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혹여라도 남편과 헤어진다면 쪽박을 면치 못 할 신세이다. 쌓아놓은 커리어도 없을 뿐더러 내 이름으로 된 통장도 없고 집명의도 남편 이름으로 되어있고 국민연금은 도미할 때 해제해 버렸다. 경제권은 애초부터 남편에게 맡겼다. 내게 들어온 수입이 있으면 다 남편에게 주었다. 왜? 왜냐하면… 남편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남편 돈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레 남편이름으로 된 통장을 기반으로 생활해왔다. 현금카드나 신용카드 모두 나는 남편의 가족으로서 등록되어 교부받았다. 그렇다고 남편이 내게 생활비와 용돈을 주는 시스템은 아니고 나는 내 카드로 남편은 남편카드로 소비를 하면 우리의 하나뿐인 (입출금자유)통장에서 정산이 이루어졌다.

한국에 온 이후 어느날, 나는 남편에게서 "내 통장"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남편은 그제껏 내 것 네 것을 따진 적이 없었다. 처음엔 무심코 나온 말이겠지 했는데 이후로도 두세번 같은 말이 그의 입술에서 흘렀고 단어의 선택이 아무래도 부적절해 나는 따져물었다. 느낌대로 '우리'가 아닌 ‘내’는 무의미한 혼동이 아니었다. 나는 쇼크를 받았고 진심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뭐지? 미국에서 한국으로 생활의 터전이 바뀌긴 했지만 지금껏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패턴이 왜 자꾸 뒤죽박죽이 되어가는 거지? 남편은 그대로 김아무개이고 나는 여전히 김연아인데… 남편의 명의로 된 통장이지만 실제로 주인은 나인 듯 살아온 지난날이지 않던가. 그렇다고 내가 남편의 자유를 구속한 적은 맹세코 없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남편의 구매욕구를 꺾은 적은 딱 두 번, 텔레비젼과 골프가 있었군... TV는 인터넷으로 원하는 동영상을 볼 수도 있고 있어봤자 필요이상으로 시청할 일만 생길 것같기에 반대했었다. 덕분에 딸들이 독서광이 되지 않았던가. 골프는 미국에서는 본둥만둥 하더니 난데없이 한국에 와서 시작하겠다고 해서 반대했다. 한국에서의 골프는 비용이 꽤나 들고 우리는 집때문에 많은 빚을 지는 신세인 것이다. 두 가지 다 남편과는 잘 협의가 된 사항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남편이 굳이 자기가 돈을 벌고 그 돈이 자기 통장으로 들어가는 이 상황을 정색하고 부각시켜 꾀하고 싶은 변화란 무엇인가… … . 그 답을 알 수 없어서, 그때는 서로 감정이 안 좋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어서 더우기, 그래서 머리가 자꾸 어지러웠다.

그 일로 나는 단단히 화가 났다. 내 인생, 내 커리어를 접고 남편을 따라 도미한 이후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했던 지난 세월들이 울컥하고 가슴에서 튀쳐나왔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나는 결단코 내 사회생활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남편에게 돈 많이 버는 것을 바란 적이 없다. 돈은 살 만큼 벌면 되고 중요한 것은 남편의 행복이란 생각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돈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을 실천하며 주어진 수입 내에서 결핍이 일어나지 않도록 살림살이를 했다. 옷도 안 샀고 그릇도 안 샀다. 덕분에 생긴 여윳돈은 여행을 하며 가슴으로 풍족함을 느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인생에서 ‘내’통장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솔직히 말하면 내 우울감 체험은 그때가 시발점이었다. 아마도 갱년기라는 시기와 맞물려 악재로 작용한 듯 하다. 예전의 나라면 콧등으로 쳐냈을 말들이 콕콕 와 박혔다. 더불어 한 몸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이 내 인생에서 이탈된 느낌이었고 더이상 기존의 삶의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대했다. 남편과는 냉전을 벌였다. 남편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으면서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그가 너무도 꺼려져 대화조차 하고싶지 않았다. 치사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치사해서 돈을 벌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노의 마우스질을 해보았지만 수많은 구인광고를 훑으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