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무기력과 변덕이 죽을 끓이던 저녁에…

김훈작가 강연회에 가기로 한 날이다. 글솜씨가 뛰어나고 jtbc 뉴스룸에서 잠깐 보여준 말솜씨 또한 예술의 경지였기에 강연을 꼭 들어보고 싶었다. 몇 권 읽고 느낀 김훈씨의 작풍은 권권마다 허무했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그 문장들을 잉태하기위해 들이는 그의 노력과 고뇌가 궁금했다. 캘린더에 표시를 해놓고 몇 주를 기다렸다. 저녁시간이라 남편도 같이 가기로 해서 일찍 귀가했다. 준비를 서두른 덕에 저녁 먹을 시간도 넉넉했다. 마지막으로 불에 요리할 것만 남았는데 그런데 갑자기 손놀림이 느려졌다. 문득 이상한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날씨도 추운 이 저녁에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작가를 왜 만나러 가는 거지? 한국 사는 재미가 이런 거 아니냐고 외칠 때는 언제고…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아침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세수를 한 후 썬크림을 발랐고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갈 차비를 차렸다. 출근하는 남편이 어디 가냐고 물었을 때 그렇게 오늘의 계획을 밝혔다. 그런데 옷을 입기 전에 마음이 바뀌었다. 창밖이 뿌여니 미세먼지로 가득해서 심란했지만 과연 미세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몇 십분 걷는 일이 싫어서 변심을 한 것인지…?? 평상시 내 신조가 한번 뱉은 말은 철저히 지킨다,였는데… 딸들과 남편한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신조를 외치며 살건만… 대체 원인이 무언지??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휙 바뀌는 건지??

사실은 그보다 이른 시각에 한 가지 사건이 있긴 했다.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가 있는 큰아이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누가 가방을 훔쳐갔고 그래서 지갑과 랩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지갑과 랩탑을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두가지 물건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지갑속에 있는 현금과 카드와 아이디, 랩탑 안에 들은 많은 정보와 추억과 학습과 노력이 사라졌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돈과 함께 시간과 노력과 발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카드를 취소해야 하고 아이디를 만들어야 하고 따로 백업을 시켜놓지 않은 숙제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딸아이는 울었다. 랩탑 때문에 더없는 긴축정책이 시작되겠지만 제 속상한 걸 생각하면 원망할 처지도 못 돼서 조용한 한숨은 전화를 끊고 내쉬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평시 같으면 조금 더 뚜렷한 감정으로 마음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아직도 백주대낮에 공공장소에서 그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사회에 대한 토로라던지, 도난주의를 명심해야 할 유럽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었던 딸에게 앞으로 더 조심할 것을 다짐받는다던지, 랩탑 재구매를 위해 이런 저런 궁리를 한다던지 뭐 그런 구체적 액션을 취할 것 같은데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 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 것에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고 아무 의욕도 일지 않고 아무 행동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요 몇일사이의 내 주소다. 이것은 무기력증…

무기력증이란 단어가 떠오르자 엉거주춤 일어나 햇볕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며칠전부터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허무감이 도래하는 현상이 도져서 아침햇살 속을 천천히 걷곤 했다. 아침에 자외선을 쐬면 눈을 통해 체내에 세로토닌이 합성되고 이것이 우울감이나 무기력감 극복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신기했다. 해는 해고 나는 난데 해로 인해 내 몸속 호르몬에 변화가 생기다니… 인체에는 특수촬영(MRI, 초음파, X-ray 등)을 하면 나타나는 수많은 뼈와 지방과 근육과 오장육부 등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호르몬이나 감정, 졸음이나 기억, 망각 같은 기능이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자체적으로 또는 외부와 상관관계를 가지며 연동되어 인간의 생명과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므로 그 신비를 느낄 때면 나는 이상하게 하나님이 떠오른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나고 살다가 사라지는 생명체가 보인다.

조물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복잡하고 신비한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었겠는가. 어찌 몸 속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호르몬이 나와 인생 자체의 의미를 들었다 놨다 하는가. 어떻게 일정 나이가 되면 세월과 맞물려 피부속 콜라겐이 말라가는가. 어떻게 그 복잡한 몸의 구석구석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발끝에서 피가 나는데 머리가 인지하는가, 어떻게 한 몸에 감정도 있고 이성도 있어 때로는 서로 갈등을 하는가… 이 모든 것이 애초에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를 크리스찬이다 아니다로 구분짓지 말고(나는 종교와 상관없이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는데 때때로 독실한 종교인들이 비판을 한다) 그저 인체의 신비만 들여다 봐도, 나무만 봐도, 강아지만 봐도 이 생명들이 태초에 어디에서 기인했을까를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조물주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든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든 조물주인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얄궂게도 여성의 나이 쉰 즈음 되었을 때 호르몬이 급감해서 여러 안 좋은 증상이 생기도록 세팅해 놓으셨다. 그리고 전 세계의 여인들은 같은 패턴으로 늙어간다. 다행히 조물주는 에스트로젠이 대두의 30배, 석류의 625배 들었다는 칡도 만들어 놓으셨다. 나는 이날 조석으로 변덕을 끓이다가 Thank God을 중얼거리며 칡즙을 재주문 했다. 그러고보니 칡즙이 떨어져서 여러 날 먹지 못했다. 몇 달 전 칡즙을 처음 먹었을 때 생리혈이 많아지면서 생리통이 없어지고 무기력증이나 허무감, 불면 등도 해소되었다. 참고로 칡은 찬 성질이라 소음인과는 안 맞을 수 있다지만 여성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나의 부작용은 확실히 줄여주었다. 햇볕과 호르몬과 우울증과 갱년기와 칡즙 …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참으로 많은 것을 만들면서 그 상관관계를 맺어주느라 머리가 아프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