 사람을 만났다고 할 지 모르나 한 알의 씨앗으로부터 꽃은 피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