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한여름에 닥친 진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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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가 출동했다. 네 남자가 움켜쥔 들것 위에서 내 몸이 출렁였다. 하늘의 빛이 통째로 쏟아져 이마가 뜨거웠다. 감은 눈꺼풀 속의 세상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샛노랬다. 순간 이상한 느낌, 묘한 비현실감이 밀려왔다. 혹시 이것이 영화 속 한 장면은 아닐까? 장소는 대낮의 해변, 49세 여주인공은 겁없이 바다의 속살을 두고 파도와 쟁탈전을 벌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노여움을 산다. 포세이돈은 여자의 오른쪽 다리근육을 깊숙한 곳에서 찢어 놓는다. 여자는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곧 119대원의 들것에 실려 응급차로 이송되는데… 이쯤에서 ‘컷’ 소리가 나면 여자는 멀쩡하게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그늘 아래 마련된 비치의자에 잠시 몸을 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돗자리와 가방을 챙겨 졸래졸래 따라오는 딸아이 모습에서 강력한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솔직히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나는 단지 급히 방향을 바꾸어 뛰려 한 것뿐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오렌지색 상의를 입은 대원이 물었다. 나이는? 이름은? 주소는? 차는 사이렌을 켜지 않고 달렸다. 이 상황에서 사이렌까지 울렸다면 나는 정말 뻘쭘해졌을 것이다. 모든 상황이 과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멘소레담 같은 파스연고를 쓱쓱 바르고 좀 모자르다 싶으면 압박붕대 정도만 감아주면 될 것을… 119차에 실려 응급실을 가다니… 도대체 어안이 벙벙했고 불현듯 반 백 살 나이가 의식됐다. 인생, 오래 살수록 다양한 경험이 보너스로 주어지지 않는가…… .

달리던 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내가 누워있던 상판은 쑤욱 밀려 병원 침대에 장착됐다. 롤러가 달린 침대는 시멘트 바닥을 굴러 응급실로 들어갔다. 이런 일은 처음 겪지만 더 이상 과장된 행보를 걷고 싶지 않아서 엑스레이도 초음파도 찍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순순히 그러라고 했다. 권위적으로 ‘하라’가 아닌 환자의 선택과 의견이 반영되는 진료시스템은 변모된 한국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나라 여기저기에 합리성이 도입되는 과도기에서 병원은 선두주자인 셈이다. 곳곳에 과잉진료의 적폐가 숨어있지만 정신을 바싹 차리면 피해갈 수 있다. 어쨌거나 나를 본 의사가 종아리에는 인대가 없으므로 근육이 파열된 거라고 말했다.

압박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탈부착이 가능한 반기부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그날 경험한 일 중 가장 낯설었다. 목발을 짚고 다니는 일이 이토록 계산이 필요한 일일 줄 몰랐다. 계단에 오를 때, 계단을 내릴 때, 차를 탈 때, 의자에서 일어날 때, 변기에 앉을 때… 목발이 먼저 나가야 하는지 왼발을 먼저 짚어야 하는 지 몸을 먼저 돌려야 하는 지 다친 오른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순서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무언가에 능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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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에서 집까지 오는 길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잘 짜여진 장애인 돌봄시스템 덕이었다. 우선 호텔에서 휠체어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기차역에 전화해 미리 예약을 해두면 공익근무요원?이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차까지 휠체어로 데려다준다. 기차에서는 역무원에게 미리 부탁하면 종착역에서 휠체어가 대기하고 있으니 그 다음엔 택시를 타고 집에 오면 되었던 것이다. 한국사회도 이젠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수준급임을 몸소 체험한 나는 감격을 먹었다! 단, 모든 짐을 혼자서 이고 지고 끌고 오느라 딸아이는 기진맥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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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발을 짚느라 손을 발을 위해 사용하면 손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생활이 거하게 불편해진다. 이 물건을 저 쪽으로 포르르 들고 갈 수 있는 일이 복 받은 능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밀대로 밀면 바닥에 널린 먼지와 머리카락이 금새 사라지는데 마음은 열 번도 더한 밀대질도 사지를 자유롭게 써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밀대질은 투덜댈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이다. 멀쩡한 사지로 펑펑 놀고먹는 자는 제 가진 권리와 축복을 깨닫지 못한 셈이니 두 번 잘 못 사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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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 중에 하나가 잘못되었는데 고생은 온 몸이 했다. 안 다친쪽 다리는 알이 배길 뿐 아니라 엉치와 허리까지도 아팠고 목발을 짚은 양손바닥은 핏줄이 터져 욱신거렸고 감기몸살로 아프면 누워서 자느라 신경을 쓰지 못할 일도 정신이 멀쩡하니 더 부각되었다. 집에서 한 사람이 제 역할을 못하면 나머지 가족들 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 일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온전해야 우주가 온전해진다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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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우주를 비행한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가 푸른 빛이고 우리가 서로 다투며 살기에는 너무 작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 영향 때문인지 작은 지구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개개인을 흔히 먼지톨로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개인의 시점에서 볼 때 개인이 사라지면 우주가 함께 소멸되는 것이므로 개인은 곧 우주를 품는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실은 우주의 시점에서 보아도 인간은 우주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체다. 예를 들면 먼지와 같이 작은 한 인간의 일부인 다리 하나를 다쳤다 치자. 다리 하나가 불편해지면 온 몸이 불편해지고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가족이 불편해지고 가족구성원이 소속된 사회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사회의 조직이 삐끗거리면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 이후엔 지구… 도미노와 같이 악영향이 전달된다. 지구에 이상이 생기면 태양계에도 영향이 미치고 그러면 우주 전체에 어떤 변화가 초래될 지도 모르는 일, 이것은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키는 나비효과와 다를바 없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즉 개개인이 온전해야 가족이 사회가 국가가 지구가 우주가 온전해진다(이때의 온전함은 육체와 정신을 모두 포함한다).

이 이론은 8번과 같은 지류도 도출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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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인이 나 하나쯤이야 하고 쉽게 하는 행동, 폐수 방기나 오물 투척, 무심코 방출하는 특정 가스가 지구를 망가뜨리고 곧이어 우주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즉 여름 내내 걱정스레 달고 살았던 질문, 지구가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한 이유는, 이 여름에 닥친 폭염과 폭우, 미세먼지와 오존, 이 불행은… 다 내 탓이었다. 우리가 잘 해야 할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