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미국, 다른 삶(8)-미국에서 재미있게 살기

두 살바기 막내가 ‘올라, 우노, 씨’를 말했던 순간, 나는 도미 후 가장 신나게 살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로 이사 가서 신청해 놓고 오래동안 기다렸던 Adult School의 child care에서 자리가 나 꿩 먹고 알 먹게 된 행복감으로 막내를 교실에 들여보내고 내 교실로 향하며 콧노래를 부르던 시절이었지.

“응?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아린아?”

한국말을 곧잘 했던 터라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해서 물었다. 그러자 막내는 슬몃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우노, 도스, 뜨레스를 읊조렸다. 그제서야 막내가 하는 말이 스페인어라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 웃겨서 푸하하 박장대소를 했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 아닌 스페인어를 먼저 배우는 한국아이는 흔치 않을 거라 장담하면서 말이다.

우리 교실에는 소수의 한국, 중국, 일본, 프랑스, 태국인이 있었고 다수의 멕시코인이 있었지만 child care엔 막내를 뺀 친구들, 선생님, 보조선생님 할 것 없이 모두 멕시코인이었다. 엄마가 영어를 배우는 동안 막내가 스페인어를 습득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난 프랑스인 소피가 아이를 꽤 근사한 프리스쿨에 보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의식속에서 끄집어 냈다. 나는 남편이 포닥을 하던 시기였기에 이 공짜 Child care가 기쁠 수 밖에 없었지… 처음엔 진짜 웃겨서 웃다가 곧 진지해 졌다. 아이를 맡긴 엄마들은 둘째 시간이 끝나면 간식을 주러 child care에 가야 했는데, 그때 친구들과 놀고 있는 막내를 보면서 나는 왜 영어로 말한다고 믿었는지… 그냥 생각없이 바라봤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했다. 선생님? 인자하시고 예절 바르시고, 시설? 밝고 깨끗했고… 학습으로 배우는 것은 없지만 놀면서 질서와 양보와 사회성을 배우리라 기대하지 않았던가. 겪어보니 엄마들과 아이들이 순수하고 착하고… 막내는 다툼없이 재미있게 생활하고… 다시 생각해 봐도 괜찮았다. 게다가 본토인에게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지 않은가^^.

많은 ESL school을 거쳤지만 내가 가장 신나게 다녔던 곳이 바로 이 Adult school이었다. 정식학교 같은 체계가 있었고 제일 높은 반은 GED수업이었으며 학생들은 한결같이 진지하고 열심이었다. 타국 친구들은 대부분 대졸 이상이었던 반면 멕시칸 친구들은 소수를 빼면 학력이 낮은 편이었는데 그들이 미국검정고시인 GED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그날은 우리 모두의 경사날이 되었다. 우리는 신이 나서 박수를 치고 당사자는 겸연쩍지만 스스로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함박 웃음을 지었다. 경쟁이나 강요 없이 모두가 성취동기를 가지고 모인 곳의 분위기는 활기차고 따뜻하고 생기발랄했다. 그 기운을 받아 우리 모두 참 행복해 했다.

학교에서는 별도로 컴퓨터나 부모교육 같은 수업도 진행했는데, 그로인해 큰 혜택을 받은 덕도 내 행복을 업그레이드 시킨 중요한 요소였다. 한국에서는 육아책을 쉽게 접하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주변에 물어서 해결할 수 있었던 반면, 첫 애가 학교에 가고 둘째가 태어나고… 이런 일이 생기고 저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낯선 땅에서 낯선 표정 지으며 낯선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엄마 노릇은 내 딸들의 작은 손을 꼭 쥐고 걷는 그 길이 옳은 선택인지를 늘 되묻게 만들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무료전화에 영상통화도 가능한 지금은 고대유물 같은 고민이 되었지만… 1주에 한번 10주간 진행된 부모교육은 그야말로 등대요 횃불이었다. 10주후 나는 확실히 전과 다른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있었다. 사실, 별 것은 없다. 진정한 사랑으로 대하고(본능이 아닌 사려 깊은 사랑), 자녀의 눈높이에 맞춰 생각하며,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부모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고, 거짓을 피하고 약속을 잘 지키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학교에서 오전 시간동안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했다면 오후엔 친구들과 아이들 플레이 데이트를 겸하는 실전의 시간을 살았다.

