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한국인이 꼭 보아야 할 영화 1987

엔딩 크레딧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개미처럼 올라가는데 관람석에서는 미동도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한 두 사람쯤 진작에 일어났을 법도 한데 계단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열지어 올라가는 하얀 글자들을 보다가 더 이상 부릅뜰 필요가 없어져서 젖은 눈을 감았다. 들고 있던 축축한 휴지로 아예 눈두덩이를 덮어버렸다. 어깨에 와닿는 막내의 손길도, 크크 우리 울보 부모님들 그만 가십시다, 하며 장난치는 목소리도 나를 쉽사리 1987년에서 2018년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맞닿은 어깨가 흔들렸다. 남편도 그렇게 우는 모양이었다.

잠시 익숙해진 어둠 속에 머물고 싶었다.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숨어있고 싶었다. 떳떳하지 못한 모습, 붉어진 콧잔등이와 퉁퉁 부은 눈이 부끄러울 리는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심한 내가 오버랩 되어 가슴이 더 메이고 눈물이 더 나왔다. 1987년이라는 시간과 연세대 앞이라는 장소가 나를 더 그렇게 만들었다. 쉰 생애에서 그토록 자신이 치욕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1987년은 내가 1년 재수를 하고 대학에 들어간 해였다. 그래서 ‘87학번’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고 1987이라는 숫자의 조합은 그래서 개인사에서 특별해졌다. 대학시절 열심히 활동하고 좋아했던 유일한 동아리는 연세대학교에 본부가 있었다. 연대는 우리 학교가 아니지만 마치 제 2의 캠퍼스처럼 익숙한 장소였다.

나는 1987년 한 해, 기록이 의심스러울만치 블라인드 데이트를 했다. 연합 등산 동아리를 찾아 가입하고 2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산에 다녔다. 그리고 사이사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가끔은 옥외데모를 벌이고 있는 대열 뒷자리에 앉아서 무심히 스피커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한번은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농성 대열에 끼었다가 페퍼포그 폭탄을 맞고 비틀대며 맵고 징한 눈물을 흘렸다. 최루탄이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장치가 페퍼포그다. 눈물 흐르는 자리를 칼로 베인 듯 쓰리고 아리게 만드는 것이 페퍼포그의 존재가치였다. 기침을 하고 침을 흘리고… 영화 속 연희가 명동에서 난발이 된 모습이 당시의 내 모습이었다. 이후로는 함부로 그 대열에 끼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캠퍼스 여기저기에 붙여진 대자보 앞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읽으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정말인가? 끔찍하고나… 만 중얼거렸다.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간 과친구에게 보내는 단체 노트에 존경의 마음을 담아 ‘네가 자랑스럽다’고 쓰긴 했다. 하지만 동참해서 같이 분노하고 함께 세상을 개혁해야 한다는 자각이 없었다.

1987년, 내가 대한민국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누군가는 그해의 역사가 가슴 아파서, 누군가는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애도해서, 누군가는 그 날을 회상하며 들끓는 분노에 흘렸을 눈물을 나는 부끄러워 숨마저 죽이고 울었다.

막내가 물었다.

엄마, 왜 그렇게 울었어요? 관객 중에 엄마만큼 우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영화가 그렇게 슬펐어요?

‘1987년’과 ‘연대 앞’이 1598년 노량해전과 다를 바 없이 다가올 막내에게 드는 당연한 의문 앞에서 나는 고백성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모든 걸 밝혔다.

세상에… 엄마가 그랬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지금은 안 그러잖아요, 그때는 용기가 그렇게 없었나요?

막내는 어줍은 위로대신 정직하게 질타했다. 그 질타 앞에서 나는 다시한번 생각의 나락에 빠졌다. 내게 없었던 것은 막내의 결론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용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한가지 다행은 지금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가, 이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고 참여하려 한다는 사실로서 그 과거의 치욕이 한 꺼풀이라도 벗겨진다면 나는 더 열심히 그렇게 살아야 하리라…

1987과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상영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단지 2018년이라서 저절로 그리 된 것은 아니다. 3년 전에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일이지 않은가.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는 그래서 중요하다. 비상한 사업수단으로 거대 기업을 일군 기업인, 정치판에서 자라고 뼛속까지 정치에 물든 정치계 인물, 머리가 명석해서 이런저런 업계에서 일인자가 된 학식인, 배포가 크고 재산이 많고 쇼맨십이 탁월한 자칭 천재… 중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안이함을 재검토하게 해주는 영화가 1987일 터이다. 스포일러는 되지 않으련다. 사실을 기반으로 쓰여졌고 연기로 한 끗발하는 배우들이 다수 등장하는 호화 캐스팅이고 구성도 좋고 이해도 쉽고 재미도 있고 슬픔 중에 카타르시스도 일어나는 좋은 영화다. 그 시대를 주목하지 않아서 막연하게 모르던 역사더라도 잘 정리된다. 감독이 희망을 주고 싶어서 만들었다는 영화, 누가 되었든 상영이 끝나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생각의 무게를 던져주는 영화, 한국인이라면 꼭 한 번 보아야 할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