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이 조금 트인다 

오페라의 유령은 내가 브로드웨이에서 처음으로 관람한 뮤지컬이었다. 정말 그렇게 멋진 락오페라는 보다 보다 처음 봤다. 유령이 노래를 부르면 머리털이 자꾸 쭈삣대며 섰다. 그때가 오뉴월이라도 춥고 동지섣달이라도 오슬거렸을 것이다. 이후 한국 사는 선배네 가족이 뉴욕여행 온다 했을 때, 친구 딸내미가 미국 투어한다 했을 때, 나는 브로드웨이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꼭 보라고 권했다. 우리 가족, 이제껏 대여섯 편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았을 뿐이지만 작년에 뉴욕에 갔을 때 새로운 작품이 아닌 오페라의 유령을 재관람했다. 사실 가족 전체가 뮤지컬을 보려면 비용이 꽤 들기 때문에 되도록 새 작품을 체험하고 싶은 심리가 생긴다. 그런고로 그동안 차례차례 새로운 작품을 보았다. 모두 훌륭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른 뮤지컬을 보면 볼수록 첫 관람작에 대한 향수(鄕愁)가 짙어 졌다. 그리고 처음보다 더 가슴을 도근대며 두번째 오페라의 유령과 조우했다.

두번째 본 오페라의 유령은 세월을 품고 화려해 졌다. 1988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시작한 이래 2012년을 기점으로 한번 변신을 꾀했다니 의도치 않게 옛 버전과 새 버전을 본 셈이다. 새 버전은 bigger and better란 캐치프레이즈로 광고되지만 내겐 그냥 삐까번쩍 총천연색으로 탈바꿈된 느낌이었다. ‘모나리자’에 눈썹을 달고, ‘절규’에 눈동자와 혀를 그려 넣은 느낌이랄까… 내 추억 속 오페라의 유령은 흑백의 미학이 고매함을 돋운 독특한 매력의 결정체였다. 눈으로 분산되지 않고 귀로 듣기에 음악성이 최고조를 이루었던 작품은 이제 곳곳에 다른 작품의 데자뷰를 가진다. 라이온 킹도 보이고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보이고…

그렇게 아쉬웠던 오페라의 유령은 향수(享受)를 잃어 나는 세번째 관람에 대한 꿈을 키우지 않았다. 그러다 난데없이 지지난 주말에 지인의 카톡을 타고 그것이 날라왔다. 코로나로 인해 공연이 중단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유튜브에 ‘The shows must go on’이라는 채널을 열고 자신이 작곡한 뮤지컬을 48시간 동안 공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다. 거금?^^을 주고 다시 볼 생각은 없었지만 코로나를 위한 자선기금모금을 겸하므로, 이건 뭐 좋은 작품 보면서 좋은 일 할 수 있는 기회,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자막을 띄우고 소리는 블루투스로 스피커에 연결했다. 세번째 쇼는 우리집 거실에서 공연됐다. 사실 이번엔 자막이 내 가슴을 도근대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곡의 선율과 배우들의 몸짓과 무대장치를 잘 감상하는데 그쳤던 관람은 늘 아쉬웠다. 아, 이 장면은 이런 내용이었구나, 저래서 저렇게 구슬피 노래를 불렀구나…, 크리스틴이 유령을 향해 “이제 당신의 얼굴은 내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라고 고백할 땐 미녀와 야수도 생각났지만 위대한 사랑의 힘이 느껴져 유령이 빙의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거실에 앉아 대사를 놓치면 다시 되돌려 읽고 좋은 곡이 들리면 또 한번 음미하면서 오페라의 유령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가는 기쁨이 황홀했던 순간, 문득 이렇게 좋은 걸 혼자 보고 있다는 사실이 경종을 울렸다. 이러면 아니 되지요~, 나는 단박에 전화기를 집어 든다. 가족 단톡방에는 이미 올렸고… 또 누가 좋아할까?? 좋아할 만한 지인을 찾아 카톡 메시지창에 쓰기 붙이기를 거듭해서 속사포로(그래봤자 느리지만~~😉) 마구 오페라의 유령을 날린 후 다시 유튜브 화면으로 돌아와 재생버튼을 누른다.

쇼는 훌륭하게 끝났다. 아주 잘 아무려진 보따리로서 내 나머지 인생길에서 대롱대롱 추억이란 이름으로 매달려 다닐 것이다. 훗날 같은 보따리를 풀며 추억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 거듭 자꾸 생각났다. 그래서 보내고, 또 보내고... 얼마나 행복하던지… 내가 이 정도인데 웨버 할아버지는 정말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행복하실까…

코로나가 우리를 집안에 가두어 가슴은 무겁게, 온 몸은 주리를 틀게 만들었지만 차가운 그늘을 있게 하는 건 선명한 빛인만큼 어딘가에서 반짝이고 있는 그것을 찾아내 우리는 숨통을 틔워야 한다. 맑아진 지구, 휴지 한 칸이 귀해진 시선, 숨막히게 달려온 학생들에게 휴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함께 깨달은 일상의 고마움, 국가의 소중함, 오페라의 유령… 아름다운 문인 무스타파 달랩의 기막힌 통찰처럼 살아있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도록… 그것이 무엇이든 어둠에 시선을 두지 말고, 빛을 보려고 노력하면 숨통이 조금 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