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Metoo의 현장

지금부터 20 몇 년 전의 일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매우 선명하게 한 장면 한 장면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분명 누군가의 Metoo현장에 있었다. 그녀는 용감했고 그녀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도 용감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한없이 비겁했다. 지금 한국은 2018년 1월의 어느 날을 계기로 엄청난 변화가 시작됐다. 캐캐 묵은 의식이 바뀌고 굳건해 보였던 편견이 부서진다. 이 파격적인 진보를 누군가는 마치 매직처럼 한 달 만에 이룬 결과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20 몇 년 전의 그녀처럼 용감한 사람들이 수십년간 한 알 씩 한 알 씩 던진 달걀에 맞은 바위가, 너무 단단해서 꿈쩍도 안 할 것 같던 돌덩이가 이제야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가 성적으로 피해를 입은 일에 폭력피해 이상으로 의미와 해석을 붙이는 건 조선시대에나 줘버릴 망상이다. 피해자는 법으로 보호를 받는다는 단순한 메커니즘이 성범죄에 관한한 길을 잃은 채 너무 오랫동안 덜컹댔다. 이제 제대로 작동할 모양이다. 우리는 그 정의구현을 위해 끈질지게 눈을 부릅떠야 할 것이다.

20몇 년 전에 한 직장 동료가 화장실로 나를 불렀다. 동료는 자기와 절친인 ‘용감한 그녀’의 이야기를 작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꺼냈다. 안정되지 않은 톤과 흔들리는 눈동자로 보아 고백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한 유부남 상사와 ‘용감한 그녀’가 집방향이 같아 회식이나 야외 활동이 있은 후에 동승을 했던 계기로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강권에 의해 휴일에 야구를 보러 가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손을 잡히고, 그러다가 눈 앞에 보이는 모텔에 들어가자하고… 치욕스럽고 징그러웠지만 재치로 순간순간을 모면하곤 했는데 사내에 남자친구가 생긴 이후 그 사실을 눈치 챈 상사가 업무로써 그녀를 못 살게 굴기 시작한 것이다. ‘용감한 그녀’는 결국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투쟁하기로 결심했다. 전말을 전해들은 나는 여직원들에게 긴급회동을 요청했고 그날 저녁, 10여명의 남녀직원들이 카페에 모였다.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마음을 합쳐 돕기로 결정했다. 이후 한 번의 모의를 더 거쳐 사장님께 면담요청을 했다. 그 상사는 사장님의 처남이었다. 사장님은 반신반의 했다. 게다가 들은 바로 사장님도 과거 불륜의 전과가 있다고 했다. 그런 악재도 있었지만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 사장님의, 사장님의 처남의, 힘 있는 남자의 시대였다.

결국 ‘용감한 그녀’는 돈이 목적일지 모른다는 유언비어까지 들으며 회사를 떠나야 했다. 시쳇말로 꽃뱀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용기는 헛되지 않았다. 덕분에 사내에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 상사는 온갖 변명으로 그녀를 모략했지만 나는 그의 말이 새빨간 거짓임을 알았다. 첫 회식 때 보았던 그의 눈길이 모든 걸 말해줬다. 나는 상사인 그가 부하직원으로서가 아니라 한 여성을 대하듯 나를 보는 느낌을 받았다. 온당치 않을 뿐 아니라 이상하게 거부감이 일어서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다행히 내 직속상관이 아니어서 업무상 서로 부딪힐 일이 없었던 건 나로선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 상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오류는 회사내 여직원을 능글맞게 여자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재 드러난 Metoo의 가해자들은 모두 같은 오류를 범했다. 검사 안태근은 서지현씨를 검사이자 부하직원으로 보지 않고 희롱대상의 여자로 보았고, 이미 고인이 된 교수 조민기는 자식 또래의 여학생들을 제자로 보지 않고 힘없는 여자로 보았고, 연출가 이윤택도 왕처럼 군림하며 여배우와 단원들을 궁녀와 같이 인식했다. 충남지사 안희정은 수행비서를 비서로 보지 않고 아바타를 방불케 하는 여자로 보았고 미국의 한 의사는 환자를 환자로 보지 않고 노리개 같은 여자로 보았다. 그래서 그렇게 짐승 같은 짓들을 저질렀다.

그런데 지금 Metoo 현장에서는 남자들이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니까 특정 업무에서 여성을 배제시키거나 단둘이 만나지 않거나 회식에 동석시키지 말자는 발상들이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성범죄의 원인이 마치 여성이라는 듯, 여성만 없으면 만사 해결인 듯 말이다. 참으로 핵심에서 한참 벗어난 처방이다. 남성의 본능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의 사회적 권리와 인간적 교류를 제거하려 든다. 이 문제는 그렇게 해결될 수도 없을 뿐더러 이야말로 남성중심의 몰상식한 발상이다. 원인은 여성이 아니다. 남자들의 시선이다. 부하는 부하로, 제자는 제자로, 환자는 환자로, 비서는 비서로...만 바라보아야 한다. 이 Metoo 운동은 그런 의식의 개혁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여성들의 피눈물이다.

시트콤에서 야동순재의 역할을 맡았던 이순재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대를 인격체로 대해야지…’

Metoo의 현장에서 한가지 다행인 건 세상엔 이런 남자가 더 많고 앞으로는 더 많아질 거라는 확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