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과거의 일을 잘 잊는 머리를 가지기도 했지만 현재의 모습에 어찌 그런 변화가 초래되었는지를 심층적으로 파악하지 못 한 데 그 의아함의 원인이 있는 듯 했다. 살면서 스스로 노력을 했다거나 첨예한 각성끝에 의도적인 자기변화를 꾀했다면 당연히 인지가 되었겠으나 무심히 아내가 골라준 옷을 사고 아내가 데려가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아내를 위해?(본인의 표현이다) 매일 샤워하고 아내가 코치하는 코디법을 따르니 그러는 동안에 어떤 변화가 스르륵 찾아왔는데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아내를 잘 따라주어 옛 학우들이 몰라볼만큼 변화되었다면 그의 공도 없지는 않겠다.

당신은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는데… 가끔 내가 남편에게 중얼거리는 말이다. 그 속에는 내가 별로 매력을 못 느껴 오랫동안 해바라기를 하게했던 남자가 이제는 여러모로 꽤 괜찮아졌음을 경탄하는 의미도 들어있지만 반면 현재의 네 모습은 어떠니, 연아야? 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너는 무엇인가? 너는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가? 지금껏 네가 이루어 놓은 것은 무엇인가? 대체 너는 무슨 의미로 이 땅에 왔는가?…

자아상실감은 남편과 자식을 뒷바라지하면서 살던 주부가 갱년기에 흔히 겪는 마음의 현상이긴 하다. 대학시절 여성학을 배우면서 나는 절대 남편과 자식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건만 의도치 않게 현재의 내 주소지에는 자아상실감도 동거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다행인 것은 옆에서 지긋지긋하게 붙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고 방랑벽이 심한 하숙생처럼 들락날락 하며 살고 있기에 숨통을 틔우기는 한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이번 일과 같은 헤프닝은 하루 이틀 그 놈이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문을 잠글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내가 세련되게 변했다는 사실이야. 이런저런 소식을 전한 끝에 남편은 생뚱맞게 그런 결론을 맺었다. 그 세련됨이 단지 외양의 변모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내 손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어떤 자랑스러움이 아닌(자랑이랄 것도 없지만) 체온만큼이나 따뜻한 눈빛은 고맙다는 말을 진하게 전하고 있었다. 끝내 몰라주나, 했었는데… 갱년기의 하루가 이런 소박함으로 보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