CA에는 멕시칸 친구들이 많았다. 모니카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은 멕시칸 친구로서 직업이 변호사였다. 군인인 남편을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느라 자신의 커리어는 뒷전이었고 애써 교육시킨 보람이 없어 부모님이 못마땅해 하셨다. 하지만 모니카는 자신에겐 행복추구권이 있다고 했다. 융성한 점심을 3시간여에 걸쳐 먹는 자국의 풍습대로 모니카는 매번 특별한 음식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타코와 브리또만 알고 있던 나는 그녀의 행복추구권덕을 엄청나게 누렸음을 인정한다. 내가 대접한 한국음식의 레시피를 적어 직접 자신의 요리로 만드는 그녀는 변호사가 아니라 요리사가 되었다면 더 행복했을 것이다.

멕시칸 레스토랑 쉐프 티모시(가명)는 불법취업자였다. 점잖고 성실한 티모시는 ‘코요테’라 불리는 딜러?를 통해 밀입국한 경험을 쉬는 시간 틈틈이 소곤소곤 이야기해 주었다(지금은 다 아는 스토리가 되었지만 2004년도만 해도 베일에 가려진 흑역사였다). 돈을 주면 코요테는 여러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밀입국 시켜준다고 했다. 주로 밤에 움직이는데 어느 지점에서는 도보로 어느 지점에서는 차의 트렁크에 숨어서… 국경을 건너온다. 때때로 국경지역에서 총성이 들리고 재수가 없으면 그 총에 맞기도 한다고… 이건 뭐 스릴의 도가니!! 내가 이태껏 살면서 들어본 최강 흥미진진 서스펜스 실화였다.

스테파니는 야외에서 여는 딸 생일파티에 가족 모두를 초대했다. Child care처럼 우리만 빼고 모두 멕시칸이었다. 아이가 없는 커플들도 있었으니 이건 흡사 그들의 동네잔치였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알미늄 풍선들이 지속적으로 하늘로 치솟다가 떨어지는 곡예를 펼쳤다. 햇볕이 풍선의 결을 따라 사방에서 번쩍였다. 한 가을 맑은 날이 쪽색으로 푸르렀지만 바람은 꽤 불었다. 나뭇잎이 부비부비 펄럭댔고 십여 개의 테이블을 덮은 흰 종이는 바다 포말처럼 버석댔다. 그 위에서 살사와 옥수수칩과 주황색 음료가 둥둥 표류했다. 스테파니가 들고 다니는 주전자 주둥이에선 뜨거운 애플사이다가 쏟아져 나와 느닷없이 쌀쌀해진 입술을 달큰하게 덥히고 옥수수칩은 바삭하고 고소했다. 여기저기에 지펴진 불내음이 가을 풍미를 더하고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흙바닥에선 이른 낙엽이 뒹굴었다. 서너 개의 거대한 나무 도마, 어떤 것은 잘린 통나무 자체가 도마이기도 했다, 위에 야채, 버섯, 고기…가 쌓였다. 라틴음악의 흥겨운 박자에 맞춰 구릿빛 건장한 사내들이 산더미 같은 식재료를 두 개의 칼로 두드리며 난타 공연을 펼쳤다. 칼을 쥔 남자들의 이마에 송글 땀이 맺혔다. 잘게 부숴진 재료는 그릴 위에서 지글대며 차콜 향을 뒤집어 썼고 그것은 고소한 또띠야 위에서 또 한번 변신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타코가 탄생 되는 순간이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려도 상관없었다. 나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의 타코에 코를 박고 어깨를 흔들었으며 나는 어느 멕시코 마을에 와있는 환상에 빠져 보조개가 패이도록 히죽댔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바로 내 십수년의 미국생활중 하이라이트였다. 어쩌면 집에만 머물고 있는 현재가 극명한 대비를 이룬 때문에 그 소중한 추억이 더 보물같을지도… 17miles가 펼쳐진 멋진 자연경관, 늘 코끝에 머문 태평양 짠내… 친구들과 하나가 되어 서로의 문화를 나누고 욕심없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던 시절...

미국에서 재미있게 사는 법은 어쩌면 피부색, 나라, 언어를 애써 구분하며 견제하지 않고 하나처럼 굴며, 한나라 국민으로서 서로 배려하고 어울리며 사는 그것일지도…

9.11 때는 이슬람인을 코로나 때는 아시아인을… 온갖 인종이 모인 미국에서 벽을 치고 살면 참… 재미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