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결심한 바를 실천하다

드디어 이사를 했다. 어느 미스테리한 남자분이 꽤 너른 집에서 혼자 산다고 우리 집을 월세로 빌린 덕에 우리도 후다닥 막내 학교근처에 월세를 구했다. 새로 이사 온 집이니 명목상 새 집인데 오히려 옛 집은 새 집이고 새 집은 헌 집이라 아이러니하다.

새 집은 여기저기 땟국물에 젖어 있고 창 틈에는 묵은 먼지가 수북하고 청소하면서 좀 빡빡 닦으면 이 곳 저 곳이 바스라진다. 면적도 1/3정도로 작아져서 여기서 행복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일었지만 급히 구하느라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새 집에서 딱 한가지 좋은 점은 막내의 학교가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층이어서 밝았고 끝 집이라 앞의 동과 동 틈이 열려 있어서 산자락이 보였다. 그래서 이 집을 선택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틈바구니에 낀 산을 바라본다. 요즈음은 미세먼지가 적어서 제법 푸르딩딩한 하늘에 산자락의 굴곡이 멋스럽게 낑겨있다. 그 모습에 나는 가슴을 펴고 미소를 짓는다. 이 집에서 나를 구하는 유일한 장면이다. 옛 집은 창문 전체에 하늘과 산등성이 깔려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각기 다른 유화와 수채화가 보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아 감사하다.

미국은 집 렌트가 월세이므로 많은 세월 렌트로 살았던 우리에게 월세는 익숙한 시스템인데 미국과 한국은 많이 달랐다. 한국에서 우리는 첫 해와 이번 집을 월세로 사는데 집주인들이 공통적으로 자기 집에 세입자가 얹혀살고 있는 정도로 이 시스템을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못도 박지 말라하고 벽에 구멍도 뚫지 말라하고 우리 돈으로 더러운 곳의 벽지를 바꾼다 해도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했다. 사는 동안엔 내 집처럼 살다가 원상복구를 하면 되고 세입자는 엄연히 돈을 내고 법적으로 계약기간동안 그 집의 주인이 되어 살 권리가 있다는 인식 자체가 없어 보였다. 세입자가 안락하고 편히 살 수 있도록 입주청소도 해주고 더러운 벽지는 알아서 교체해 주어야 하는데 방 하나만 반반씩 부담해서 하자고 해도 싫단다. 내 기준으로는 매우 더러운데 집주인의 기준으로는 그 정도면 살만하다고 했다. 창문에 블라인드는 당연히 집주인이 해주는 것인데 큰 인심 써서 겨우 안 방과 거실만 가려주어 딸아이는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다(곧 커튼을 달아주어야지 ㅠ). 모든 것이 낡은 집, 창 틈은 헐렁하고 부식된 철이 가시를 세우고 있는 집이 그 주인의 기준으로는 살만만 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집주인이 원하는 것은 단지 월세를 꼬박꼬박 내고 곱고 깨끗하게 사용하다가 떠나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라 나는 인간적으로 서운하다.

우리는 이사한 후, 옛 집에 이틀동안 머물면서 마치 집의 피부를 벗겨낼 듯 세심히 청소를 했다. 창 틈과 몰딩에 올라앉은 먼지, 유리창과 거울과 서랍 안과 수체구멍까지 먼지 한 톨 없도록 청결히 닦아냈고 타일의 틈은 베이킹 소다와 구연산을 뿌려 칫솔로 문질렀다. 거실의 커튼도 안막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듯해서 바꿔 달아주었다. 그러면서 우리집과 인연이 된 세입자가 이 집에서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기원을 했다. 월세도 꽤 깎아주었으니 우리집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전혀 서운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결혼 후, 평균 2,3 년 꼴로 이사를 하면서 많은 집주인들을 만나며 발견하고 결심한 것이 있다. 우리는 집주인 복이 없다는 사실과, 만약 내가 집주인이 되면 세입자가 서운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배려할 것이라고 말이다. 아무래도 세입자는 집주인보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 수 있으니 그 점을 배려하고 무엇보다 우리집과 연이 닿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기원 때문이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는 집주인이 되었고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보다 부자인 세입자가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결심한 바를 실천한다. 살맛 나는 세상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