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봉변을 당한 후에 단상

만 하루가 지났는데 만 하루 전에 찍은 사진만큼이나 어제의 일이 극명하게 떠오른다.

그 남자의 왼쪽 뺨에 새겨진 잘은 문신과 팔에 보이던 어지러운 얼룩, 그 긴 팔 끝엔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커다란 눈을 맑게 뜬 채 우리를 응시하던 네다섯살 된 아이의 손이 쥐어져 있었다. 두툼한 입술을 정신없이 움직이며 만담을 하 듯 이어진 말에 f로 시작하는 욕이 사정없이 섞인 걸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던 나는 마치 간장공장공장장은 강공장장이고 된장공장공장장은… 이란 말장난처럼 들었다. 가까이엔 다른 사람이 없었지만 우리한테 말을 하는 듯도 아닌 듯도 해서 그냥 걸어가려는데 남편이 무언가를 인지한 듯 놀란 목소리로 그를 향해 Excuse me?라고 물었고 그제서야 나도 이상한 욕지거리 맞다는 확신이 섰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난생처음 보는 우리를 향해 다시 f로 시작하는 욕을 문장속에 마구넣어가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는데 내가 알아들은 건 경찰 부를래? 경찰 불러 정도였다. 저 사람 이상하구나,란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서 대적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지만 내 시선이 자꾸 천진하게 그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는 아이에 가닿으며 이 아이가 제 아비의 난삽한 말을 가장 크게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어쩌면 영어로 된 욕이 와닿지 않은 이유도 있겠고 우리가 잘못한 것은 없으므로 제 3자의 입장에서 단지 그의 지X을 목도하며 미친X, 하고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자신의 딸 앞에서 지지리 못난 짓을 하고 있는 그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화가 치미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당신, 부끄러운 줄 알아. 당신 딸이 지금 다 듣고 있잖아…

내 입은 또 어떤 불똥의 씨를 건드릴 줄도 모른 채 마음속 분노를 큰소리로 내뱉고 말았다. 이후 그가 무어라 하긴 했는데 빠른 영어라서 잘 알아듣지도 못했고 남편이 잡아 끌어서 바람결에 그저 웅얼대는 목소리만 섞어 들었을 뿐이다.

묻지마 봉변… 나이 쉰즈음 되니 이런 경험도 해본다. 허탈하기도, 무섭기도, 안 하고 살면 더 좋을 경험이란 생각을 하느라 잠시동안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전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일을 당했는가 황당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아무리 봐도 그 인형같은 아이였다. 우리는 한 번 당하고 말겠지만 아이는 아빠의 추태를 수없이 보며 자랄 수도 있는 것이다. 직접 아이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아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하는 부모의 행동이 얼마나 아이에게 악영향을 미칠지 그 아비는 모르고 있다. 그런 모습들이 머릿속에 남아서 훗날 딸에게 어떤 불을 지필지... 아시안을 보면 무조건 혐오에 빠져서 욕을 해주고 싶을지 혹은 반면교사로 아빠처럼 행동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을지… 어여쁜 아이야, 부디 후자의 길을 걸어줄래?

생각해보면 그 남자도 자신의 나쁜 체험으로 인해 아시안 혹은 한국인(한국말을 인식하고 그랬을 수도 있으므로)을 혐오하게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미성숙하고 황당무개한 화풀이로 해결될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하루속히 깨닫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무엇보다 참다운 부모란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서 자녀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알았으면…

나이가 들면서 때때로 나는 한 여자로서가 아닌 엄마로서의 나를 돌아볼 때가 많아졌다. 딸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해서 세상의 가치를 논하는 것을 들을 때면 깜짝 놀라면서 어느새 이렇게 커버린 딸들에게 나는 과연 어떤 엄마일까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딸들에게 나는 돈이 많지도, 학교 교육에도 별 관여를 안 하고 사는 엄마임에 틀림없다. 사회적으로 지위를 차지한 엄마도, 집안을 번쩍번쩍 쓸고 닦는 엄마도, 사교계의 여왕도 아닌 엄마다. 매우 평범해서 특출난 것 없어 보이지만 한가지 욕심을 낸다면 나는 자랑스러운 엄마이고 싶다. 어디서든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은 엄마이기를 바란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면 될 것이므로... 양심을 속이지 않고, 내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지 않고, 질투 시기같은 것 하지 않고, 세상의 잇속을 따라 살아가지 않고, 겉과 속이 같고,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건 내 꿈이지만 솔직히 나는 모든 부모가 그런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그 남자, 네 딸아이가 다 듣고 있다는 말의 속뜻을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불현듯 어느날 작은 동양여자가 화를 내면서 욕지거리 하는 대신 그런 말을 내뱉었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결국 자신이 딸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깨달음을 갖고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면... 나는 그런 소망을 미미하게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