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큰아이 떠나는 날

큰아이는 3주가량 집에 있다 떠났다. 방학동안에 할 일이 많은 미국대학 생활이므로 아쉽지만 아쉬운 마음에 위로는 있었다. 싼 티켓을 끊은 탓에 비행기가 이른 새벽이었고 그래서 공항이 매우 한산했다. 대기실에서 딸아이는 짐을 모두 꺼내 의자와 바닥에 늘어놓았다. 2년 전이 떠올라 나는 두세 칸 물러나 앉아 눈을 감았다. 대학으로 처음 떠나는 그때도 같은 상황이어서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막내와는 달리 큰아이에게는 여유롭게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 돕는 일이었다. 늘 알아서 많은 일을 처리하지만 실수는 가끔씩 어쩔 수 없이 벌어진다. 카타르 항공에서는 가방 한 개당이 아니라 부칠 수 있는 무게의 총합계가 30키로였다. 항공사마다 다른 규정을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겠지… 이 너른 세상을 내가 아는 상식으로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으리…나는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한다.

교환학생 신분으로 유럽으로 떠나는 딸아이의 짐은 많을 수 밖에 없었고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아이템으로 꾸려져 있었다. 그것이 재미있었는지 건너편 의자에 앉은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더벅머리 중국남자 두 명이 매우 노골적으로 딸아이의 모양새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벙글대며 나 한 번, 딸 한 번, 짐 한 번을 쳐다보며 수근거렸다. 한 남자는 아예 담 너머를 구경하듯 몸을 돌려 앉았다. 한국말을 해도 영어로 해도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세상에… 무슨 이런 황당한 사람들이 있는지…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눈치로는 못 알아채는가? 결국 화를 내며 쳐다보지 말라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건너편에서 중국 여인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에게 쳐다보지 말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 남자들은 왜? 라고 묻는 듯 했고 그건 실례라고 답하는 듯 했고 실례라고? 반문하며 어리둥절해 하는 듯 했고 ‘그렇다’는 여자의 말에 쳇 소리를 내더니 두 사람은 각각 3인용 의자에 벌러덩 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남편이 주차장에서 돌아와 합석하니 고개를 들어 빼꼼이 쳐다보는데 문득 처음부터 남편이 함께 있었다면 그들이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올라왔다. 그러자 갑자기 딸아이를 혼자 멀리 내보내는 일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중국 남자들은 허연 배를 드러내며 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볼썽사나와 보였지만 사람의 선한 모습 중 하나가 자는 모습이라 저들도 약한 하나님의 자식이란 감상이 문득 밀려왔다. 그들은 국제적인 매너를 교육받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중국 변방에서 왔고 자기 고향에서는 노골적으로 남을 쳐다보고 구경하는 행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실례는 아닐 지도 모르며 더불어 그들이 달리 위협적인 행동을 하진 않았고 단지 어른이면서 애처럼 굴어서 거부감이 일었다는 상념도 순차적으로 일었다. 몰라서 한 행동이라면 나쁘게 치부할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 헤프닝으로 인해 그들이 국제적인 예절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면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또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을 좋은 눈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건 어쩌면 순진한 내 아이들을 그곳에 내놓는 엄마의 간절한 바람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격하게 믿고 싶어한다!

큰아이는 깊은 허그를 하고 엄마가 믿고 싶어하는 너른 세상으로 떠났다. 우는 막내를 달래며 큰아이가 놓고 간 옷과 물건이 한 보따리라 입구 쪽에 앉아 차를 가지러 간 남편을 기다리는데 빨간 자켓을 입은 여인이 격앙된 목소리를 내며 세 명의 남녀와 함께 우리 앞에 계시는 할머니 쪽으로 걸어왔다.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여인은 그중 한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빨리 자기를 따라 오라 명령하고 “엄마는 짐을 지켜야 하니 여기 앉아 계시라”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남자는 힘없이 여인의 뒤를 졸레졸레 따라 항공사 카운터로 갔다. 남은 여자가 남은 남자를 할머니에게 형사라고 소개했다. 형사는 할머니한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래서 빨간 자켓의 여인이 여행작가이고 오늘 유럽으로 한 달간 여행을 떠나기로 했고 일체의 경비를 공항은행에 환전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딸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할머니는 형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따님이 환전한 돈을 공항은행에서 찾기로 한 모양인데, 공항은행은 10시에 닫거든요. 그런데 본인이 모르고 늦게 오셔가지고는 왜 24시간 안 하느냐고 억지를 부리며 저 공항직원을 쥐 잡듯 잡네요. 은행직원에게 전화를 해서 돈을 찾게 하라고요. 무슨 작가라는 분이 남의 말은 들으려고도 안 하고 규칙도 모르고 저리 억지만 부리시는지… 어머님께서 따님을 좀 잘 타일러 주세요. 대체 저 직원이 무슨 죕니까…”

형사의 말에 할머니가 놀라서 말씀하셨다. “아니, 쟤가 그런 애가 아닌데…”

빨간 자켓의 여인은 50대 후반 즈음으로 보였는데 그래서 나는 세 가지 사실에 놀라게 되었다. 하나는 잘 치장한 지천명 여인의 행동거지에 놀랐고 하나는 그런 사람이 작가라는 사실에 놀랐고 마지막으로 저런 어머니한테서 저런 딸이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차를 타고 오는데 빨간 자켓의 여인이 자꾸 떠올랐다. 그 여인도 내 상식으로는 중국인 남자들처럼 제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거지를 보이고 있었다. 자신의 ‘상식’도 아닌 ‘상상’으로 만든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그 여인을 선한 눈으로 바라보려면 어떤 이해를 해주어야 할까?? 혹 외국에서 오래 살았는데 그 나라에서는 공항은행이 24시간을 했는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그렇더라도 말이다. …… . 내가 원래 세상을 선하게 해석하는 편이지만 그 여인의 머릿속은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검은 하늘이 한 시간 이상 차창을 스치도록 진정한 이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실수를 하고도 배우는 것이 없다면 인간은 성숙해질 수 없을 거라는 이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