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고모와 우리 아버지만 빼고 전라북도의 고향땅 인근에 뿌리를 내린 형제분들은 내 머리속에서 ‘촌부’라는 이미지로 저장되었다. 지방에 살면서 사투리를 쓰고 약간은 촌스럽게 옷을 입고 서울 살던 우리 가족보다 살빛이 검고… 아버지 형제분들은 별달리 출세하신 분도 재정이 매우 풍족해 떵떵거리며 사시는 분도 없다. 제일 여유롭게 살던 막내 고모네는 연대보증을 잘못 서서 망한 이후 재기를 못 하는 듯 보였고 다른 분들도 그냥저냥 생업에 종사하며 그 많던 머리숱을 잃고, 더 진한 사투리를 구사하며, 젓갈냄새가 진동하는 김치를 여전히 좋아했다.

이제 촌부님^^들은 노인이 되었다. 나는 중년이 되었다. 내 딸은 그분들의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는 내 예전의 모습으로 커있었고, 침침한 눈을 비벼대며 서로의 얼굴을 깊게 들여다보는 행위는 나나 촌부님들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두 손을 맞잡고 한껏 웃으며 서로 패인 주름을 내보일 적에 이상히도 서로의 눈동자 속엔 세월의 장구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서슴없이 어린 장조카녀로 돌변했고 촌부님들은 숱 적고 희끗한 머리와는 상관없이 그 다정했던 고모(부), 숙부(모)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문득 내 뿌리의 진한 향을 느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순박하고 꾸밈없고 인간적이고 젊잖은 촌부님들의 피가 내게 흐르고 있다는 느낌, 내가 가진 인류애와 바른 생각과 높은 자존감은 뽀얀 내 뺨을 하염없이 예쁘다 말해주며 진심으로 귀여워해 주신 그분들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시동생들을 친형제지간처럼 오랜동안 데리고 살았던 엄마의 미덕, 빙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형제애… 아, 내 뿌리는 그렇게 만들어졌구나…… . 지천명은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나이라더니 내나이 이즈음에서야 뿌리의 기원에대해 더듬어 나를 들여다 보았다. 부정한 재벌이 아닌 선량한 촌부님들의 핏줄임이 자랑스러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가 미국 사는 동안 모두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묘소에 들러 절을 하고 둥그런 봉분을 끈끈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눈동자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연아야, 왔구나, 내 새끼… 할머니, 할아버지 목소리가 내 손끝으로 생생히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