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막내의 학교를 옮겨야 하는 이유

안방에 놓아둔 행운목 잎사귀가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산소도 주고 행운도 주라고 먼지도 닦아주고 물도 꼬박꼬박 잘 주었는데 볕 잘 드는 창가 옆에서 밑둥지 잎사귀부터 노랗게 시들거렸다. 옆에 있는 셀렘은 3년 동안 강아지 새끼 치 듯 온 몸을 뻗대며 잎새를 늘려가는데 행운목은 갑자기 무슨 이유로 쇠락의 길을 걷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지난 겨울부터 미세먼지때문에 창문을 잘 열지 않은 탓이 큰 듯 해서 얼른 베란다로 옮겼다. 식물도 자식처럼 제 가진 고유의 성질이 달라서 하나하나 다르게 살펴야 하는데 그동안 나 좋자고 행운목에게 몹쓸 짓을 한 건 아닌가… 반성이 됐다.

인생은 ‘같은 고뇌를 무한히 반복하며 보내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뇌의 핵심은 '어찌하면 가장 행복한 오늘과 내일을 만들까' 이다. 누군가는 돈때문에,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 또 누군가는 사랑을 위해 고뇌할 것이다.

행복을 위해 고뇌를 한다? 언뜻 보면 모순된 말 같지만 신중한 고뇌는 결코 인생을 배신하지 않는다. 아무 일이나 무턱대고 신중할 필요는 없지만 부모로서 자식의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만큼은 그럴 필요가 ‘무조건’ 있으므로 그렇게 한다. 자식의 미성년을 어떻게 리드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성년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부모는 고뇌해야 한다. 하지만 미래를 위한답시고 현재의 행복을 간과해서도 안 되므로 자식 키우는 일이란 참으로 녹록치 않다.

큰 아이 때문에 4년 전에 했던 고민을 이번엔 막내때문에 거듭했다. 그러다가 행운목의 노란 밑둥지잎을 보면서 막내를 외국인 학교에 보내자고 결심했다.

발단은 작년 겨울이었다. 학기말 영어시험에서 문법 문제를 틀렸는데 막내가 자신이 왜 틀렸는지 모르겠다 해서 살펴보니 답이 두 개였다. 미국에 있는 제 언니한테까지 확인을 한 후 막내는 영어선생님께 말씀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영어선생님의 태도가 저으기 이상했다. 교사참고서에 그렇게 나와있고 자신이 수업시간에 나눠준 프린트물에도 명백히 적혀있으니 그것으로 공부했다면 다른 답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막내가 두 번이나 찾아갔지만 선생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는 자유학기제라고 해서 시험점수가 성적표에 반영되지 않는다. 나는 원래 점수 몇 점 가지고 교육을 논하지 않기에 성적표에 반영이 되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었다. 자고로 학문이란 진리를 탐구하는 영역이고 교사란 학생들에게 지식과 진리를 잘 전달하는 의무를 가진다. 선생님이 완벽히 알지 못하는 건 큰 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광범위한 지식 중에 선생님도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몰랐다가 알았을 때 인정하고 학생들한테 가르쳐 줄 수 있는 태도는 중요하다. 영어선생님은 그 기본 양심을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긴 논쟁이 있었고 선생님이 둘 다 맞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성적을 고치는 일은 물러서기로 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자질에 대한 실망은 감출 수 없었다. 더불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국학교 교육에 대한 실망도 증폭되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어 영어시험을 쳤는데 5,6개 나온 문법문제를 다 틀려왔다. 살펴보니 참으로 영양가 없는 문제들이었다(예를 들면 to부정사의 용법). 이런 문제를 풀려면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부사적 용법중에 어떤 의미로 씌였는가… 뭐 그런 걸 알아내야 한다. 실제 영어실력과는 무관한 질문들… 문제는 이후로 막내가 그 쓰잘데기 없는 공부를 하면서 진을 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굳이 할 필요 없다 해도 시험에 나올 공부를 안 할 수 없다는 게 막내의 항변이었다. 나는 참으로 암담해졌다. 수학도 과학도 시험을 위한 공부일 뿐 실력을 쌓는 공부란 느낌이 들지 않는 이 시험지옥의 한국교육… 보습학원을 보내지 않는 것도 버거운 항거인데 쓸데없는 공부니 할 필요 없다는 주장을 계속할 수만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주중에는 학생들이 학원에 다니니 오케스트라나 토론과 같은 활동이 주말에 있고 그래서 막내는 주말에 발이 묶였다. 함께 경치도 보고 꽃내음도 맡아야 하는 주말에 부모와 자식은 따로따로 지낸다.

무상교육을 포기하고 학비가 많이 드는 무리를 감행해야 하는 이유는 더 있었다. 막내는 어떤 공부든 원리를 이해해야 넘어가는 학습성향을 가졌는데 한국식 주입교육은 일방적인 통보와 암기를 요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연구한다. 이를 지켜보면서 경제적인 이유로 더 맞는 시스템의 학교를 보내지 않는 것은 방치라는 결론이 나왔다. 미세먼지를 걱정해 창문을 열지 않은 것처럼 노후를 걱정해 비싼 학비를 감당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이기심이었다. 1년 반 후엔 남편이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갈 계획이다. 그런고로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잠시 외국인 학교를 보내는 것이 최선이란 결론이 나와서 막내와 상의를 했다. 처음엔 한국학교에 잘 적응했다며 옮기고 싶어하지 않더니 설명회를 다녀온 후엔 찡그리며 영어문법을 공부하는 대신 매일 콧노래를 부른다. 베란다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게 된 행운목의 노래와 듀엣이 되어 우리집엔 요즘 좋은 소리가 들린다.

우리 부부는 노후에 더 근검절약하게 생겼지만 제법 잘한 결정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