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선물 같은 하루

중학교 은사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몸이 무거워 이불 속에서 꼼지락 대던 아침이었다.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시더니 당신이 지금 어디 가는 줄 아느냐고 스무고개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울 선생님의 대화법엔 질문이 많다. 고로 가끔은 당혹스럽다. 장난 같은 질문엔 농어린 대답을 하면 되지만 모른다고 하기엔 상식부족이 심각한 질문도 많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특히나 이미지는 머리속을 빙빙 도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음, 음, 거릴 때가 부지기수다. 원래부터 고유명사 불감증이 있지만 최근엔 정말이지 사람, 사물, 가리지 않고 이름이나 단어를 실물과 매치시킬 수 없어서 곤란할 지경이다. 각설하고, 어쨌거나 요런 질문은 괜찮다. 어디 가시냐고 여쭈면 되니까. 날씨가 좋아서 무작정 시외버스를 타고 속리산으로 가신다고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속리산이 어디냐고 물었고 전화를 끊은 후엔 벌떡 일어나 세수를 했다. 선생님은 제자와 속리산 세조길을 걷고 싶으신 거였다. 그리고 속리산 터미널에 도착해서야 그 산의 이름이 속리산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차례 와 봤던 곳, 네가 속리산이었더냐??

2017년 가을은 단풍이 풍년이다. 어딜 가도 단풍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모과도 열려 있고 감도 매달려 있는데 주홍빛 신나무잎, 갈색 졸참나무잎, 연겨자색 회나무잎, 당단풍의 9손 잎이 풍성하게 하늘 아래 널려 있다. 여름엔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가을은 가물어 나무마다 매우 바스락대는 잎새를 낳았는데 덕분에 오글오글 말려 꽃처럼 핀 단풍도 제법 눈에 띄었다. 가을의 진풍경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지금 한국은 곰팡이 핀 브로콜리가 되었다.

“친구들은 목소리가 너무 커서 숲에 가면 숲이 떠내려갈 지경이야. 숲에선 나무를 만나고 피톤치드를 호흡하고 고요속에서 사색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온갖 세상 수다를 큰 소리로 떠들다 보면 그런 것들을 놓치고 말지. 그래서 숲에 올 때면 친구들 말고 누구랑 갈까, 고민을 하기도 해.”

서울사시는 은사님과 지방 사는 제자가 속리산 입구에서 랑데부를 하게 된 연유다.

사실 나는 전날 혼자서 유명한 단풍나무 숲길을 다녀왔다. 햇살이 창마다 그득하고 바람이 온순한데 먼 산이 맑아서 집을 나섰다. 멀리 이사 와서 또 동그마니 혼자가 되었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혼자 간 것은 아니었다. 자연을 보러 갈 때는 오롯이 자연과의 만남을 기대하므로 옆에 사람 친구가 없어도 외롭지 않다. 그 생생한 체험을 시작한 곳은 월든폰드였다. 월든폰드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무렵 친한 언니들과 근처에서 브런치를 먹고 산책을 하기로 했는데 아줌마 수다가 끝이 없어서 결국 폰드에는 가지도 못 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후로 언니들과는 집이나 카페에서 만났다. 수다를 떨기에 더 적당한 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월든폰드는 누군가에게 소개시켜줄 때를 빼고는 혼자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늘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월든폰드와의 은밀한 데이트가 얼마나 포근했던지... 그런 내게 혼자 속리산을 향한 선생님이 이상할 리 없었는데 선생님은 자꾸 웃기지? 하고 물으셨다. 아니요, 그 선생님의 그 제자라서요^^

떨어져 있는 낙엽을 보면 그 주위에 어떤 나무들이 살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낙엽들은 메마르고 명도가 낮아서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특색이 뚜렷하다. 메이플 트리처럼 단물을 흘리는 고로쇠나무의 잎새는 5손이 왕관같고, 타오를 듯 붉은 단풍들은 손이 몇 개로 갈렸느냐에 따라 당단풍 은단풍 홍단풍 등등 다른 수종이었다. 도토리나무조차 갈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등등 열매의 크기에 따라 그루터기와 잎새 모양이 다르다. 투명한 겨자색 회나무잎은 은은하고 청아한 멋이 높아서 주홍단풍만 예쁜 줄 알았던 내 좁은 소견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알록달록한 숲을 통째로 바라보며 니 어찌 이리 어여쁜고, 감탄을 해도 좋지만 한 나무 한 나무를 살펴 가지와 잎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가는 재미도 새로운 맛이었다. 숲해설가이신 선생님 덕이었다. 가던 길을 멈춰 선 채 두 중년의 여인이 하늘을 우러러 마지막 생명을 간절한 빛깔로 태우는 단풍을 바라보고, 낙엽을 주워 색을 살피고 모양을 구경하며 주거니 받거니 나무에 대해 묻고 답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우리는 지금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구나. 자연, 너를 만나서 너를 끼워서 우리는 지금 셋이서 수다를 떨고 있다… 자연을 찾아와 자연을 소외시키지 않는 대화법을 익힌 하루, 선생님 말씀처럼 선물 같은 하루였다.

학창시절엔 어렵기만 했던 선생님이 깨복쟁이 언니처럼 마음으로부터 친근해진 것은 단지 10여세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나이덕은 아니었다. 고전음악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개인의 이익보다는 사회와 지구를 염려하는 오지랖의 교집합도 있지만 선생님이 35년 전 우리에게 어떤 선생님이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내 마음이 활짝 열려 벌어진 일이다.

“그때 나는 연아나 **, ** (내 친구들)처럼 화목한 가정에서 잘 살고있는 제자들은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지. 내 눈과 귀는 항상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게 향해 있었던 것 같아. 지금도 그 애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너무 궁금하고 잘 살고 있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참 좋아.”

선생님으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은 그래서 없나 보다.

선생님은 아실 지 모르겠다. 그런 선생님이라 전날 하루 종일 단풍구경을 했고 새벽잠을 설쳐 눈꺼풀이 무거웠고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곳을(나는 뚜벅이^^ 차가 없당) 3시간에 걸쳐 3번의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달려간 제자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단지 내 선생님이어서가 아니라 이런 분들이 한국에 계셔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