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21 년 전 흘린 엄마의 눈물

연아야 일어나야지… 엄마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여명조차 흐릿했던 창 밖, 새벽 공기가 서늘했고 덕분에 그 날이 어떤 날인지 나는 왜 인적이 뜸한 도로변을 걷고 있는지 한적한 전철을 타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 지 맑게 생각할 수 있었다. 예약해 두었던 미용실로 들어갔고 안내 된 의자에 앉아 마냥 감고 있던 눈을 뜬 순간, 어색한 내 모습때문에 뜬금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처음으로 남의 손에 의해 화장한 내 얼굴이 나 같지 않아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할 이 날에 나를 빛내주기는 커녕 3류 여배우처럼 알록달록 우스꽝스럽기만 해서, 고가의 소문난 미용실을 고민 끝에 취소하고 저렴한 곳을 찾았던 막판 뒤집기가 후회스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지금 같으면 울기 보다는 이렇게 저렇게 고쳐주세요, 라고 말했을 텐데 그때는 왜 바보같이 울었는지 모르겠다. 미용실 전체를 총지휘하느라 분주했던 원장이 달려와 화장솜으로 철쭉처럼 진분홍분홍한 아이섀도우를 지우고 볼터치도 지우고 11자로 뻗은 눈물 자국도 지운 후 성의없이 몇 번 붓칠을 하더니 내 신부화장은 끝이 났다고 했다.

4월의 신부,

나의 신랑과 친구들이 안타까운 입술로 예쁘다고 위로를 하고, 그들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어차피 벌어진 일에 대해 길게 한숨짓지 않게 태어난 나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하얗게 한 번, 분홍으로 한 번, 드레스를 갈아입고 덕수궁에 핀 꽃에 기대어 꽃의 힘으로나마 화사해질 사진을 박는다. 화장때문이라기 보다 어색한 미소때문에 더욱 촌스러워 보이는 웨딩 앨범, 그 안에서 화들짝 핀 목련과 자산홍은 아직도 1996년의 4월을 맘껏 빛내고 있다.

그날 앨범 촬영을 끝낸 후 곧바로 결혼식장에 갔고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으니 하나씩 둘씩 반가운 얼굴이 고개를 내밀어 인사하고 그들과 사진을 찍고 시간이 흐르고 신부 행진이 시작되고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며 이완시켰던 얼굴을 한 순간에 오므려 경건한 촛점을 아래로 향한 채 아버지 손을 잡고 신랑에게 걸어갔다. 별달리 예행 연습을 하지도 않았고 지침서를 읽은 것도 아닌데 아버지와 나는 보폭도 잘 맞추어 평온히 걸어갔다. 그 순간, 딸의 손을 사위에게 넘겨주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때는 염두에 두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이 이제야 궁금해진다. 엄마는 많이 우셨다. 시집 안 가냐고 성화를 부리실 때는 언제고 신부대기실에 한 번 들어오지도 못하고 바깥에서 손님을 맞은 후 예식장 의자에 앉아 울기만 하셨다. 엄마, 왜 울어요? 울지 마세요. 나는 가족사진을 찍을 때 옆에 계신 눈이 빨간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나를 떠나 보내는 게 아니에요. 아들을 하나 더 얻으시는 거지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지극하게 그랬다. 그날 하루,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탯줄에서 잘라내 듯 딸을 떼어서 사위에게 꽁꽁 묶는 인륜지 통과의례를 혼자 치루신 듯 하다. 이후 엄마에게 나는 내 남편의 반쪽이었다. 나 혼자일 때보다 둘일 때 더 평온하고 흡족하게 바라보셨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은 자식들 내외를 하나로 묶는 덕행을 잘 쌓으셨다. 며느리와 사위를 한 자식이라 여겨 고부, 장서간 갈등이 없었으며 부부사이가 좋은 것이 효도처럼 느끼게 하셔서 함께 할 때 좋은 금술을 감출 필요가 없어 마음이 참 편했다.  

그로부터 스물 한 해가 지난 오늘, 돌이켜보면 남편과 잘 살아야 한다는 나의 의무감이나 잠재의식은 그런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부부싸움을 해도 친정에 갈 엄두를 못 냈고 남편 흉을 함께 보며 위로 받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속상해 하실까봐 그랬다. 어떨 땐 나도 부부싸움 후에 쪼르륵 달려가 쉴 수 있는 친정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때도 있지만 그랬다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남편 곁 뿐이란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갈 지도 모르겠다. 내가 반쪽으로서 남편에게 꽁꽁 묶여 하나가 된 것, 그건 엄마가 21년 전 4월, 내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치룬 의식의 열매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