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김기사의 반전

막내와 합동작전을 벌이기 시작한 그 순간, 우리는 서해안 꽃지해수욕장을 30여분 앞두고 있었다. 남편이 2박 3일 외유를 하는 동안 봄의 나날이 참을 수 없게 맑았다. 먼 산은 남청색을 띄고 햇살에 빛나는 고려청자처럼 하늘이 푸릇한 광택을 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 밖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어머어머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보스턴의 하늘을 옮겨다 펼친 듯 한 점 그을음 없는 공기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이런 날, 집에 머무는 건 날씨에 대한 실례였다.

낡은 휴대폰의 충전상태를 확인하고 물과 밤과 방울토마토를 넣은 가방과 모자를 챙겨들고 막내와 나는 우리의 오랜 친구 혼다 오디세이에 올라 함께 콧노래를 불렀다. 창문을 확확 열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콧속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을 들이켜도 잔기침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신이 났는데 더욱이 막힘 없는 도로 사정은 기분을 최상으로 업(up) 시켜 놓았다. 그렇게 1시간 반 쯤 달렸을까, GPS로 사용하고 있던 휴대폰 액정에 메시지가 떴다. low battery. 내 낡은 아이폰은 충전 잔류량이 20% 일 때 첫 경고를 내고 10%가 남았을 때 두번째 경고를 날린다. 세상에… 아직도 갈 길은 30분 이상 남았고 내 낡은 아이폰의 충전기는 고대의 유물처럼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을… 평상시 휴대폰을 별로 사용하지 않아서 배터리 소모량을 가늠하지 못한 내 무지는 너무나 컸다. 게다가 나는 길치가 아니던가. GPS가 없으면 운전대를 잡고 생활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단 차는 가던 길을 계속 달리는 편이 나았다. 3/4 을 주행하는데 배터리는 4/5 를 쓴 꼴이니 집으로 가기엔 타산이 안 맞았다. 막내에게 화면의 밝기를 좀 줄이라고 했더니 암흑의 수준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합동작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앞을 보며 운전하고 막내는 화면을 보면서 김기사(한국의 GPS)를 통역했다. 풍요롭게 널린 논밭과 슬쩍슬쩍 보이는 바다의 푸른 물결은 그 순간 내게 어떤 아름다움도 발산하지 못했다. 어쩌면 바닷가 근처에 있는 큰 리조트에 유물같은 내 휴대폰의 충전기가 있을 지 모른다는 희망을 부여잡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순간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기 시작했다. 화면은 최대한 어둡게 했지만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김기사의 잔소리. 도대체 그의 한마디에 얼만큼의 배터리가 소모될까… 그 입을 막고 싶은 충동은 핸들 위에 올려진 손등에 실핏줄을 돋우었다.

한국에 온 이후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이 길안내 시스템이었다.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일단 1키로 전방에서 한 번, 500미터 전방에서 한 번, 300 미터 전방에서 또 한 번, 마지막으로 코 앞에서 지금 들어가라고 말을 한다. 두 번이면 족할 말을 네 번이나 한다. 그 뿐이 아니다. 그 사이사이 안개가 많은 지역이니 운전조심하라 하고, 급커브길이니 조심하라 하고, 사고다발지역이라고, 속도를 체크하는 카메라가 있다고 하다못해 속도방지턱이 있으니 서행하라고 까지 말을 한다. 정말 이토록 징그러운 잔소리를 해대는 기계는 처음 봤다. 제 버릇 개 못 주는 양, 김기사는 계속 말을 했다. 안전운전 하라, 속도를 줄여라…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봐… 진짜 조심해야 할 일들엔 안전불감증이면서 쓸데없는 일에 잔소리가 많은 사회의 일면이 보여 씁쓸했었다. 그러다가 차차 그러려니 하게 되었는데 이순간, 귀중한 배터리를 소모하며 잔소리를 하는 이 시스템, 참말 마음에 들지 않아~~

20여분 달리니 목적지의 이정표가 자주 보였다. 이때다 싶어 과감하게 휴대폰을 껐다. 그렇게 얼결에 꽃지 해수욕장에 당도했고 그 유물같은 충전기가 리조트에 있다는 사실을 안 후 세상에… 나는 두번째 세상에를 중얼대며,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다.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모래밭에 누워서 잠을 자고, 책을 읽고, 해님을 배웅한 후에 100% 충전된 휴대폰을 어둡게 켜고 집으로 향했다. 하늘은 오렌지색, 군청색, 회청색으로 탈바꿈을 거듭하더니 곧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도 깨치 듯 문득 새로운 사실 하나가 깨달아졌다. 길치에다 야맹증을 가진 내게 김기사는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게 길안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P.S. 하지만 길치이면서 야맹증을 가진 사람이 밤에 익숙하지 않은 길을 운전할 때나 도움이 되는 시스템을 백주대낮 만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김기사가 너무 많은 정보를 내보내지 않으면 한국인들의 운전습관은 더 나아질 것이다.

어느 곳에 속도감식기가 있는 줄 모른다면 항상 속도를 지키기 위해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어디서 속도방지턱이 튀어나올 지 모르면 알아서 조심스레 운전할 것이다.

제 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리 차선을 바꿔놓으면 급차선 변경이나 끼어들기가 덜 할 테고

차 안에서 기계 소음이 덜하면 여행할 때 사색이 깊어질 시간도 늘어날 것이다.

생활의 이기가 나쁜 습관을 양산한다면 조금 불편해도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더 건강하고 요령을 피우지 않고 준법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