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친구의 전화번호를 지우다가 

애초에 그 친구와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것은 아니었다. 내 고대유물인 휴대폰을 바꿨고, 내친김에 전화번호 리스트를 정리했고, 그러다 저지른 실수때문에 만나게 되었다.

아이폰을 갤럭시로 교체했더니 이는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 타사 제품 휴대폰이 이토록 다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섣불리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한번 길들여지면 새로운 방식이 달갑지 않은 것은 나이테가 두꺼워질수록 생기는 경향이기도 하다. 차라리 처음 사용하는 거라면 그 그림에 집중하면 되는데 기존에 익숙해진 그림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새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제는 마음처럼 녹록하지도 않고 습관을 바꾸는 일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므로 귀찮은 것이다. 처음 새긴 그림은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실직고를 하자면 그 친구는 지우고자 했던 리스트에 포함돼 있었다.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연락할성 싶지 않은 사람들을 추려봤는데 옛친구로는 그 친구 하나였다. 옛친구는 처음 새긴 그림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연락이 드물더라도 친구라는 믿음에 흔들림이 없다. 그래서 앞으로 연락하지 않을 가능성이라기 보다 내 안의 의지가 그 친구와는 더 이상 교제하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지우려 했다는 설명이 타당할 것이다. 지우기가 아이폰보다 간단하지 않은 갤럭시에서 무의식적으로 아이폰식 모드로 움직인 손가락은 갑자기 화면이 바뀌어 통화음이 울리자 잽싸게 종료버튼을 눌렀으나 하필 휴대폰을 묵음으로 해놓았던 친구는 그냥 내게서 부재중 전화가 온 것으로 알고 반갑게 리턴콜을 했던 것이다.

휴대폰을 가지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모습을 보았던 우리집 식구들은 전화한 사람이 그 친구인 것을 알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원맨쇼 구경하듯 나를 관람했다. 결국 언제쯤 만나기로 가약속을 잡고 통화를 끝내자 두 시청자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냥 형식적인 안부만 전하고 끊으면 되었지만, 그러고 싶어서 애써 버튼을 잘못 눌렀다는 사실도 이실직고했는데 왠지 그 친구의 목소리가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훨씬 밝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다정해졌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 친구에게 그간 심경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고 지금 내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구나… 잘못을 뉘우치고 미안해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면죄부를 주고 싶은 마음은 바로 ‘옛친구’라는 단어가 가진 힘이리라. 나는 제멋대로 상상했음에 틀림없지만 그 친구가 내뿜는 긍정적인 변화를 간과하지는 않았다.

그 친구에게 처음 크게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은 건 아주 먼 옛날, 큰아이 돌 때였다. 그때는 돌잔치를 할 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초대했다. 앞서 통화한 두어 친구처럼 기껍게 오겠다고 할 줄 안 그 친구로부터 요즈음 돌잔치를 한다고 초대하는 행위는 민폐라는 소리를 들었다. 세상에… 민폐라니… 올 수 있으면 오고 못 올 사정이면 안 오면 될 것을 돌잔치에 초대했다고 민폐라 하다니… 아마도 친구는 돌잔치 = 선물이라 연결지어 내린 결론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계산법이었다. 나는 민폐라는 말도 충격이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던 친구에 대한 개념이 10년지기 그 친구와 어마어마하게 큰 간극을 가졌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게 친구는 인생사에서 같이 웃어주고 울어주는 존재였다. 좋은 일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축하할 일 있으면 기꺼이 동참하고 슬픈 일 있으면 나부터 눈물짓는 그런 존재가 친구 아니던가… 나라면 설령 부모님 환갑 잔치에 초대를 받았어도 가족잔치에 초대해준 그 마음을 고마워했을 것이다. 당시 친구의 남편은 대기업에 다니면서 겸임교수도 했다. 경제력이 문제가 되어 비꼬듯 한 말이 아니라 그 친구는 친구에 대한 개념과 태도가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본인에게 민폐라는 말 뿐 아니라 시대의 궁핍함을 의미하는듯 해서 이후로 그 말이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그 그룹에 속한 친구들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선물 때문에 돌잔치를 하는가? 선물따위 안 받아도 상관 없었다. 그토록 계산적인 친구의 사고에 화가 난 나는 1년 후 도미를 하기도 했지만 이후 오랜 동안 연락없이 지냈다.

아다시피 세월에는 망각의 힘이 있다. 아이들이 고등생이 되었을 무렵 그런 사사로운 옛 감정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때 나는 페이스북을 시작했는데 그 친구가 내 지인임을 어찌 알고 페북은 눈앞에 그녀의 사진을 들이밀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친구신청을 눌렀고 그래서 다시 연락이 이어졌다. 그때는 그냥저냥 소식을 주고받다가 두번째 큰 실망은 한국에 온 이후 겪게 되었다.

귀국 후 초창기에 했던 일중 하나가 옛친구들과 만나는 일이었다. 그 친구와는 통화만 했다. 뭐랄까. 그 친구의 음색속에서 팍팍한 현실이 느껴져서, 내 말은 매우 현세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였달까, 그래서 나와는 삶의 철학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써 만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큰애 일로 무언가 물어볼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다가 지극히 세속적이고 계산적인 발상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를 듣게 되었고 심지어 단순히 정보를 원했던 내게 내 방식을 바꾸고 만연된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듣게 되었다. 나는 서글프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서 결국 화를 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좁고 얕은 냄비근성 같은 한국문화에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끼던 중이었는데 어쩌면 그런 문화의 중심에서 그리 당당할 수 있는지… 그녀는 단지 평범한 한국인일 뿐이지만 이후로 나는 그 친구로부터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4년여쯤 지나 이번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드디어 우리는 만났다.

친구는 최근에 통화할 때 느낀 대로 사고가 깊어지고 선해지고 밝아졌다. 아마도 2,3년 전 친한 지인이 겪은 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 그녀를 바꾸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친구는 그 지인의 죽음 이후, 호스피스 전과정을 이수했고 지금은 병동에서 호스피스 봉사자로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죽음을 접하고 생각하는 과정은 매우 의미가 있는데 결국 죽음은 삶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매일 죽어가는 환자들의 모습을 통해 친구는 어떻게 살아야 진실되고 행복하게 잘 사는 삶인지, 인간에 대한 바른 예의는 무엇인지,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등을 고뇌하고 깨달았던 것이다. 친구의 눈빛과 말투와 목소리에서는 내가 보았던 그 어느때보다 생기와 진솔과 맑음이 넘치고 있었다.

봉사로 변화하는 인간의 참된 유형을 보여준 친구, 자신의 두꺼운 벽을 깨고 타인의 손을 맞잡게 된 친구,

앞으로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지울 일은 없을 것이다.

2월이 되면 또 만나기로 했는데 그땐 더 잘 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